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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3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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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17년 |
국적 | 프랑스 |
대표작 | 〈발레수업〉, 〈목욕통〉, 〈페르난도 서커스 소녀 라라〉, 〈무대 위의 발레리나〉 |
평생을 괴롭힌 트라우마
여기 한평생 여성을 혐오해온 화가가 있다. 그가 여성을 혐오하게 된 이유는 성적인 취향이나 선천적으로 타고난 정신적인 결함 때문이 아니라 운명처럼 찾아온 어떤 사건으로 받은 충격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었다. 당시 그는 고작 열두 살의 소년이었다. 받아들이고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어린 나이였다.
유년시절 그의 집안은 전형적인 상류층에 속해 있었다. 할아버지 때부터 금융가에서 재산 꾀나 모은 부르주아 집안이었다. 아버지 역시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유능한 은행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화가의 어머니는 매우 미인이었다. 부잣집에 아름다운 여인이 시집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버지는 아름다운 어머니를 지극히 사랑했지만 불행하게도 어머니에게는 다른 남자가 있었다. 바로 화가의 삼촌이자 아버지의 동생이었다. 집안에는 하루아침에 먹구름이 가득해졌고, 아버지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어머니를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이려 노력했지만 어린 아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어머니를 이제 가장 혐오하게 된 것이다. 아들은 매일 밤 어머니가 불행해지도록 기도했다.
운명이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참으로 가혹할 때가 많다. 어머니는 아들의 간절한 저주 덕택인지 어느 날부터 시름시름 앓더니 그만 죽고 말았다. 어머니를 못 잊어 하는 아버지의 슬픔은 극에 달했다. 결국 하루하루를 폐인처럼 지내는 아버지를 평생 바라봐야 하는 참혹한 현실이 닥쳐왔다. 어머니가 불행해지면 사라질 것 같았던 아들의 분노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분노의 대상만 사라졌을 뿐 울분과 화는 평생 그를 옥죄었다. 이제 그는 어머니가 아닌 세상의 모든 여성을 향해 분노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평생 어떤 여인도 사랑할 수가 없게 되었다. 마네, 모네, 세잔과 함께 프랑스 근대 미술을 열었던 드가의 이야기다.
드가가 남긴 자화상을 보고 있노라면 불행했던 그의 유년시절과 아픈 기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굴곡진 삶을 되짚어 보게 된다. 전공인 법학을 접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할 무렵인 이십 대 초반에 그린 드가의 자화상에는 상처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화가의 모습을 읽을 수가 있다. 약간 내려앉은 드가의 눈꺼풀에는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냉소가 가득 담겨 있다. 드가의 내려앉은 눈꺼풀은 이후 삼십 대와 노년기에 그린 자화상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스물아홉 살에 그린 〈모자를 든 자화상〉은 딱딱하게 굳어있는 자신의 모습을 최대한 자유롭게 설정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턱시도를 하고 중절모와 장갑을 손에 쥐고 있는 드가는 전혀 화가 같지 않다. 그는 마치 런던의 잘 나가는 금융인이거나 법률가처럼 보인다. 드가는 권위 있는 사람으로 보여지길 원했다. 특히 여자들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그런 그를 여자들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매우 사교적이었던 그의 친구 마네하고는 정반대였다. 〈모자를 든 자화상〉은 여자를 거부하는 드가의 권위적인 방어본능이 담긴 그림이다.
예순여섯 살에 완성한 〈노년의 자화상〉은 파스텔로 그린 작품이다. 드가는 파스텔화의 대가로 불릴 만큼 색채미의 구현 능력이 탁월했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거친 윤곽선으로 선을 운용하는 드가의 뛰어난 드로잉 실력이 돋보인다. 또 화려하고 풍부한 색채가 강렬한 대비를 일으키고 있는데, 이는 드가 화풍의 전형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폐쇄적이고 괴팍한 성품은 〈노년의 자화상〉에서도 그대로 느껴진다. 오히려 고집불통 늙은이의 이미지가 더욱 선명해진 듯하다. 노련한 인생 선배의 관조적 자세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 늙은 화가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여전히 불만투성이다.
세대의 격차를 두고 이십 대와 육십 대에 그린 자화상 속 드가의 모습은 생리적으로 늙어 있을 뿐 결코 다르지 않다. 특히 침울하고 무거운 눈빛과 입모양은 놀라우리만치 그대로이다. 세상은 급변했지만 화가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다.
소녀 발레리나의 슬픈 현실은 소년 드가의 아픈 자화상
후대 미술사가들은 드가의 작품 속에 나타난 인물의 운동성에 주목한다. 신화나 역사 혹은 자연을 소재로 해온 기존의 그림에서 벗어나 드가는 사람의 동작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관찰한 뒤 여러 번의 드로잉을 거쳐 작품을 완성했다. 사람의 동작에 대한 드가의 관찰력은 물리학자를 압도할 만큼 사실적이며 분석적이다. 당시 드가의 작업실은 화실이라기보다는 마치 실험실에 가까웠다.
그런데 드가가 그린 인물들의 섬세한 역동감 이면에는 몇 가지 숨겨진 함의가 담겨 있다. 드가가 묘사한 인물의 동작은 당시 부르주아 계급이 즐겨 관람했던 발레와 서커스, 경마 등을 소재로 삼았다. 드가 역시 부르주아 계급 출신이었던 탓에 이러한 소재가 매우 자연스럽게 작품에 녹아들었다. 드가는 여성의 나체도 즐겨 그렸는데, 옷을 벗고 누워 있는 정적인 여인의 모습이 아니라 목욕을 하거나 빗질을 하는 동적인 누드를 주로 묘사했다. 여성의 나체를 엿보는 것도 부르주아 계급이 즐기는 여가활동(!) 가운데 하나였음에 주목한 드가는, 그들의 속물근성을 조용히 꼬집는다. 물론 여성을 좋아하지 않는 화가 자신은 이러한 혐오스런 부류에 속하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드가가 동적인 인물을 묘사함에 있어서 대부분 여성을 대상으로 그렸다는 점이다. 드가는 평생 여성을 혐오해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정작 작품에는 많은 여성을 등장시켰다. 드가에게는 여성의 모습이 단지 그림의 대상이 되는 피사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까?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하는 일부 작품이 눈길을 끈다. 드가는 발레를 하는 소녀 무희(舞姬)를 묘사한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1877년에 완성한 〈무대 위의 발레리나〉이다. 드가는 무대 위에서 발레를 하는 장면보다는 무대에 오르기 전 리허설이나 무대를 마친 이후 상황을 주로 그려 왔는데, 이 작품은 이례적으로 무대 위 연기 장면을 그대로 담아냈다. 그림 속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무대 뒤 한 남자가 어린 발레리나를 감시하듯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다. 이를 두고 많은 평론가들 사이에서 해석이 분분하다.
당시 발레리나는 대부분 가난한 노동자의 딸이었는데, 이들은 공연이 끝난 뒤 무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돈 많은 남자들로부터 매춘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드가는 아름답고 화려한 발레 공연을 관람하는 부르주아 남성들 이면에 득실거리는 추잡한 성욕을 함께 묘사했다. 여기서 그림 속 어린 발레리나는 그가 혐오했던 어머니와 같은 여성이 아니다. 발레리나는 어린 드가와 같은 희생자일 따름이다. 드가는 어린 시절의 상처와 분노를 이렇게 작품 곳곳에 섬뜩한 모습으로 나타냈다.
줄에 매달려 곡예를 펼치는 소녀를 그린 〈페르난도 서커스 소녀 라라〉라는 작품도 눈여겨 볼만하다. 가는 줄 하나에 매달려 세상 밖으로 내몰린 소녀의 모습에서 상처받은 어린 시절 드가가 겹쳐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예술이 아무리 위대한들 인생의 덧없음을 위로할 순 없다
1834년 프랑스 파리의 부유한 금융가 집안에서 태어난 드가는 이름에서부터 부르주아의 기운이 풍긴다. 드가의 본명은 일레르 제르맹 에드가 드가(Hilaire Degas)로 길고 복잡하다. 이름 가운데 '일레르'는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금융업으로 부자가 된 할아버지의 이름을 딴 것이고, '제르맹'은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목화농업으로 성공한 외할아버지에게서 받은 이름이다.
드가는 풍족한 집안의 후광으로 그림을 팔아 생계를 충당하는 여느 화가들과 달리 마흔이 넘어서까지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만 그리며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여유는 평생 가지는 못했다. 드가의 형제들은 서로 더 많은 재산을 차지하려고 아귀다툼을 일삼았고, 결국 동생이 집안 재산을 송두리째 사업에 투자하다 파산하고 만다. 중년에 접어든 드가는 더 이상 돈 걱정 없는 팔자 좋은 예술가가 아니었다.
드가는 처음부터 화가가 되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여느 상류층 자제와 다르지 않게 인문학과 철학, 문학 등을 공부했고,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는 집안의 뜻에 따라 법학을 전공했다. 물론 어려서부터 예술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취미 정도로 생각했다.
드가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데는 어머니의 외도와 갑작스런 죽음에서 온 충격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어린 드가는 세상을 향해 높은 담을 치며 그 안에 자신을 가뒀다. 그리고 현실과 거리를 두는 일에 몰입했는데, 그림의 세계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1855년 파리 국립 미술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한 드가는, 거장 앵그르와의 우연한 만남에서 큰 가르침을 얻는다. 당시 앵그르는 젊은 미술학도 드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젊은이,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선이라네. 선 그리는 연습을 게을리 하지 말게. 선을 제대로 그릴 줄 알아야 색을 칠할 수 있는 법이라네. 그리고 그림의 소재는 본인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생활에서 찾도록 하게. 내 기억과 삶을 그릴 수 있어야 제대로 된 화가라네."
앵그르의 짧은 충고는 젊은 화가가 평생 가슴 깊이 간직하는 사표(師表)가 되었다. 드가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수 천 번의 드로잉을 거듭했다. 드가가 그린 인물에서 유독 역동성이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그만의 탁월한 드로잉 솜씨가 한 몫 했기 때문이다. 드가의 그림이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에게서 느껴지지 않는 구도의 섬세함과 치밀함이 배어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림은 결국 수많은 선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드가는 깨달은 것이다.
또한 드가는 자신이 눈으로 본 것을 그대로 그리지 않았다. 즉, 자신이 본 광경을 머릿속에 깊이 간직해 둔 채 작업실로 돌아와 그 잔상을 자신의 다른 기억들과 조합해 형상화 해 냈다. 화가의 기억과 삶을 작품에 녹여내야 한다는 앵그르의 금언(金言)을 드가는 작품을 통해 구현해 낸 것이다.
드가가 속한 인상파 화가의 모임인 카페 게르부아의 멤버들은 살롱전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들은 스스로 '인상파전'이라는 대안적 성격의 전시 프로그램을 만들어 자신들의 작품을 출품했다. 이 전시회는 1874년부터 1886년까지 모두 여덟 번이나 개최되었고, 드가도 그곳에 여러 차례 작품을 출품했다. 인상파전에 출품한 드가의 작품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았던 것은 뜻밖에도 〈열네 살 소녀 발레리나〉라는 조각품이다. 당시 드가는 시력이 급격히 나빠져 그림을 그리는 데 힘겨워했다. 그래서 손으로 작품의 형상을 느낄 수 있는 조각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면서 드가는 작품 활동을 더 이상 할 수 없을 정도로 시력을 잃고 말았다. 자화상에서도 나타났듯이 두껍게 내려온 눈꺼풀이 그를 세상의 모든 빛으로부터 차단하고 만 것이다.
드가는 인상주의의 색채, 역동적인 동작을 포착해내는 예리한 감각, 현실주의(혹은 자연주의)적 관찰 방법과 안정적인 고전주의의 미를 두루 갖춘, 한 마디로 매우 유능한 화가였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인상파 화가였지만 그의 작품은 인상주의를 초월했다고 칭송한다.
드가가 남긴 대단한 미술사적 족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화상을 바라보고 있으면 여전히 가슴이 아려온다. 얼굴이 유난히 길었던 이 화가는 평생 외롭고 쓸쓸했다. 죽은 뒤에 찾아온 영광은 과거로 소급해서 살아 있었던 화가를 위로할 수 없는 노릇이다. 예술 작품은 위대하게 기억되지만 그것을 만든 화가의 고단한 삶이란 덧없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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