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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자화상전

라파엘로 산티

라파엘, Raffaello Santi

완벽한 미인을 그린 외로운 화가의 초상

요약 테이블
출생 1483년
사망 1520년
국적 이탈리아
대표작 〈율리우스 2세〉, 〈레오 10세와 두 추기경〉, 〈오색 방울새의 성모〉

그는 너무 예뻤다!

〈스물세 살의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506, 45×33cm,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 어바웃어북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화가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고흐나 칼로처럼 고통스런 삶으로 점철된 표상일까? 아니면 피카소나 달리처럼 기괴한 도상과 비범함으로 똘똘 뭉친 예술성일까?

이러한 선입견을 정면으로 반박할만한 화가가 있었으니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절정기에 활약했던 라파엘로다. 〈아테네 학당〉, 〈오색 방울새의 성모〉 같은 걸작을 그린 화가로 유명한 라파엘로는, 수려한 용모에 우아하고 댄디함까지 갖춘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이런 매력남이 그린 자화상을 감상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림 안에 꽃미남의 풍모가 한껏 배어 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미인을 본다는 것은 훌륭한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것 못지않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라파엘로는 궁정화가인 아버지를 따라 어려서부터 자주 왕궁을 출입했고 그 영향으로 우아하고 세련된 분위기가 몸에 배어 있었다. 우르비노 공작의 며느리는 자신의 결혼식에 온 여섯 살짜리 꼬마 라파엘로를 보고는 "어머나, 지금껏 이렇게 예쁘게 생긴 남자아이는 본 적이 없구나"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스물세 살의 자화상〉은 라파엘로의 수려한 용모가 그대로 드러난 작품이다. 이 그림을 그렸을 당시 그는 피렌체에 거주한 지 이미 2년을 넘기고 있었다. 피렌체는 이탈리아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로서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모두 이곳에서 활동했다. 이 밖에도 도메니코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jo, 1449-1494), 프라 바르톨롬메오(Fra Bartolommeo, 1472~1517) 등 수많은 화가가 이 시대에 피렌체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젊은 시절 라파엘로는 언행이 바르고 교양이 넘치는 청년이었다. 1504년의 한 문헌은 그를 "신중하며 온순하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 그림에서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고 얼굴 표정도 소묘로 그린 〈스물한 살의 자화상〉에 비해 훨씬 성숙한 분위기를 풍긴다. 부드럽게 묘사된 그의 얼굴 윤곽선은 우아함이 돋보이는 예술적 효과와 함께 준수한 청년의 얼굴을 한껏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스물세 살의 자화상〉에서는 라파엘로만의 부드러움과 우아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다른 거장들의 자화상이 권위를 상징하거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다만 인물의 개성을 드러내고 생동감을 살리는 면에서는 다소 미흡하다는 지적이 미술사가들 사이에서 제기되기도 한다.

모성애를 자극하는 여린 미소년의 얼굴

젊은 미술학도 라파엘로는 대가들의 작품을 면밀히 관찰하고 그들을 본받았다. 그는 르네상스 미술의 메카 피렌체가 제공하는 모든 조건을 충분히 이용하여 해부학과 투시법을 심도 있게 연구했고 색의 변화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라파엘로는 자연현상과 새로운 환경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미치는 영향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그는 특히 여성, 그 중에서도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스물한 살의 자화상〉, 소묘, 약 1504, 38×26cm, 영국 옥스퍼드 애슈몰린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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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남다른 관찰력은 그의 자화상에서 유감없이 나타난다. 소묘로 그린 〈스물한 살의 자화상〉에서는 목탄을 사용해서 유려한 선을 만들어내어 우아하지만 아직은 치기 어린, 그리고 얼핏 보면 소녀로 착각할 만큼 아리따운 청년의 형상을 그려냈다. 당시 라파엘로는 주변으로부터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는 얘기를 종종 듣곤 했다. 라파엘로의 어머니 마기아(Màgia)는 우르비노의 한 성실한 상인의 딸로 매우 아름답고 다정한 여인이었다.

〈스물한 살의 자화상〉에는 준수한 청년의 모습이 부드러운 선을 통해 형상화됐는데, 이는 단지 라파엘로의 실제 모습뿐만 아니라 화가로서 그의 예술적인 성향도 함께 보여준다. 라파엘로는 대상을 아름답고 우아하게 표현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타고났다. 또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는 데에도 능했다. 그는 스승인 페루지노로부터 순수하고 세련된 예술적 감각을 물려받았다. 아울러 다른 거장들이 그랬던 것처럼 라파엘로 역시 어린 시절부터 스승을 뛰어넘는 천재성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미인의 기준이 되었던 라파엘로의 성모

자화상에서도 드러났듯 라파엘로는 인물을 아름답게 그리는 초상화 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라파엘로는 15세기 이래로 침체를 맞은 초상화 분야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라파엘로의 초상화는 그만의 우아함을 통해 완벽한 형상화를 추구하여 이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풍경을 초상화의 배경으로 삼는 전통적 기법에서 벗어나 흐릿한 그림자가 드리운 실내에 인물을 배치하는 시도는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특히 심오한 현실주의적 정신과 함께 인물의 성격, 분위기, 내면세계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과 표현력까지 담아냄으로써 대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한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율리우스 2세〉, 〈레오 10세와 두 명의 추기경〉이다(이 작품에 등장하는 추기경들은 라파엘로가 로마에 머무는 동안 그를 후원하고 비호해준 인물이다).

〈율리우스 2세〉, 캔버스에 유채, 1511, 108×87cm, 소장처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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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10세와 두 추기경〉, 캔버스에 유채, 1517~1518, 154×119cm, 소장처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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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섬세하고 여성스러운 라파엘로만의 초상화 기법은, '성모'의 얼굴을 표현하는데서도 빛을 발했다. 라파엘로는 피렌체에서 1504년부터 시작해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다양한 성모상을 완성했다. 〈오색 방울새의 성모〉, 〈풀밭의 성모〉, 〈책 읽는 성모〉, 〈아름다운 여정원사〉 등 대부분이 기존 성모의 형상에 일련의 변화를 준 작품들이다.

〈오색 방울새의 성모〉는 어린 아이가 손에 쥐고 있는 오색 방울새로 인해 그 제목이 붙여졌다. 그림의 구도는 피라미드 모양인데 이는 다빈치의 그림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피마리드 구도는 당시 다빈치가 처음 만든 것으로 작품에 안정감을 더해 준다. 이 시기 라파엘로가 그린 성모와 성자는 대부분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인물의 수 역시 비슷하며 모두 인성과 모성애를 주제로 하고 있다.

라파엘로가 로마에서 그린 〈시스티나 성모〉는 장엄한 신성(神性)을 우아한 인성(人性)과 결합하여 기묘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낸 작품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깊은 매력을 가지고 있다.

〈시스티나 성모〉는 '성모, 성자 그리고 성 식스투스, 성 바바라'라고도 불린다. 율리우스 2세(Julius II, 본명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Giuliano Della Rovere, 1443~1513)는 피아첸차(Piacenza, 이탈리아 북부 도시–역주)의 성 시스틴 성당에 선물하기 위해 라파엘로에게 이 작품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프랑스군이 이탈리아 북부에서 교황의 군대와 전쟁을 치르고 있을 때 피아첸차 지역이 교황을 지지한 일에 감사함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오색 방울새의 성모〉, 캔버스에 유채, 1507, 약 107×77cm,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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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티나 성모〉 제단화, 약 1512~1514, 264×196cm, 독일 드레스덴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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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3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이 그림에 그를 추모하는 의미가 부여되기도 했다. 그림 왼쪽 성 식스투스(Saint Sixtus)는 이상화된 교황의 초상으로 볼 수 있다. 성 식스투스는 이탈리아어로 성 시스틴이 된다. 율리우스 2세는 초기 기독교 시대의 로마 교황 중 한 사람으로 AD258년에 순교했다. 성 시스틴 성당은 성 식스투스를 기념해 지어진 것이다. 그림 오른쪽의 성 바바라(Saint Barbara)는 AD300년에 순교한 성녀다.

이들 성모상은 당시 라파엘로에게 엄청난 영예를 가져다주었다. 그가 그린 성모상은 매우 아름다웠고 작품마다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림을 본 사람들은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라파엘로가 그린 성모상은 모든 사람이 공감하는 모성애를 주제로 삼았다. 또 성모의 얼굴 밑바탕에는 이탈리아 여성의 아름다운 외모와 매력이 깔려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이탈리아에는 미남과 미인이 많기로 유명하다. 이런 이유로 수백 년 뒤 유럽에서는 미인을 가리켜 '라파엘로의 성모와 닮았다'라는 찬사가 유행하기도 했다.

라파엘로의 성모상은 시대를 달리하면서 미술사적으로도 높게 평가받아왔다. 미술사가 바사리는 라파엘로가 "범인(凡人)의 경지를 뛰어넘어 신성함의 수준에 도달하여 완벽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라고 평가했다. 또 19세기 낭만주의 화가인 프랑스의 들라크루아는, "그의 영혼은 가장 완벽한 질서와 사람의 마음을 매혹시키는 조화로움을 사방 곳곳으로 전했다"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인문주의적 정서를 그림에 담아내다

라파엘로는 초상화를 통해 인물의 내면을 표현하고자 애썼다. 인물의 미간이나 눈빛 하나도 예사롭게 보아 넘기지 않았다. 아울러 라파엘로를 대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 바로 인문주의적 정서다. 그의 최고 걸작 〈아테네 학당〉은 이를 방증한다. 바티칸 '서명의 방'으로 불리는 '세냐투라의 방(Stanza della Segnatura)'의 벽화 〈아테네 학당〉에서, 라파엘로는 이 작품에 함축된 의미를 더욱 풍성하고 심오하게 만들기 위해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유명 인사의 초상으로 고대의 인물을 형상화했다.

예를 들면 다빈치의 두상으로 플라톤(Plato, BC428~BC348, 그림 가운데에서 오른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을 표현했다.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BC330~BC275, 그림 앞부분에 머리를 팔에 고인 채 대리석 탁자에 무언가를 적고 있는 사람)의 얼굴은 젊은 미켈란젤로를 모델로 했고, 유클리드(Euclid, BC330~BC275, 그림 우측의 전면에 몸을 구부린 채 컴퍼스로 원을 그리며 기하학을 설명하고 있다)는 당시 건축가 브라만테를 모델로 했다. 라파엘로는 이처럼 특이한 방법으로 당시 인문·예술과 고대 철학이 지닌 연관성을 표현하고자 했다.

〈아테네 학당〉, 벽화, 1509~1510, 279×617cm, 바티칸 시스틴 소예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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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다빈치의 얼굴로 플라톤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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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색의 원형 모자를 쓴 청년이 바로 라파엘로 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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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작품에는 라파엘로 자신을 화면 우측 가장자리에 그려 넣었다. 인류 최고의 석학들의 초상화에 자신의 얼굴까지 함께 그려 넣은 것이다. 그의 시선은 화면 밖 정면을 향하고 있다.

후대에 라파엘로가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이탈리아 르네상스 3대 화가로 추앙받게 된 것도 바로 〈아테네 학당〉 덕택이다. 비록 다빈치, 미켈란젤로보다 나이가 어렸고 또한 가장 먼저 세상을 뜨기도 했지만, 화가의 존재는 결국 작품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아테네 학당〉은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아네테 학당

플라톤이 BC385년 경 그리스 아테네 교외에 세운 철학을 가르치는 학교를 말한다. 보통 '아카데메이아(Acadêmeia)'라고 부르며 영어식 표기인 '아카데미(Academy)'의 기원이기도 하다. 아카데메이아는 영웅신 아카데모스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여기서는 학문을 가르치고 배우는 이들이 생활공동체를 구성하고 짧은 수면, 성(性)과 육식의 금지 등 엄격한 규율이 강조되었다. 철학을 중심으로 수학·음악·천문학 등을 공부하면서 인재를 배출하는 데도 힘썼다. 아리스토텔레스(Alestotele, BC384~BC322)의 소요학파와 구별되는 플라톤 철학의 본산이기도 했다. 529년 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us I, 483~565)가 이교사상의 본산지라고 지목하여 폐쇄할 때까지 약 900년 동안 존속하였다.

모든 것이 남보다 빨랐던 화가! 심지어 죽음조차도……

라파엘로는 1483년 이탈리아 중부의 우르비노(Urbino)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그를 '산치오(Sanzio)'라고 불렀다. 그러나 훗날 그는 자신의 세례명인 '라파엘로'를 서명으로 썼다.

라파엘로는 궁정화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나이부터 미술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 조반니 산티(Giovanni Santi)는 궁정화가에 머물렀던 자신의 예술적 야망을 아들을 통해 이루려 했다. 라파엘로는 채 여덟 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우르비노의 명장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o, 1450~1523)가 운영하는 화실에 들어가게 된다. 험난한 예술가의 길을 시작하기에는 턱없이 어린 나이였다. 신중함과 사려 깊음이 몸에 배인 라파엘로는 채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마스터(Master)'라는 칭호를 얻는다(후대의 많은 미술사가들은 당시 그가 열일곱 살 되던 해에 받았던 보수가 마스터 수준이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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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8년 말 라파엘로는 건축가이자 그의 먼 친척인 브라만테(Donato Bramante, 1444~1514)의 권유로 로마로 향한다. 그곳에서 그는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중용을 받아 교황청의 내부공사를 맡는 등 화가로서 뿐만 아니라 건축가로도 명성을 높였다.

그러나 부와 명성은 인생이란 동전의 양면 중 다른 한 면일 뿐이다. 세속적인 성공의 길로 나아갈수록 예술적 만족과 행복의 깊이는 그만큼 줄어드는 것일까? 라파엘로는 무언가에 쫓기듯 더 높은 성공의 계단을 쉼 없이 오르려 했고, 그런 그에게 세상도 끊임없이 과중한 역할을 부여했다.

계속되는 과로와 심적 부담으로 결국 라파엘로의 건강은 삼십 대 중반의 나이에 병으로부터 무장해제 당하고 만다. 바사리에 따르면 그가 세상을 떠난 이유로 여자를 지나치게 좋아해서라고 하지만, 이는 곧 쾌락을 좇을 수밖에 없었던 그의 공허한 삶을 투영하는 소소한 일상일 뿐이다.

〈펜싱 코치와 함께〉, 캔버스에 유채, 1518, 99×83cm,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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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싱 코치와 함께〉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그림은 라파엘로 일생의 말년인 서른다섯 살 때 그린 자화상이다. 화면 뒤에 배치된 라파엘로는 수염이 덥수룩하며 가운데로 가르마를 탄 긴 머리를 하고 있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에 찌든 기색이 역력한데(성화에서 흔히 보는 그리스도의 모습과 매우 닮았다는 평가도 있지만), 이십 대 시절 자화상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그림의 구도를 살펴보면 두 사람이 거의 정방형에 가까운 화면 속에서 앞과 뒤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인물의 손가락을 따라 그림을 보는 사람의 시선을 그림 밖의 공간으로 이끌고, 이와 동시에 화면 우측에 여백을 형성한다. 우측 여백과 반대로 라파엘로의 친구는 시선을 좌측에 두어 변화와 균형의 통일을 꾀하고, 화면에 '팽팽한 긴장감'까지 형성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라파엘로 스스로 느끼고 있었던 것일까? 도상의 완벽함마저 화가의 삶을 옥좨는 듯하다.

결국 라파엘로는 1520년 자신의 생일인 4월 6일에 로마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친구가 쓴 묘비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그렇게 유명한 라파엘로가 바로 이곳에 잠들어 있다. 그가 살아있을 때 자연은 그에게 정복되는 것에 겁을 먹었고 그가 죽은 뒤에는 그의 뒤를 따라 죽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과연 정복한 것은 무엇이고 정복당한 것은 무엇일까?' 라파엘로는 땅에 묻히는 순간 덧없는 인생에 대해 이렇게 읊조리지 않았을까? 눈이 시리도록 여리고 아름다웠던 젊은 시절 자화상만이 쓸쓸히 생을 마감한 화가를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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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빈 집필자 소개

베이징에 있는 중앙미술대학교(中央美術學院)에서 미술사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술사를 연구하면서 저자가 특히 천착한 분야는 화가의 자화상이다. 아울러 2000년대 들어 세계 최대 미술 시장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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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전 | 저자천빈 | cp명어바웃어북 도서 소개

거장들의 자화상으로 미술사를 산책하다! 자화상의 아버지로 불리는 뒤러에서부터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을 이끈 다빈치와 라파엘로를 거쳐 홀바인, 틴토레토, 루벤스, 렘브란..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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