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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술관에 간
화학자
라이트

〈천구 강의〉

촛불 하나로 밝힌 과학

라이트, 〈천구 강의〉, 1766년, 캔버스에 유채, 147×203cm, 영국 더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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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강의를 흥미진진하게 할 수는 없을까? 과학자 모두의 꿈이다. 미술이 과학을 전파하는 데 아주 유용하다는 사실은 이 작품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림의 주제로서 과학은 매우 드물다. 더구나 과학을 강의하는 내용을 담은 명화로는 라이트의 〈천구 강의〉와 렘브란트의 〈해부학 강의〉 정도뿐이다.

과학을 소재로 그린 화가

조셉 라이트 더비(Joseph Wright of Derby, 1734~1779)는 영국 더비에서 태어나 잠깐 런던에서 그림 공부를 한 시기와 이탈리아 여행을 한 때만 제외하고는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더비에서 보냈다. 이름에 붙은 더비는 또 다른 라이트, 즉 100여 년 전의 영국의 초상화가 존 마이클 라이트(John Michael Wright, 1617~1694)와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라이트는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부분조명 기법을 사용한 드라마틱한 그림을 남겼다. 〈천구 강의〉를 비롯해 〈에어 펌프의 실험〉(153쪽), 〈'인'을 발견한 연금술사〉 등의 작품이 여기에 해당한다. 대부분 대장간, 공장 등 과학과 산업에 대한 그림들이다. 그는 한 달에 한 번 모여 최신 과학을 토론하던 루나 소사이어티의 구성원으로서 과학에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과학자들과 폭 넓은 교우 관계를 유지하였다.

작은 촛불의 빛에 담긴 뜻

〈천구 강의〉는 높이가 1.5미터 가까이 되고, 너비는 2미터가 넘는다. 과학을 강의하는 것은 대형 회화 작품의 주제로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이 정도의 대작에 어울리는 주제는 역시 전쟁사에 관한 것이 제격일 것이다. 그래야 긴장감과 볼거리로 큰 화면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이트는 작은 촛불 하나로 일견 재미없어 보이는 과학 강의를 아주 격동적으로 나타내는 데 멋지게 성공하였다. 이 작은 촛불의 빛이 주는 의미는 분명하다. 산업혁명이 태동하던 시대에 지식의 빛, 탐구의 빛, 여명의 빛이다.

라이트는 이런 부분조명과 빛의 세계에 매료되었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나폴리에서는 밤의 불꽃놀이를 그렸으며, 로마에서는 밤의 베수비오 화산 폭발과, 작은 창문만 밝은 빛을 내는 공장의 야간 풍경과, 빨갛게 달궈진 쇠를 큰 망치로 두들기는 어두운 대장간을 그렸다.

이 그림의 중심은 기계다. 렘브란트의 〈해부학 강의〉(1632년)가 시체에 초점을 맞춘 데 반하여 그로부터 130년 후의 라이트는 기계에 초점을 맞추었다. 렘브란트는 사람(조물주의 창조물)의 죽음과 덧없는 인생을 보여주고, 라이트는 기계(사람의 제조물)가 자동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여준다. 라이트는 이제 사람에서 기계로 주제가 옮겨 왔음을 이야기한다.

천구의는 태양계의 모형이다. 해는 보이지 않으며 지구, 달, 고리 달린 토성 등이 크랭크와 레버로 연결되어 돌아가게 되어 있다. 학자는 깃을 세운 빨간 외투를 입고 행성의 운행에 관한 강의를 듣는 학생들 앞에 있다. 18세기 과학계의 큰 산이었던 뉴턴을 상상하며 그를 이렇게 높은 곳에 우아하게 그려 넣었을 것이다.

여자와 아이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대학 강의실은 아니다. 오른쪽에는 책이 보인다. 이 그림에서 교사와 다른 등장인물들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왼쪽에서 필기를 하는 사람은 누구인지 알려져 있다. 라이트가 그의 초상화를 그렸기 때문이다. 그는 페레즈 버뎃(Perez Burdett)인데 연구자이자 지도 제작자이다. 아마도 이 그림 안에서 그는 천체의 운행을 계산하는 중일 것이다. 그는 라이트와 아주 절친한 친구 사이로 함께 음악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화가는 친구에게 멋진 옷을 입히고 삼각 모자를 겨드랑이에 끼운 우아한 모습으로 그려 놓았다.

라이트의 그림은 작은 조명이 어두운 전체에서 가운데만 비춘다. 그렇다고 빛이 그림의 소품만은 아니다. 빛은 논리와 지식을 나타낸다. 이런 조명 기법은 그의 발명품이 아니다. 카라바조가 먼저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처럼 극적인 효과를 성공시킨 작가는 많지 않다. 이런 그림을 '촛불 그림'이라 부른다. 그는 강한 콘트라스트를 즐겼다.

과학이 대중에게 각광받던 시절

그림 한가운데에 가장 밝게 그려진 것은 아이들이다. 빛을 등으로 가려 검게 묘사된 엄마인 듯한 여자는 얼굴이 보이지 않으나 마치 표정이 보이는 것 같다. 라이트의 그림에서는 아이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왜일까? 과학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젊은 여자는 왜 여기에 앉아 있는 걸까? 뉴턴 같은 위대한 과학자의 이야기를 아이들에게도 들려주고 싶었을까? 사과는 지구로 떨어지는데 왜 달은 아닐까? 왜 달은 제 궤도로 돌고 있는가? 라이트는 이런 이야기들을 아이들에게 설명해 주고 싶었을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아이는 수학이나 과학을 지루해한다. 그러나 여기서 과학 강의를 듣는 아이들의 얼굴은 전혀 지루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무슨 재미난 놀이를 구경하는 흥미진진한 표정이다. 무언가 아름다운 것을 보는 듯하다. 마치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라이트는 아이들을 강조함으로써 그림에 특별한 성장소설로의 가치를 부여하였다. 당대의 교육학자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는 아이들의 흥미를 끄는 교육으로, 지식을 머리가 아니라 그들의 가슴속에 넣어야 한다고 했다. 이미 아이들을 위한 놀이에 의한 교육을 강조했다.

라이트는 여기서 이상적인 교육 현장을 그렸다. 일반적으로 당시의 그림에 아이가 등장할 때는 귀족이나 왕족의 아이들만 나온다. 그러나 여기서는 중산층의 아이들이 주변이 아니라 중심에 나타난다. 또한 천구의 왼쪽에는 젊은 여자를 그려 넣어 여자가 지적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나타냈다.

영국에서는 이제 막 그런 기운이 있었으나 프랑스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과학 모임이 사교계의 유행이었다. 루나 소사이어티도 그런 모임 중 하나였다. 한 달에 한 번, 대략 보름달이 뜨는 월요일에 만나서 과학에 관하여 토론하고 강의를 들었다. 과학에 흥미를 가진 귀족이나 부자 들이 이 클럽을 통하여 발명가들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과학 이론이 쉽게 제품화되고 특허도 얻고 사업도 이루어졌다.

1765년 증기기관을 발명한 제임스 와트도 그 구성원 가운데 한 명이다. 더비에 유리공장을 갖고 있던 웨지우드(Josiah Wedgwood, 1730~1795)는 도자기로 유명해졌으며, 시계 기술자이자 아마추어 지리학자인 존 화이트 허스트(John White Hurst, 1713~1788)는 기압계를 발명하여 유명해졌다.

라이트에게는 정교한 제조 기술과 이론을 겸비한 인물이자 천구의를 제작한 제임스 페르그손(James Ferguson, 1710~1776)이라는 천문학자 친구가 있었다. 페르그손이 1762년 더비에 와서 천문학 강의를 했다. 아마 몇 번에 걸친 연속강의였을 것이다. 그가 왔을 때 루나 소사이어티에서 태양계 천구의를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라이트는 이런 강의를 들으며 작품의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산업혁명 태동기는 자연과학과 기술이 종교와 거의 같은 반열까지 올라간 시기이다. 당시 서구 대중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만드신 것으로 믿었다. 수학적으로 계산하여 천체의 운행을 알 수 있다면 하나님은 그곳의 어디에 계신가?

뉴턴은 하나님의 운행 섭리에서 독립하여 자연 자체의 자동 운행 개념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운행하는 힘을 처음 만드시고 그 후는 자연현상에 의하여 운행한다고 설명하기도 하였다.

독일 학자 라이프니츠(Gottried Wilhelm von Leibniz, 1646~1716)는 뉴턴과 달리 하나님은 천체 시계를 만드셨고 그 태엽을 정기적으로 감으며 수리하신다고 믿었다. 정교한 천구 기계를 만들었어도 돌아가도록 해야 돌아가는 것처럼 하나님이 개입하신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루나 소사이어티에서는 이런 생생하고 격렬한 토론이 행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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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창림 집필자 소개

한양대학교 화학공학과와 동 대학원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 파리 국립대학교(Universite Piere et Marie Curie)에서 고분자화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결정구조의 아름..펼쳐보기

출처

미술관에 간 화학자
미술관에 간 화학자 | 저자전창림 | cp명어바웃어북 도서 소개

명화에 담긴 과학적 창의력! 과학자의 눈으로 본 미술에 관한 이야기와 미술과 함께하는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명화 속에서 만나볼 수 있는 화학에 대한 흥미진진한..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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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천구 강의〉미술관에 간 화학자, 전창림, 어바웃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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