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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술관에 간
화학자
렘브란트

〈해부학 강의〉

죽음의 그림자를 해부하다

렘브란트, 〈해부학 강의〉, 1632년, 캔버스에 유채, 169×216cm, 네덜란드 헤이그 모리추이스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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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는 완벽하게 복사할 수 있다고 해도 위대한 작가의 일생과 영혼까지 복사하지는 못한다. 특히 회화의 거장들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아주 짧은 시간에 그린 작품이라도 그 화가의 일생과 그림을 공부하며 쏟은 땀과 시간의 결정체이기 때문에 제작에 소요된 시간만으로 가치를 논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죽음의 그림자가 떠나지 않은 화가의 삶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는 진정한 거장이다. 그의 철학과 인생을 떼어 놓고 그의 작품만을 감상할 수는 없다. 그는 1606년 7월 15일에 네덜란드의 대학도시 레이덴에서 태어났다. 열네 살 때 레이덴 대학에서 라틴어를 공부했는데 그보다는 그림에 관심이 더 많았다.

레이덴에서 스완넨부르크(Jacob van Swanenburgh, 1571~1683)에게 그림을 배우고, 암스테르담에 가서 라스트만(Pieter Lastman, 1583~1633)에게 그림을 배웠다. 스승 라스트만은 이탈리아의 화려한 색채를 구사하는 화풍이었으나 렘브란트는 일찍이 거기에 자신만의 빛의 해석을 더하였다.

렘브란트는 열여덟 살 때부터 화실을 열고 본격적으로 화가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초기에는 다른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초상화가로 이름을 떨쳤다.

〈해부학 강의〉가 화단의 호평을 받으면서 렘브란트의 이름이 네덜란드를 넘어 전 유럽에 유명해졌다. 렘브란트로서는 당시가 최절정기로 명예와 함께 부도 얻게 되었으며, 1634년에는 암스테르담의 명문 부호의 딸이자 화랑중개인의 조카인 사스키아와 결혼하였다.

사스키아는 화려하고 명랑한 성격이었으며, 그녀와의 행복한 결혼 생활은 렘브란트의 그림에 따뜻하고 화려하고 밝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세 아이를 질병으로 연이어 잃고, 다시 아들 티투스를 낳은 이듬해인 1642년에 세상을 떠났다.

렘브란트의 최대 걸작 〈야경〉은 바로 그해에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은 단체초상화인데 이미 불행의 그림자가 짙게 덮어 누르던 시기에 그려진 까닭에 의뢰인이 주인공들을 아름답고 권위 있게 그려 주기를 바랐던 의도와는 다르게 내면의 깊이가 드러나, 결국 이 그림을 주문한 사수협회에서 구입하기를 거절하고 말았다. 이후 그는 화단에서 급격하게 인기가 떨어지며 주문이 들어오지 않아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졌다.

렘브란트는 집에서 가사 일을 도와주던 헨드리케와 함께 살았는데 그녀와 재혼하면 사스키아의 유산을 모두 포기해야 했으므로 정식으로 결혼은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녀는 그의 그림에 모델로 자주 나타난다. 그녀는 따뜻하고 조용한 성품을 지닌 여자여서 이 시기의 렘브란트의 그림 분위기도 좀 더 조용하고 내면의 깊이로 들어가는 듯하다.

1663년 렘브란트의 유일한 생의 지지자인 헨드리케가 죽고, 1668년 그가 가장 아끼는 분신 같은 아들 티투스도 죽었다. 그 이듬해 추운 가을날 렘브란트도 쓸쓸한 생을 마감하였다. 그가 죽을 무렵에는 주위에 아무도 없었으며 사스키아가 물려준 집도 이미 오래전에 남의 손에 넘어가고 오직 침대와 이불과 옷가지 몇 점 그리고 미술도구 몇 점이 전 재산이었다고 한다.

렘브란트의 진정한 예술성을 보여주는 작품들은 대부분 1642년, 즉 사스키아가 죽고 〈야경〉이 거절된 이후 아주 어려운 시기의 것들이다. 그의 작품들은 그가 죽은 지 채 100년도 안 되어 세계 최고의 명작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죽은 자에 대한 경외감을 잃지 않은 화가

〈해부학 강의〉의 중심에 놓인 주제는 시체다. 시체의 주인공은 교수형으로 죽은 사형수다. 원래 중세 시대에는 교회가 힘이 막강하여 신의 창조물인 인간의 몸을 해부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특별한 경우만 허가하였다. 그것도 공중에 공개하여야 했고 검시장에 들어가려면 입장료에 해당하는 돈을 내야 했다.

그러나 이 그림이 그려지던 18세기만 해도 교회의 힘이 약해져 공공연히 해부가 이루어졌다. 실제로 다 빈치 같은 화가는 30회 이상 해부를 관찰했고 직접 한 것도 10회 이상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래도 해부의 원칙은 지켜졌다. 첫째, 그 장소에서 웃음은 절대금지였다. 그것은 신성모독이었다. 둘째, 해부된 부분을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없었다.

렘브란트, 〈존 데이만 박사의 해부학 강의〉, 1656년, 캔버스에 유채, 100×134cm,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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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에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은 배는 열지 않고 팔만 열어 놓은 것이다. 이런 일은 불가능했다. 검시는 배부터 여는 규칙이 있었으며 이 사실은 해부를 그린 모든 그림에서 동일하다. 렘브란트가 이 그림을 그린 24년 뒤에 그린 해부 그림인 〈존 데이만 박사의 해부학 강의〉에서도 배부터 열려 있다. 당시의 검시에서도 틀림없이 배부터 열었을 것이다.

화가는 꼭 사실만을 그리지는 않는다. 사실주의자라 해도 사실만 그리는 것은 아니다. 사실을 넘어서는 것이 관념이며 사상이다. 신앙이 돈독했던 렘브란트에게는 비록 죄수라 할지라도 신의 영혼이 깃들었던 인간의 몸은 성전이었다. 성전을 여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손을 절개함으로써 더욱 깊은 신앙을 나타냈다. 하나님의 손이 천체를 운행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손이 사람을 움직인다. 성전을 손상하지 않고 인간의 손만 절개하여 변함없는 신의 권능을 나타내려 한 것이다.

해부된 팔의 정확도는 현대 의학자들도 감탄할 정도라고 한다. 과학적인 정밀성과 둘러선 사람들의 권위를 위하여 당시의 해부학 교과서가 오른쪽 아래에 펼쳐져 있다.

이 그림에서 해부를 하는 의사 툴프(Nicolaes Tulp)는 본명이 클래스 피테르손이다. 그의 아버지가 꽃경매상이었으며 네덜란드의 대표적 꽃이 튤립(tulip)인 것을 생각하면 의사의 별명이 튤립에서 단 한 자만 뺀 Tulp가 된 것이 우연은 아닌 것 같다. 툴프는 레이덴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해부가 전공이었고, 당시 시의원이자 외과의사 길드의 집정관으로서 실력자였다.

이 그림은 단체초상화로 값은 외과의사협회에서 지불하였다. 단체초상화란 당시에 유행하던 지금의 단체사진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그림은 외과의사협회의 사무실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단체초상화의 경우 지도자가 되는 사람을 피라미드의 정점에 그려 넣는 것이 일반적인데 렘브란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주인공을 오른쪽에 치우쳐 넣고도 군중과 구별된 특별한 권위를 나타냈다. 그의 천재성과 창조성의 일면을 볼 수 있다.

당시 해부는 의사의 지시 아래 실제로 메스는 조수가 잡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조수는 생략되었다. 그렇게 하여 단체초상화를 주문한 사람들의 주제를 흩트리지 않으면서도, 또 배를 열지 않고 팔만 만지는 것으로 그림으로써 집도한-실제는 집도하지 않았을 테지만-의사의 권위와 명예도 보장해 주고 있다.

그림 속에서 시체를 둘러선 사람들을 보자.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사람은 검증을 위해 참석한 검시관이다. 그의 위치와 약간 왼쪽으로 기운 듯한 자세는 시체가 수평으로 누워 있지 않고 아래 오른쪽으로 기운 것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이다. 검시관의 시선은 시체를 보는 것 같지 않고, 마치 해부학 교과서나 더 많은 그림 앞쪽의 군중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그 오른쪽에 서류를 든 사람이 보이는데 이것으로 이 검시가 공공성과 객관성이 있음을 나타낸다. 시체에 바짝 붙어서 보는 두 사람이 있는데 실제로 이렇게 바짝 붙어 있을 수는 없다. 두 사람의 역동적이고 부산한 표정은 바로 인접한 시체의 경직성과 무생물성과 대비되어 주제를 더욱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뒤의 벽면에 '렘브란트 1632'라는 글이 보인다. 지금은 대부분이 일률적으로 작가의 사인을 아래쪽 구석에 하지만 당시의 그림들은 작가의 사인이 그림의 일부로서 아주 자연스럽게 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에이크의 〈아르놀피니의 결혼〉에서도 작가의 사인이 결혼증서같이 교묘히 들어가 있다.

부분조명 기법으로 삶과 죽음을 나타내다

이 그림은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사용하였는데 주변 인물들의 옷은 모두 검게 처리하여 세부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인물들의 표정과 중심 주제에 더욱 강하게 우리의 시선을 모으는 힘을 가진다.

렘브란트는 스물네 살 때인 혈기 왕성한 청년기에 이 그림을 그렸는데, 당시 그가 죽음을 깊게 느꼈을 리는 없다. 그러나 이 그림에는 죽음이 있다. 삶은 밝은 빛이며 죽음은 그늘이며 어두움이다. 젊은 렘브란트는 죽음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시체 얼굴의 반, 특히 눈 부분을 그늘로 처리하여 죽음의 그림자만 부분으로 나타냈다. 이후 그의 인생이 고달파진 뒤에 그려진 그림들에서는 그늘과 표정이 더욱 침잠해지며 내면의 깊이와 신앙이 나타난다.

이 그림으로 렘브란트는 성공과 행복의 길로 들어섰다. 그런데 시체를 주제로 한 그림이 성공과 행복의 시발이 되었다는 점이 아이러니컬하다. 죽음의 그림자가 성공의 길목인가?

한편 그의 최고의 걸작이라는 〈야경〉이 그를 몰락으로 들어가게 한 그림이라는 점도 역사적 아이러니다. 렘브란트를 성공시킨 〈해부학 강의〉나 그를 몰락시킨 〈야경〉은 모두 단체초상화인데, 〈해부학 강의〉는 외과의사협회의 단체초상화이고 〈야경〉은 사수협회의 단체초상화라는 점도 재미있다. 모두 죽음과 관계가 있다. 죽음을 늦추려는 집단과 죽이기를 직업으로 하는 집단을 캔버스 안에서 넘나들던 렘브란트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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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창림 집필자 소개

한양대학교 화학공학과와 동 대학원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 파리 국립대학교(Universite Piere et Marie Curie)에서 고분자화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결정구조의 아름..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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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간 화학자
미술관에 간 화학자 | 저자전창림 | cp명어바웃어북 도서 소개

명화에 담긴 과학적 창의력! 과학자의 눈으로 본 미술에 관한 이야기와 미술과 함께하는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명화 속에서 만나볼 수 있는 화학에 대한 흥미진진한..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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