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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술관에 간
화학자
신윤복

〈미인도〉

진사와 등황

신윤복, 〈미인도〉, 1805년경, 비단에 담채, 113.9×45.6cm, 간송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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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대표 화가 신윤복(申潤福, 1758~?)과 김홍도(金弘道, 1745~?)에 얽힌 미스터리를 다룬 이정명의 소설 『바람의 화원』을 영상으로 옮긴 드라마가 방영되고 영화도 만들어졌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얀 베르메르의 그림을 다룬 영화 〈진주 귀고리 소녀〉와 장인의 대결이 흥미로웠던 드라마 〈허준〉을 섞어 놓은 것 같은 내용이다. 『바람의 화원』은 아주 재미있고 유익한 소설이지만 옥의 티인 것은 신윤복을 여자로 설정한 부분이다. 그럴 가능성이 거의 전무하고 소설의 박진감과 구성의 완성도를 오히려 떨어뜨린 듯하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참 재미있는 소설인 것만은 사실이다.

소설을 영화화한 대부분이 그렇지만 역시 원작이 가장 재미있었다. 이 책 덕분에 우리의 옛 그림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커져서 참 기쁘다. 사실 그동안 필자도 우리 전통 그림 보다는 주로 서양화를 감상해왔었다. 그런데 신윤복의 그림들을 보면서 우리 옛 그림에 이렇듯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많고, 또 그림 속에 읽어낼 요소들이 풍부하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신윤복의 〈미인도〉에 묘사된 치명적인 색의 정체

신윤복은 김홍도, 김득신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3대 풍속화가 중 한 명으로 본관은 고령, 자는 입부(笠夫), 호는 혜원(蕙園)이다. 중인 출신 화원이었던 신한평의 아들로서, 그 역시 도화서(圖畵署) 화원이 되어 벼슬도 했으나 저속한 여인 그림을 즐겨 그린다하여 도화서에서 쫓겨난 것으로 전해진다.

신윤복은 서민들의 생활을 주로 그린 김홍도와는 달리 양반과 기녀 간의 애정사를 주로 그렸고, 섬세하고 유연한 선과 색채의 달인이었다. 소설에서는 이 점에 착안하여 신윤복이 여자라고 설정하였다. 즉, 여자가 아니고서는 여인의 마음을 그처럼 섬세하게 표현할 수 없으리라는 것과 그의 화풍 자체가 여성적이라는 점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허구를 담은 소설이다.

신윤복 이전까지 조선의 그림은 여인을 주인공으로 그린 적이 없었고 인물의 심리상태, 특히 여인의 심리상태를 이처럼 회화적으로 표현한 적이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여인이 그림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 당연히 여성의 초상화도 없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미인도는 서양의 초상화나, 중국이나 일본의 미인도와 다르다. 그들의 초상화는 특정인의 모습을 사진처럼 남기려는 목적으로 그려지는 게 대부분이다. 그러나 조선의 미인도는 이상화된 여성의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남기려는 목적으로 그려졌다. 특정인이 아니었고 사실성 여부도 관계없었다. 조선의 사미인도(四美人圖)는 네 명의 궁녀나 기녀를 그리는 그림인데 여성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그림이 아니라 놀랍게도 여인을 멀리하라는 교훈이 담긴 그림이다. 즉 '여자를 멀리하다'를 한자로 사녀(捨女)라 하므로 소리가 같은 사녀(四女)를 그린 것이다. 미인도도 당시의 이상적인 여인상, 즉 단정하고 기품있고 조용하고 후덕하고 순종적인 인물을 그려서 여성들은 그를 보고 배우고 남성들은 그런 여인을 아내로 얻으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

신윤복의 〈미인도〉에 나타난 조선의 이상적 여인상을 살펴보자. 키는 서양처럼 8등신이 아니라 7등신쯤 된다. 머리는 칠흑처럼 검고 단정히 빗었다. 얼굴형은 현대의 미인형처럼 갸름하지 않고 볼에 살이 통통하게 붙어있는 달걀형이다. 눈썹은 짙지 않고 가늘고 초승달같이 둥글다. 현대에서는 크고 동그란 눈을 선호하나 미인도의 눈은 가늘고 작다. 속눈썹도 없고 쌍꺼풀도 없다. 입도 현대 기준으로 보면 너무 작다. 목은 가늘고 길며 어깨는 넓지 않고 목선이 연결되듯이 곡선으로 빠져있다. 유방은 작거나 아예 표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엉덩이는 크게 그렸다. 아이를 잘 낳는 여인이 아름답다는 시대적 미인상을 나타냈다. 손은 작으나 손가락은 가늘고 길어서 섬섬옥수(纖纖玉手)로 부를 만하다. 현대의 미인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신윤복은 우리나라 어느 옛 화가들보다 색채를 잘 구사하였다. 그가 그린 〈미인도〉에서도 치마의 옥색과 속치마 고름의 붉은 색이 눈에 띤다. 특히 이 붉은 색은 진사(辰砂)라는 광물에서 얻어지는 주(朱)색인데 황화수은(HgS)으로서 독성이 매우 강하지만 변색이 잘 안되고 색이 아름다워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랫동안 화가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 이 그림도 20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붉은 색이 선명하다. 서양의 버밀리온이 바로 이 색이다.

소설에서는 화원을 독살하는데 등황(橙黃)이라는 안료를 사용한 장면이 나온다. 등황은 중국, 태국, 실론 등지에 자생하는 망고스틴 나무의 줄기에서 채취하는 수액으로 만드는데, 폴리페놀(polyphenol)계의 감보지산(gambogic acid)이 주성분으로 독성이 있어서 7g 이상을 먹으면 죽음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월남에서 들여왔기 때문에 월황(越黃)이라고도 했다. 서양에서 'Gamboge'라고 부르는 색이다.

그리움을 그린다는 것

신윤복, 〈단오풍정(端午風情)〉, 제작연도 미상, 종이에 담채, 28.2×35.6cm, 간송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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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는 신윤복의 그림 스물한 점과 김홍도의 그림 열네 점이 나온다. 신윤복의 그림은 특히 여인의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그의 유명한 〈단오풍정〉을 보면 춘정을 일으킬 정도로 여성의 심리와 몸매의 묘사가 뛰어나다. 빨간 치마 옆에 파란 치마를 두어 긴장된 색채 대비를 잘 구사하였다. 여인들은 모두 기생인 것 같은데 오른쪽에 남루한 한 여인을 등장시켜 묘한 대비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신윤복의 그림에는 에로티시즘이 강하게 나타나 있으며 몰래 훔쳐보는 관음증이 결부된 그림이 많다. 왼쪽 바위틈에서 두 동자승이 여인들을 훔쳐보고 있다.

신윤복의 화풍을 보여주는 그림 하나를 더 감상하자. 〈월야밀회〉는 밤중에 남녀가 만나는 것을 한 여인이 훔쳐보는 장면이다. 남자는 군복을 입고 손에 장창을 들고 있으니 군관인 것 같다. 옷차림이 남루한 여인이 오른쪽 어깨를 뒤로 빼는 것을 보면 밤에도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고 공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군관이 힘없는 처지의 여인을 반강제적으로 붙잡았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옆 담에 붙어 숨어서 엿보는 여인은 옷차림으로 보아 군관의 부인이거나 군관과 정통했던 기생일지 모른다. 그런데 이 여인의 발 모양을 좀 보자. 양 옆으로 짝 벌려 담에 바짝 붙어 있는 상황을 긴장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게다가 이 그림은 시선의 방향이 하나가 아니다. 하나는 담에 붙어서 엿보는 여인의 시선이고 또 하나는 화면 오른쪽 아래 담 밖에서 이 장면을 그리고 있는 화가의 시선이다. 서양화에서 세잔이 보여주는 다시점 기법을 신윤복은 이 그림을 통해 실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기존 회화의 원칙과 법도를 과감히 깨트리고 새로운 예술을 열었다.

신윤복, 〈월야밀회(月夜密會)〉, 제작연도 미상, 종이에 담채, 28.2×35.6cm, 간송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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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 화풍의 에로티시즘 경향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그림이 있다. 〈이부탐춘〉(과부가 춘정을 탐한다는 뜻)이라는 그림은 두 여인이 나무 가지에 앉아 마당의 개 둘이 짝짓기하는 것을 바라보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한 여인은 양반집 여인, 옆 여인은 그 몸종일 것이다. 그런데 주인공 여인의 하얀 상복은 이 여인이 남편이 죽은 과부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 여인이 그 장면을 보면서 살짝 웃고 있으니까 옆의 몸종이 주인 여자의 허벅지를 꼬집고 있다. 과부의 발이 한껏 양옆으로 벌려진 것은 그 여인의 심리상태를 나타낸다. 신윤복은 이런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왼쪽 여인들의 내원 바깥쪽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나무는 복숭아나무로서 당시 복숭아는 그 색과 생긴 모양 때문인지 여인의 성적 욕망을 부추긴다하여 내원에는 심지 않았다고 한다. 그 복숭아나무가 담 안으로 넘어와 있는 것은 이 여인들의 바깥을 향한 욕망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 그림의 왼쪽 담을 보면 좀 이상한 점이 보인다. 담의 앞쪽보다 먼 뒤쪽이 더 크게 그려져 있다. 원근법적으로 보면 거꾸로다. 담을 사선으로 만들 리는 없다. 이것은 사실적으로는 명백한 모순이지만 한국화에서는 흔히 사용되는 역원근법이다. 조선의 화가들도 원근법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 전통 그림은 원래 있는 사실을 그린다기보다 내면의 세계를 표현하는 서화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그림에서도 중요한 것을 크게 그리고 아울러 멀리 있어도 우리의 생각을 붙잡을 곳을 크게 그렸다. 이 그림에서는 여인의 시선에서 보는 방향이 위에서 아래쪽이기 때문이다.

신윤복, 〈이부탐춘(嫠婦貪春)〉, 제작연도 미상, 종이에 담채, 28.2×35.6cm, 간송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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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금모행〉이라는 그림은 흰 도포를 입은 양반이 붉은 옷을 입은 별감을 내세워 야밤에 수청들 기생을 데리고 가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림의 오른쪽에 등을 진 동자가 앞서고 있는데 그 키가 현실에 맞지 않게 작다. 이것은 그의 신분이나 중요도가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현저히 작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신윤복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남녀의 그리움만큼이나 솔직하고 인간적인 것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점잖은 고위대작들은 겉으로는 그것을 천박한 속물로 여기지만 말이다. 불현 듯 소설에서 나오는 글귀 하나가 떠올랐다. 신윤복 그림에 대한 마침글로 이보다 더 적절한 것이 또 있으랴.

김홍도 : 그린다는 것이 무엇이냐?
신윤복 : 그린다는 것은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리움은 그림이 되고, 그림은 그리움을 부르지요.
신윤복, 〈야금모행(夜禁冒行)〉, 제작연도 미상, 종이에 담채, 28.2×35.6cm, 간송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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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창림 집필자 소개

한양대학교 화학공학과와 동 대학원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 파리 국립대학교(Universite Piere et Marie Curie)에서 고분자화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결정구조의 아름..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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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간 화학자
미술관에 간 화학자 | 저자전창림 | cp명어바웃어북 도서 소개

명화에 담긴 과학적 창의력! 과학자의 눈으로 본 미술에 관한 이야기와 미술과 함께하는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명화 속에서 만나볼 수 있는 화학에 대한 흥미진진한..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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