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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술관에 간
화학자
휘슬러

〈흰색 교향곡 2번〉

화가를 죽인 흰색 물감

휘슬러, 〈흰색 교향곡 2번〉, 1864년, 캔버스에 유채, 76×51cm, 영국 런던 테이트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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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1834~1903)는 미술사에 나타나는 몇 안 되는 미국 태생의 화가이다. 1834년 토목 기술자인 메이저 조지 워싱턴 휘슬러와 그의 두 번째 아내인 안나 마틸다 맥닐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드물게도 그는 이름에 어머니의 처녀 때 성인 '맥닐'을 간직하였는데, 아마도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표현한 것이리라.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며 그는 어머니를 매우 존경하였다.

화학 과목에서 낙제하여 화가가 되다

휘슬러의 가족은 코네티컷의 스토닝톤과 매사추세츠의 스프링필드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그가 아홉 살 무렵 아버지가 모스크바 철도 건설 기술자로 일하게 되어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사하였다. 그는 그곳의 왕립 과학 아카데미를 다녔다. 그 뒤 1848년 누나 부부와 함께 런던으로 이사하였다. 아버지가 사망하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와 코네티컷의 폼프레트에 정착하였다.

휘슬러는 1851년 아버지가 졸업한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상당히 우수한 학생이었으며, 특히 미술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졸업을 얼마 안 남기고 화학 성적이 워낙 안 좋아 1854년 결국 학교를 그만 두어야 했다.

휘슬러는 예술가의 길을 가기로 작정하고, 다음해 프랑스 파리로 가서 왕립 미술특수학교와 그레이르 아카데미에서 그림 공부를 하였다. 그는 루브르 박물관의 고전 명작들을 모사하고 습작하는 데 몰두하였다. 친구의 소개로 사실주의의 거장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를 만난 이후 오랫동안 교분을 유지하였으며, 그에게서 그림과 인생에 큰 영향을 받았다.

휘슬러, 〈피아노에서〉, 1858~59년, 캔버스에 유채, 66×91cm, 미국 오하이오 신시내티 테프트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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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슬러의 〈피아노에서〉는 1859년 파리 살롱전에서 낙선하였으나 런던 왕립 아카데미전에서는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그는 곧 런던 사교계에서 주목받는 명사가 되었다. 휘슬러는 러시아와 프랑스에서 교육받은 미국인으로 매너 좋고 멋을 내기 위해서는 돈을 아끼지 않는 타고난 멋쟁이였다.

휘슬러는 여행벽이 있었으며, 종종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하였으나 모든 삶과 태도를 예술적으로 표현하려 하였다.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Gabriel Charles Dante Rossetti, 1828~1882),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 같은 각국의 유명 인사들과 친분도 가졌다. 그의 대표작 〈흰색 교향곡 1번〉은 영국 왕립 아카데미전은 물론, 파리 살롱전에서도 거부되었다. 그러나 다음해 낙선전(Salon des Refusees)에서 큰 호응을 받으며 재평가되었다.

하얀 베일로 치명적 독성을 가린 납

1862년 휘슬러가 〈흰색 교향곡 1번〉을 발표했을 때는 이미 2년 전에 윌키 콜린스(William Wilkie Collins, 1824~1889)가 쓴 『흰옷을 입은 여인』이라는 괴기소설이 출판되어 있었다. 소설과 그림의 제목이 비슷하여 사람들은 적잖이 혼동하였다. 그가 그림 제목을 이렇게 정한 것은 고도의 마케팅 전략이었다. 소설과 그림은 함께 대박이 났고, 흰색 옷과 흰색 가방, 흰색 구두 등 흰색이면 무엇이든지 유행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여인들이 얼굴을 창백하리만큼 하얗게 화장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이런 미백 화장품을 '블룸 오브 유스'(Bloom of Youth)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젊음을 유지해 준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화장품의 주성분은 납으로서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실제 당시 화장품으로 인한 납중독으로 사망하는 사례도 있었다.

〈흰색 교향곡 1번〉은 당시 흰색 신드롬에 편승하는 그림으로 간주되어 비평가들 사이에서 혹평을 받았으며, 그림 자체도 너무 밋밋하고 차분하여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하였다. 그러나 훗날 누드가 아닌데도 몸매와 속마음까지 드러내는 듯한 투명한 분위기를 아주 잔잔하고 깊게 표현한 걸작으로서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휘슬러, 〈흰색 교향곡 1번〉, 1862년, 캔버스에 유채, 214.6×108cm, 미국 워싱턴 국립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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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의 모델은 '조'라고 불린 아일랜드 태생의 조안나 히퍼넌(Joanna Hiffernan)으로 열아홉 살 때 모습이다.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1860년 휘슬러의 정부 겸 모델이 되었다. 휘슬러의 정식 부인이 아니었는데도 스스로 애버트 부인이라고 불렀으며 그녀의 아버지도 휘슬러를 사위처럼 대했다. 붉은 머리칼이 특히 아름답고 몸매에 기품도 있으나 남자를 끄는 매력이 넘치고 어딘지 모르게 창녀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고 한다.

휘슬러는 그녀를 청순하고 순결한 분위기로 그렸다. 그림 속 여인 발밑에는 사나운 동물의 얼굴이 달린 모피를 그려 넣었는데, 그녀에게 내재한 정열과 동물적 야성을 나타내는 듯하다.

주인공이 화면 왼쪽에 치우쳐 있으나 오른쪽을 바라보며 오른쪽으로 손을 뻗고 있어 정적인 상태에서 동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신비로운 흰 치마 속에 그녀의 감추어진 육체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내면적 아름다움을 극대화하였다. 그녀를 향한 휘슬러의 애정이 그림에 짙게 깔려 있다.

그 시절에는 그림에서 여자는 대개 구조물을 넣어 부풀린 치마를 입었는데 여기서는 당시로 보면 거의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옷을 입은 셈이기 때문에 대중들은 천박하다고 보았다. 거울을 보는 조안나는 아주 아름답다. 당시에는 거울이 외면뿐 아니라 내면도 드러낸다고 믿던 때였는데, 그녀는 거울을 바라보는 모습이 특히 아름다웠다고 한다. 이 그림에는 당시 유럽의 일본 붐이 나타난다. 조안나는 일본 부채를 들고 있고, 벽난로 위에는 일본 화병이 놓여 있을 뿐 아니라 벚꽃이 장식되어 있다.

쿠르베, 〈잠〉, 1866년, 캔버스에 유채, 135×200cm, 프랑스 파리 프티팔레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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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슬러는 조안나를 모델로 하여 여러 점의 걸작을 남겼다. 〈흰색 교향곡 2번〉도 그녀를 모델로 한 그림이다. 휘슬러는 존경하는 선배 화가 쿠르베에게 조안나를 자랑을 곁들여 소개하였는데 쿠르베도 그녀에게 끌렸던 것 같다. 이후에 쿠르베가 발표한 그림에도 조안나를 모델로 한 그림이 몇 점 나온다. 쿠르베의 〈잠〉은 두 여자가 나체로 서로 엉켜 잠든 모습을 그린 것이다. 한 여인은 붉은 머리이고, 다른 여인은 금발이지만 몸매와 얼굴이 거의 같은 것으로 보아 조안나를 모델로 두 여자를 그린 것으로 여겨진다. 이 그림은 휘슬러가 여행을 간 사이에 그려진 것이다.

휘슬러가 이 사건 이후로 쿠르베와 조안나 사이를 의심하였을 것은 뻔하다. 그 일로 조안나와의 관계에 심각한 금이 갔는지, 1869년 휘슬러는 조안나와 헤어지고 루이자 화니 핸슨이라는 새 여인을 맞았다. 루이자는 휘슬러의 아들도 낳았다.

화가의 목숨까지 앗아간 순결의 색

휘슬러는 흰색, 특히 연백(lead white)을 즐겨 사용하였다. 연백은 주성분이 납으로서 황과 반응하면 검은색의 황화납(PbS)이 된다. 즉 흰색이 검게 변색할 위험이 있다. 〈흰색 교향곡 1번〉을 보면 이미 많은 부분에 검은 변색과 손상이 나타난다. 이처럼 연백의 납 성분은 사람에게 매우 강한 독성을 가질 뿐 아니라 그림에도 독이 되었다.

안료 중에는 의외로 황을 포함하는 것이 많다. 당시 파란색 중 최고인 울트라마린, 빨간색 중 최고인 버밀리온 등이 황을 포함하였다. 오염된 대기도 황산화물을 포함하였다. 연백은 아마인유를 섞으면 다른 색보다 부착력이 좋아 바탕칠에 애용되었다. 이를 파운데이션 화이트(foundation white)라고 한다. 그러나 그 바탕 위에 울트라마린이나 버밀리온, 카드뮴 옐로(cadmium yellow) 등 황을 포함한 안료를 채색하면 오랜 기간이 지나면 검게 변색하거나 대기 중에 있는 황산화물에 의하여 변색이 일어날 수도 있다.

휘슬러, 〈검정과 금색의 광상곡(추락하는 로켓)〉, 1875년, 나무에 유채, 60.3×46.6cm, 미국 디트로이트 미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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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슬러의 대표적 문제작인 〈검정과 금색의 광상곡(추락하는 로켓)〉도 많이 손상되었다. 이 그림에 대해 영국의 예술비평가인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10)은 페인트 통을 그냥 던져 뿌린 듯이 보인다며 혹평하였고, 이 평가 때문에 휘슬러는 그림 판매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여 재판까지 벌였다.

연백은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은처럼 빛이 나는 특성이 있어 실버 화이트(silver white), 작은 조각처럼 번쩍인다고 하여 플레이크 화이트(flake white)라고도 한다. 휘슬러는 넓은 면에 이 색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의 그림은 바로 앞에서 감상하면 창백한 빛이 아른거리며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그는 이러한 매력을 외면하지 못하고 자기 몸이 납에 중독되어 병들어 가는 것도 모르고, 아니면 알면서도 연백을 계속 사용하였다. 연백으로 구름을 그리면 햇빛과 갈등하는 빛나는 구름이 아주 훌륭하게 나타난다고 해서 아직도 이 색을 쓰는 화가들이 있다.

휘슬러는 문학과 음악의 추상성을 사랑하여 '교향곡'이나 '광상곡' 같은 음악과 관련한 용어를 그림 제목으로 많이 썼다. 또 '조화'나 '정돈' 같은 고전 덕목을 중요시했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이런 단어들이 제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의 미학적 신념은 저서 『10시의 강의』(1885)와 『적을 만드는 점잖은 예술』(1890)에 잘 나타나 있다.

휘슬러는 1886년 영국미술가협회 회장, 1898년 국제미술가협회 회장으로 당선되는 등 미술계와 미학의 발전에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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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창림 집필자 소개

한양대학교 화학공학과와 동 대학원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 파리 국립대학교(Universite Piere et Marie Curie)에서 고분자화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결정구조의 아름..펼쳐보기

출처

미술관에 간 화학자
미술관에 간 화학자 | 저자전창림 | cp명어바웃어북 도서 소개

명화에 담긴 과학적 창의력! 과학자의 눈으로 본 미술에 관한 이야기와 미술과 함께하는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명화 속에서 만나볼 수 있는 화학에 대한 흥미진진한..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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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흰색 교향곡 2번〉미술관에 간 화학자, 전창림, 어바웃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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