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한국사 맞수
열전
조선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영조 vs 사도세자

조선의 왕 중 아들을 죽인 이가 있어요. 누굴까요? 잘 모르겠다고요? 영조예요. 영조는 조선 제21대 임금으로 장장 52년 동안 왕의 자리에 있으면서 18세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뤄 낸 임금이에요. 그는 탕평책으로 붕당 간의 갈등을 완화시켰으며, 역대 어느 임금보다 백성의 삶을 몸소 챙겼던 명군주였어요. 하지만 천민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태생적 한계로 항시 번민해야 했으며, 극심한 콤플렉스 속에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둬 죽여 버렸어요. 왜 그랬을까요?

영조와 그의 아들 사도세자를 초청하여 그들 사이의 갈등과 번뇌를 이야기해 봐요.

영조 vs 사도세자

ⓒ 북멘토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구분 영조(1694~1776) 사도세자(1735~1762)
정치력 백성의 마음을 헤아리는 정치를 하려 했으며,
붕당 간 갈등을 완화시켰다.
영조 말년에 정치를 주도할 기회가 있었으나,
집권 세력인 서인을 적대시하다가 그들의
교묘한 반격으로 죽어야 했다.
지력 부지런히 학문을 연마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기본 자질은 훌륭했으나, 매사에 엄격한
아버지로 인해 자기 능력을 충분히 펼치지
못했다.
인품 평소에는 자애로웠으나,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냈으며, 좋고 나쁨이 지나칠 정도로
명확하여 편애가 심했다.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 말년으로 갈수록
주변 사람을 많이 괴롭혔다.

아버지와 아들의 기이한 인연

조선에서 가장 오랫동안 왕 자리를 지켰던 임금은 제21대 영조예요. 그는 1724년 이복형각주1) 경종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된 이후, 무려 52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어요. 또한 그는 조선 임금 중 가장 오래 살았던 왕이기도 해요. 1694년에 태어나 1776년에 죽었으니, 무려 여든세 해를 살았어요. 조선 후기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40대 후반이었으니, 영조의 명이 길었던 것은 분명해요.

이처럼 세상을 길게 살다 간 영조에게 라이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예요. ‘아니! 아들이 웬 라이벌?’ 하면서 의아해 할 수도 있겠지만, 영조에게 아들 사도세자는 철천지원수보다도 더 지긋지긋했던 한 맺힌 라이벌이었음이 분명해요.

영조의 업적

영조는 매우 부지런했던 임금이에요. 조선의 역대 임금 중 부지런함만 따진다면,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성실했지요. 여기에 부단히 사치를 경계할 정도로 검소했고, 학문 연마에 최선을 다했으며, 민생 안정을 위한 많은 개혁 조치를 단행하여 백성에게도 인기가 ‘짱’이었어요.

백성의 세금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오랜 연구 끝에 균역법각주2) 을 시행하였으며, 잔인했던 형벌 제도를 고쳤고, 양반들이 사사로이 백성들에게 가혹행위를 하는 폐단 또한 없앴어요. 한편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이 오랜 기간 개정되지 않아 현실과 동떨어지자, 학자들을 동원하여 개정판인 『속대전』을 편찬했어요. 또 작은 비에도 물이 넘쳐 흐르는 청계천 범람을 막기 위해 준설각주3) 사업을 벌였으며, 신문고를 설치하여 억울한 백성의 민원을 직접 해결해 주기도 했어요.

이처럼 영조는 백성 편에 서서 나랏일을 하며 자신의 시대를 ‘조선의 르네상스’로 만들었어요. 하지만 말이에요, 왕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는 매우 불우했어요. 천민의 자식으로 태어난 죄 아닌 죄 때문에 일부 사대부의 손가락질 속에 평생을 열등감에 시달려야 했어요.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굶겨 죽이기도 했고요. 참으로 불행한 인생을 살았지요.

임금이 천민의 자식?

영조가 천민의 자식이라고요? 예, 맞아요. 아버지는 조선 제19대 왕 숙종이지만, 어머니가 천민이었어요. 궁궐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종이었지요. 그런 사람을 어머니로 둔 이가 어떻게 임금이 되었냐고요? 이게 좀 복잡해요.

숙종은 인현왕후를 쫓아내고 장희빈을 왕비로 삼았어요.(기사환국) 그런데 숙종의 희빈 사랑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어요. 그녀의 지지 세력인 남인이 왕의 권위에 도전하기 시작했거든요. 이런 사연 속에 숙종은 내심 인현왕후의 복위각주4) 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숙종은 궁궐 뜰을 산책하고 있었어요. 달이 휘영청 뜬 늦은 밤, 한가롭게 뜰을 걷고 있는데, 불 켜진 방 하나에서 토닥토닥 칼질하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이를 궁금하게 여긴 숙종이 가던 길을 멈추고 방문을 열었어요. 떡을 썰던 궁녀 하나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머리를 조아렸어요.

숙종이 물었어요.

“야심한 밤에 웬 떡이냐?”

궁녀가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자초지종을 여쭸어요.

“내일이 사가각주5) 로 쫓겨 나간 인현왕후의 생일날이라 사가에 보낼 떡을 조금 썰고 있나이다. 죽을죄를 졌사옵니다. 마마!”

사연을 들어 보니, 인현왕후가 시집올 때 함께 따라온 몸종으로, 왕비는 쫓겨나 자기 집으로 돌아갔지만, 이 궁녀는 궁궐에 계속 남아 일을 하고 있었어요. 성이 최씨라 최 무수리라 했지요. 무수리가 뭐냐고요? 궁궐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여자 종을 무수리라 해요.

아마 숙종이 인현왕후를 미워하던 시기였다면, 최씨는 치도곤각주6) 을 당했을 거예요. 그러나 최씨가 왕의 눈에 띄었을 때는 숙종의 마음이 다시 인현왕후에게 기울던 시기였어요. 왕은 갸륵한 마음을 지닌 최씨가 너무 기특했어요. 그날 밤을 최씨와 함께 보냈고 이후 그녀의 몸에 태기가 생겨 떡두꺼비 같은 남자 아이를 낳았어요. 이 아이가 바로 영조였지요.

어때요? 길게 설명해 놓고 보니, 영조가 천민의 자식임에 틀림없지요. 아무튼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영조는 ‘천민의 자식이 임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공공연한 반대 속에 왕위에 올라야 했으며, 재임 기간 내내 크고 작은 사건이 일어나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어요.

이러한 사연 속에서 발생한 트라우마각주7) 때문에 영조는 자신의 뒤를 이을 세자의 몸에도 천민의 피가 흐른다고 생각했던지, 어릴 적부터 아들에게 혹독하게 대했어요. 딸들은 애지중지하며 금이야 옥이야 키웠지만, 사도세자는 아무리 잘해도 칭찬은커녕 매번 눈치만 줬으니, 그 상황이 어떠했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지요.

기사환국? 갑술환국?

기사환국(1689)
숙종의 부인 민씨가 왕비로 책봉된 지 여러 해가 되도록 후사를 낳지 못하는 가운데, 숙종은 후궁인 숙원각주1) 장씨를 총애하게 되었다. 그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자, 숙종은 이 아들을 자신의 뒤를 이을 원자(元子)로 책봉하고 장씨를 빈으로 삼으려 하였다. 당시 집권 세력이던 서인은 ‘정비 민씨가 아직 나이 젊으므로 그의 몸에서 후사가 나기를 기다려 적자로서 왕위를 계승함이 옳다’ 하여 원자 책봉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남인은 숙종의 주장을 지지하였고, 숙종은 서인의 독주를 누르기 위하여 남인을 등용하는 한편, 원자의 이름을 자기 뜻대로 정하고 숙원 장씨를 빈으로 책봉하였다.

이때 서인의 대표 지도자 송시열은 상소를 올려 숙종의 처사를 잘못이라고 간하였다. 하지만 숙종은 오히려 송시열을 제주로 귀양 보냈다가 후에 사약을 내려 죽였으며, 이 과정에서 남인이 득세하여 민비는 궁에서 쫓겨나고 장희빈이 정비가 되었다. 이를 기사년에 정치적 국면이 뒤집어졌다 하여 ‘기사환국’이라 한다.

갑술환국(1694)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권력을 잡았지만, 스스로 정치력을 발휘하여 집권한 것이 아니라 서인에 대한 숙종의 염증과 혐오 때문에 거저 얻은 것이었다. 특히 궁녀였던 장씨를 두고 서인과 숙종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었기 때문에 남인이 집권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남인은 자신들의 위치를 항상 불안하게 여겼으며, 언제든 또다시 실각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인은 폐출된 인현왕후 민씨의 복위 운동을 전개했는데, 남인이 이를 눈치채고 서인 탄압에 나섰다.

하지만 숙종의 심경에는 새로운 변화가 일고 있었다. 정비로 삼은 장희빈의 방자한 행동에 염증이 난 것이었다. 게다가 장씨보다는 무수리 출신의 후궁 최씨(영조의 생모)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다. 이런 정황 속에서 숙종은 남인을 내치고 민씨를 지지했던 서인을 조정의 중요 자리에 다시 등용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장희빈을 죽이기까지 했다. 이 사건을 갑술환국이라 하며, 이후 남인의 정치력은 급격히 쇠퇴하였다.

사도세자가 생각하는 아버지 영조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늘그막에 지은 『한중록각주8) 』에 이런 얘기가 나와요.

동궁(사도세자)의 글 읽는 소리는 크고 맑았으며, 글의 뜻을 이해함에도 그릇됨이 없었으니 뵙는 사람마다 동궁의 거룩하심을 일컬어 궁중 밖에서도 좋은 명성이 많이 떠돌았다.

사도세자가 혜경궁 홍씨와 결혼한 것은 10세 때로 이때 당시 세자가 매우 영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에요. 하지만 말이에요. 이 시절에 사도세자는 이미 아버지인 영조에게 매우 주눅이 들어 있어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져들고 있었어요. 『한중록』의 한 장면을 더 살펴봐요.

10세 된 아기네가 감히 (아버지와) 마주 앉지도 못하였고 신하들처럼 몸을 굽혀 엎드리고 보셨으니 어찌 그리 지나치게 하셨던가 싶다.

영조의 냉대와 카리스마 넘치는 스파르타식 교육 탓에 열 살밖에 안 된 아들은 아버지만 나타나면 벌벌 떨며 감히 쳐다볼 생각도 못했어요. 기록에 의하면 영조는 학문을 좋아하고 부지런했으며 매사를 균형 있게 처리했지만, 한번 미워한 사람은 끝까지 용서하지 않고 멀리했을 정도로 좋고 나쁨의 기준이 명확했던 사람이에요. 이런 성격이 아들을 대할 때도 예외 없이 적용되어 아들의 앞날을 가로막고 있었지요. 삭막한 부자 관계 속에서 세자는 새 옷만 입히려 하면 몸이 뻣뻣하게 굳어져 버리는 의대증과 억울한 마음을 삭이지 못하여 생긴 울화병으로 심신이 날이 갈수록 황폐해졌어요.

ⓒ 북멘토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둔 것은 누구일까?

한편 영조 시절에 나랏일은 주로 서인이 이끌었는데, 사도세자는 자신이 왕이 되면 서인을 모두 없애 버리겠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녔어요. 이런 얘기는 서인의 귀에도 들어가, 그들은 자파의 미래를 위하여 세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한 저지 작전을 꾸몄어요. 그것이 뭐냐고요? 세자의 잘못된 행동 열 가지를 적어 영조에게 고자질하는 것이었어요.

영조는 세자가 공부는 도외시하고 맨날 술타령이나 하면서 나쁜 짓만 일삼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세자를 불러 크게 꾸짖었어요. 이때 사도세자가 적극적으로 변명했다면, 죽음은 피했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아버지 앞에만 서면 한없이 오그라드는 세자였기에, 눈을 부릅뜬 아버지 면전에서 변명 한마디 제대로 못 하고 쩔쩔매다가 결국은 뒤주 속에 갇혀 죽고 말았어요. 아버지와 아들로 인연의 끈을 맺었지만, 결말은 ‘불행’ 그 자체였지요.

아들을 죽여 놓고 아버지는 편히 잘 수 있었냐고요? 물론 그렇지 못했어요. 영조 또한 자신이 저지른 일을 후회했던 것 같아요. 영조는 죽은 아들에게 ‘사도’라는 시호각주9) 를 내려 주었으며, 세자의 아들 ‘이산’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아 왕위를 잇게 했어요. 이산이 누구냐고요? 조선의 학문과 예술을 크게 발전시킨 제22대 임금 정조로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영조의 손자지요.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장용준 집필자 소개

본명보다도 제자들이 붙여 준 별명인 '장콩 선생'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묻고 답하는 한국사 카페』, 『외우지 않아도 저절로 이해되는 우리 역사 이야..펼쳐보기

출처

한국사 맞수열전
한국사 맞수열전 | 저자장용준 | cp명북멘토 도서 소개

현대사부터 고대사까지 시대 역순으로 배열하여 정치, 사상, 문화, 예술, 종교 등 우리 역사의 대표 인물 74명 37쌍의 만남이 갖는 비범하고 불꽃같은 대결을 소개하고..펼쳐보기

전체목차
전체목차
TOP으로 이동


[Daum백과] 영조 vs 사도세자한국사 맞수열전, 장용준, 북멘토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