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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삶의 길목에
서 만난 신

무서운 아버지와 아들의 복수

이아손의 모험은 잃어버린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위한 여정이다. 그는 왕의 적자임에도 불구하고 왕궁 밖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자란다는 점에서 오이디푸스와 여러모로 닮았다. 왕족이면서 왕궁 바깥에 버려져 어린 시절을 보내는 이야기는 일종의 원형적 드라마다. 누구나 한번쯤 어린 시절 자신의 부모가 친부모가 아닐 거라는 상상을 해 보았을 것이다. 어른들은 그런 아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 왔어’라는 알쏭달쏭한 말로 아이의 의혹을 더욱 증폭시키곤 한다. 부모가 친부모가 아닐 거라고 의심하는 것은 아이의 성장 단계에서 부모와의 행복한 동거가 끝나가는 시점, 말하자면 동생이 새로 태어난다든가 아이의 자아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해 부모와 자신과의 분리감을 의식하기 시작하면서라고 한다.

부모와의 분리는 우리가 어린 시절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어머니 뱃속에서 의사표현을 하지 않아도 욕구가 채워지는 혼몽한 행복의 시간을 거쳐 모든 것을 충족시켜 준 어머니의 몸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일생을 시작한다. 삶은 세계와 내가 분리되는 경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다른 동물에 비해 긴 성장기를 거치는 인간은 어머니로부터 분리된 이후에도 한동안 부모의 보호 아래서 삶을 영위해 나간다. 그러나 자의식을 지닌 독립된 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부모로부터 심리적으로 분리되는 단계가 꼭 필요하다.

융 학파 심리학자인 에리히 노이만은 이때 우리 의식 속에서는 낳아 준 생물학적 부모와 단절하고 내적이고 원형적인 아버지를 찾아 나서는 드라마가 만들어진다고 한다. 신화 속에 등장하는 계모나 계부, 혹은 삼촌 등은 이때 친부모에 대한 부정적 의식이 투영된 인물이다. 말하자면 부모와의 행복한 동거가 끝나 갈 때쯤 나쁜 어머니, 나쁜 아버지의 이미지가 생겨나고 신화가 이를 못된 계모 또는 못된 삼촌 등으로 그려 낸다는 것이다.

이아손이 만나는 삼촌 펠리아스 왕은 사내아이가 스스로 자기 정체성을 정립하기 위해 극복해야 하는 아버지를 대변한다. 말하자면 ‘나는 아버지와 다르다’는 자기주장의 단계를 거쳐 그것을 입증해야 비로소 독립된 의식을 지닌 나로 바로 설 수 있는 것이다. 이아손이 황금양털을 가지러 콜키스로 떠나는 일이 바로 이를 입증하는 과정이다. 물론 이아손으로 하여금 모험의 길을 떠나게 하는 것은 펠리아스, 그러니까 나쁜 아버지다. 하지만 이는 소년의 성장 단계에서 요구되는 아버지의 ‘나쁜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는 어느 단계에서는 악역을 떠맡기도 한다.

이런 악역은 펠리아스뿐 아니라 콜키스의 왕 아이에테스도 떠맡는다. 펠리아스나 아이에테스나 모두 이아손을 위험으로 몰아넣어 그를 시험한다. 그들은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과제를 아들에게 부여한다. 일종의 무서운 아버지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무서운 아버지에게 굴복하는 순간 아들은 성인이 될 수 없고 아버지도 될 수 없다. 굴복한 아들은 계속 아이로 남거나 아버지의 종이 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히브리인들의 신화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Isaac)이 이에 해당한다.

아브라함이 신의 명령에 따라 자기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 했을 때 이삭은 아무런 저항 없이 아버지의 착한 양이 된다. 그는 아버지에게 종속된 존재로서 자기 삶의 주도권을 아버지에게 아예 이양해 버린 ‘착한’ 소년이다. 그러나 이렇게 무서운 아버지에게 자기 삶의 주권을 아예 이양해 버리면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했던 것처럼 아버지는 때로 자식을 희생시킬 수도 있다. 실제로 고대의 어떤 왕들은 자신의 왕권을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 아들을 희생시키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제임스 프레이저는 《황금가지》에서 왕이 정해진 통치 기간이 끝나면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죽어야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왕이 가지고 있는 힘의 근원은 자연으로부터 온 영력인 마나(mana)와 같아서 마나를 소유한 자가 수명이 다해 죽는다면 그의 노쇠와 함께 마나 역시 사라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왕의 자연적 수명이 다해 그가 쇠약해지기 전에 다른 강력한 젊은 왕에게 마나가 전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마나를 전수하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은 전임 왕을 신임 왕이 먹는 것이다. 우리가 동물을 먹음으로써 동물이 지닌 힘을 우리가 가져가듯이 신성한 마나 역시 같은 방법으로 전이된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우리 생각과는 달리 고대의 왕들은 노쇠하기 전에 왕위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누군들 자신의 생명을 그렇게 쉽게 내놓고 싶어 할까. 왕위에서 물러나지도 죽임을 당하지도 않으면서 왕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는데, 가짜 왕을 대신 죽이는 방법이었다. 때로는 투표로, 때로는 원로들의 지목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사형수를 일정 기간 동안 임시 왕으로 선출한다. 그 기간은 하루가 될 수도 있고 일주일이 될 수도 있다. 그는 그 기간 동안 왕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린다. 그리고 그 기간이 지나면 사형에 처해진다. 그럼으로써 전임 왕의 살해가 완성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임시 왕이 살해됨에 따라 기존 왕의 임기는 다시 처음 시점으로 되돌아간다. 말도 안 되는 속임수 같지만 희생양의 관습은 이런 식으로 생겨났다. 누군가가 대신 죽음으로써 죽어야 하는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왕의 친족이 임시 왕의 적임자로 여겨졌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최적의 사람은 왕의 아들이었다.

스웨덴의 전설에 따르면 자그마치 90년 동안이나 자리를 지킨 아운(Aun) 왕은 아들을 바치면 그만큼 임기를 연장해 주겠다는 오딘(Odin) 신의 신탁을 받고 정해진 통치 기간인 9년이 끝날 때마다 아홉 명의 아들을 하나씩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 그리고 열 번째 아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려 했을 때 이 꼴을 계속 지켜보던 백성들이 몰려와 왕을 살해하고 그를 묻어 버렸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아들을 신의 제물로 바치는 관습은 크레타 섬에서 행해지던 미노타우로스에게 제물 바치기나 카르타고에서 행해지던 몰록(Moloch) 신에게 자식 바치기처럼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형태로 이어졌다.

자식을 신에게 제물로 바침으로써 자신의 안위나 권력을 유지하려 한 관습은 자식을 대신할 가축의 희생으로 전환되어 이어진다. 기억하시는지.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한 야훼(Yahweh) 신이 아브라함의 충정을 알았으니 양으로 대신하라는 명령을 내린 일을. 신화 속에서 젊은 청년 또는 어린 소년이 희생되는 이야기나 더 나아가 예수의 희생담은 아버지의 죄를 대속하는 신화적 원형을 되풀이하고 있는 셈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에게는 아버지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 인당수에 몸을 던진 착한 딸 심청의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심청 대신 돼지 머리를 바치든, 북어를 바치든 희생양을 통한 대속(代贖)의 관념은 이런 식으로 반복된다. 새로 태어난 젊은 생명을 먹이 삼아 낡은 권력은 유지되는 것이다.

이아손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는 착한 아들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는 펠리아스와 아이에테스에게 도전했으며 자신이 늙은 왕을 넘어설 수 있는 힘을 지닌 자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기 위해 그가 맨 처음 한 일은 아폴론 신전에 가서 신탁을 받고 동지들을 규합한 일이다. 그리스 전역에 내로라하는 남자들이 이아손 주변에 몰려든다. 그는 그들을 설득하고 규합하는 데 성공한다. 강력한 권력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힘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는 제우스의 숲에서 자라는 참나무를 이용해 콜키스로 항해할 거대한 배를 만든다. 사실 이아손 이야기에 숨은 주인공은 제우스다. 제우스야말로 아버지의 권력에 대항한 나쁜 아들의 전형이다.

잠시 제우스의 복수담을 살펴보자. 헤시오도스가 전하는 〈신통기〉에 따르면 올림포스 신전의 왕인 제우스는 아버지와 싸워 이긴 신이다. 그가 아버지와 싸운 이유는 아버지 크로노스가 자신의 형제를 모두 태어나는 즉시 먹어 버렸기 때문이다. 크로노스가 그렇게 한 이유는 자신이 아버지에 대항해 싸웠고 아버지를 거세해 버린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자식이 태어나면 자기가 한 일을 되풀이할 거라는 불안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크로노스는 아버지인 우라노스의 성기를 왜 거세해 버렸을까? 어머니인 가이아 여신이 그렇게 하도록 요청했기 때문이다. 우라노스가 가이아 사이에 태어난 자식들을 태어나자마자 다시 가이아의 뱃속에 집어넣어 버렸고 가이아는 남편의 폭력을 견딜 수가 없었다.

크로노스의 형제인 티탄은 모두 어머니의 뱃속에 갇혀서 울부짖고 있는 신세였다. 가이아는 막내아들인 크로노스를 몰래 빼돌려 거대한 낫을 주며 아버지를 응징하라고 했다. 그는 아버지를 거세해 버림으로써 힘을 무력화시켰고 형제들은 모두 해방되었다. 크로노스의 형제인 ‘티탄들’은 ‘보복하는 자’, ‘복수하는 자’란 뜻이다.

제우스가 아버지인 크로노스를 사로잡아 가두었을 때 이를 알게 된 티탄들은 분노한다. 이때 제우스는 자신의 이모나 삼촌뻘 되는 티탄들과 일대 전쟁을 벌인다. 제우스는 아버지가 집어삼켜 버린 형제를 모두 구출해 내 이들을 진두지휘한다. 제우스 편에는 몇몇 티탄도 합세한다. 이 젊은 신들과 티탄들과의 전쟁에서 제우스가 이끄는 젊은 신들이 이기고 제우스는 패배한 티탄들을 땅속 깊은 곳에 있는 타르타로스에 영원히 가둬버린다. 그리고 그는 올림포스 산 위에 신전을 세우고 신들의 왕으로 군림한다.

제우스야말로 무서운 아버지에 대항해 자기 정체성을 확실히 정립한 젊은 신이다. 이아손은 제우스의 원형을 반복하는 인간 영웅이다. 제우스가 자기 형제들을 규합해 늙은 신족인 티탄들과 싸워 크로노스의 왕좌를 빼앗았듯이 이아손 역시 젊은 영웅들을 규합해 낡은 권력인 펠리아스와 아이에테스 왕에게 대적한다. 이러한 싸움을 거쳐 젊은 애송이가 권력을 쥔 왕으로 승격된다. 바로 아버지와의 싸움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정립해 가는 젊은 아들의 드라마인 셈이다.

프로이트는 《토템과 터부》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오래전 원시사회에서 힘센 수컷이 집단을 지배하는 우두머리가 된다(프로이트의 이 이야기는 〈동물의 왕국〉에 등장하는 맹수 집단 내의 알력 관계와 상당히 유사하다). 그는 재산과 여자를 독점하고 자신이 독점한 것을 다시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가장 나약한 아들에게 권력을 승계함으로써 실질적으로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한다. 그렇게 오랫동안 권력이 늙은 우두머리에게 집중되어 있는 동안 아들들은 상대적 박탈감과 빈곤을 경험한다.

아들들은 한편으로는 아버지를 미워하지만 한편으로는 선망한다. 사실 늙은 왕의 권력이 오래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이들의 선망 때문이기도 하다. 아버지에게 저항할 수 없는 나약한 아들들은 오히려 아버지의 권력을 보좌하고 강화시키는 역할을 떠맡는다.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면서 그들은 자신보다 약한 자들을 지배하게 되고 그렇게 아버지의 명령을 대리하면서 내면에서는 무서운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강력한 힘에 복종하고 그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마치 자신이 그와 같아졌다는 착각에 빠진다. 이것이 살아남은 착한 아들의 삶을 끌고 가는 추동력이다.

어느 날 아들 중에 강력한 힘을 지닌 자가 나타난다. 그는 아버지를 질투한다. 다른 아들이 그러면서도 아버지의 위세에 눌려 착한 아들 행세를 하고 있다면 그는 ‘나쁜 아들’ 역할을 자처한다. 겉으로는 착한 아들이지만 마음속으로는 나쁜 아들이 되고 싶어 하는 다른 형제들을 규합한다. 그리고 무서운 아버지를 처단한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왕으로 군림한다. 그러나 그렇게 다른 형제들의 힘을 결집해 권력을 빼앗은 그는 권력을 어제의 동지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지 않고 과거의 아버지처럼 다시 독점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아들들은 다시 과거의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왜냐하면 노예 상태의 안정감에 대한 희구가 다시 솟아오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라지고 없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아버지를 닮은 이미지의 토템을 만들어 숭배한다. 아버지는 그렇게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박제화된 토템으로 남아 아버지의 권위를 계승하는 증표로 사용된다.

아버지의 토템은 시대가 달라지면서 모양을 바꾸기도 한다. 처음에 아버지가 강력한 무력으로 권력을 독점하게 되고 자신의 물리적 힘에 대적할 만한 아들이 그 권력을 빼앗았다면 아버지의 권력은 차츰 명령의 권력으로 바뀌어 간다. 힘을 가진 자는 명령하고 힘을 빼앗긴 자는 명령에 복종한다. 그가 하는 말의 힘은 점점 강화되어 오로지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는 신의 이미지를 낳게 된다. 말씀은 다시 계명으로 바뀐다. 말하자면 문자화된 법률체계로 전환되는 셈이다. 아버지는 법의 주인이 되고 착한 아들들은 법을 잘 지키는 일을 도덕이라 생각한다. 과거의 아버지가 주먹으로 아들들을 다스렸다면 지금은 주먹이 아니라 말로 다스릴 것이다. 그러나 주먹이든 말씀이든 권력의 독점과 지배욕을 관철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도덕이 아니라 노예의 도덕을 강요하기 위한 수단일 수밖에 없다.

이아손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아손의 정체성 찾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황금양털이다. 그는 이것을 손에 쥐지 않으면 안 된다. 말하자면 적자 인증의 열쇠인 셈이다. 왜 황금양털일까? 이 물건 역시 제우스와 관계되어 있다.

이아손에겐 먼 선대의 조상 가운데에 프릭소스(Phrixus)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프릭소스의 아버지는 제우스의 명령에 따라 구름의 님프(nymph)인 네펠레(Nephele)와 결혼해서 프릭소스와 헬레(Helle)라는 남녀 쌍둥이를 낳게 된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네펠레가 사라져 버리자(구름의 님프니까) 인간인 이노(Ino)와 결혼하게 된다. 계모인 이노는 이들 남매를 미워했다. 그래서 제우스가 내린 신탁이라면서 프릭소스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거짓말로 남편을 꼬드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제우스는 이들 남매에게 황금양을 한 마리 내려보낸다. 이 양은 프릭소스와 헬레 남매를 등에 태우고 날아올라 바다 건너 콜키스에 내려 놓는다. 바다를 건너는 도중 여동생인 헬레는 양의 등에서 떨어져 죽고 프릭소스만 무사히 콜키스에 닿는다. 프릭소스는 제우스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이 양을 제물로 바쳐 제사 지내고 양털 가죽은 자신을 받아 준 콜키스의 왕에게 바친다. 이렇게 해서 황금양털 가죽이 콜키스의 보물이 된 것이다.각주1)

로마시대 벽화에 그려진 프릭소스와 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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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릭소스를 태어나게 한 것도 콜키스로 보낸 것도 모두 제우스였다. 제우스가 보낸 황금양은 바로 제우스의 상징이다. 제우스는 어려서 산양 젖을 먹고 산양의 몸을 지닌 판족에 의해 키워졌다. 그래서 제우스는 간혹 산양의 뿔을 머리에 달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그의 풍요로운 번식력을 산양 뿔의 모습을 한 ‘코르누코피아’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아손이 되찾아 와야 하는 황금양털은 그가 제우스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제우스와 연결된다는 것은 아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앞에서 이아손이 펠리아스나 아이에테스와 대적하는 일이 아버지로부터 독립해 자기 정체성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만나야 하는 아버지와의 싸움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아버지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에리히 노이만은 남성신을 초개인적인 아버지의 상징으로 본다. 싸워야 하는 아버지란 낡은 율법과 낡은 종교, 낡은 도덕, 낡은 질서 등이 지닌 구속력이며 이들이 양심이나 인습, 전통 등의 이름으로 자식의 마음을 억누르고 있다고 한다. 한편 다시 연결되어야 하는 초개인적인 아버지란 의식적인 깨달음이나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도덕규범 등을 다시 정초하게 만드는 내면의 신성이라고 한다. 황금양털을 가져온다는 것은 바로 내면에 새로운 빛을 밝힌다는 뜻이다. 제우스는 ‘하늘의 빛’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아손이 제우스의 신탁에 따라 제우스의 상징을 되찾는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내면 속 신성한 빛을 깨어나게 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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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에리히 노이만, 《의식의 기원사》, 이유경 옮김, 분석심리학연구소, 2010, 204~217쪽 참조.
  • ・ 제임스 프레이저, 《황금가지 1》, 박규태 역주, 을유문화사, 2005, 682쪽
  • ・ 리즈 그린, 《신화와 점성학》, 유기천 옮김, 문학동네, 2000, 40쪽.

김융희 집필자 소개

저자 김융희는 서강대학교에서 철학을, 홍익대학교에서 미학을 공부했다. 7년 동안 서울예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신화와 상상력, 예술철학 등을 가르쳤다. 지은 책으로는 《예술, 세계와의 주술적 소..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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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길목에서 만난 신화
삶의 길목에서 만난 신화 | 저자김융희 | cp명서해문집 도서 소개

신화와 상상력 등의 주제를 일상의 삶과 연결시키는 데 일가견이 있는 미학자 김융희. 어른들을 위한 인문학 강의를 진행하면서 보여 준 매혹적인 내용 그대로 ‘신들의 이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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