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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노타우로스는 미노스의 황소라는 뜻이다. 그런데 미노스는 황소의 아들이다. 정확히 말하면 황소로 변한 제우스의 아들이다. 신이 황소로 변해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는 신에게 바쳐야 하는 황소를 탐냈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황소인간을 낳았다. 황소인간은 인간을 잡아먹고 결국은 인간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테세우스가 죽인 것은 과연 누구였을까?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미노타우로스를 왕을 대신하는 희생양으로 본다. 고대 크레타를 비롯해 지중해 지방에서 황소는 원래 자연의 생명력을 나타내는 상징 역할을 했다. 고대 수메르 지방에서 발견된 토판에는 독수리가 황소를 뜯어먹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뜯어먹히는 황소는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웃는 듯하다. 독수리는 태양의 상징이며 황소는 달의 상징이다. 고대 이집트에는 암소의 얼굴을 한 여신이 있다. 그녀의 이름을 하토르(Hathor)이며 사랑의 여신인 이시스(Isis)의 딸이며 아바타(avatar)다. 캠벨은 이렇게 말한다. “땅 위에 서 있는 우주의 암소 여신 하토르의 네 다리는 네 방위의 기둥이었으며, 배는 창공이었다. 황금 매, 태양으로 상징되는 호루스(Horus) 신은 동에서 서로 날아가서 저녁이면 하토르의 입으로 들어가고 다음 새벽이면 다시 태어난다. 따라서 그는 밤이면 실제로 ‘그의 어머니의 황소’가 되었다. 반면 낮에는 빛의 세계의 통치자로서 날카로운 눈을 가진 맹금이 되었다.”

소는 오랫동안 인류의 먹거리로 바쳐진 동물이다. 지금은 먹거리를 기능적인 입장에서만 바라보지만 과거에 우리가 먹는 것은 신이었다. 소를 먹는다는 것은 소로 변한 신을 먹는 것이다. 그렇다면 황소를 먹고 있는 독수리는 우리 자신의 다른 모습이다. 그런데 하토르 제의에서 이 관계는 역전된다. 우주의 암소 여신이 매로 변한 자신의 아들을 먹고 있는 것이다. 매로 변한 태양신은 밤마다 어머니의 품속인 암소의 뱃속으로 날아든다. 그리고 아침이면 다시 매가 되어 동쪽 하늘에서 비상한다. 매와 태양이 하늘 위로 날아오를 수 있는 힘은 어머니 암소 여신의 몸인 대지의 생명력에서 나온다. 이때 먹히는 자가 곧 먹는 자라는 오래된 역설적인 법칙이 작용한다.

고대 수메르 지방에서 발견된 독수리가 황소를 뜯어먹는 모습을 묘사한 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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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테세우스가 죽인 미노타우로스는 대지의 힘을 상징화했다고 볼 수 있다.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였다는 사실은 대지의 힘을 정복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과거의 모권 사회에서 대지의 신성한 힘으로 추앙받던 황소가 남성 영웅의 등장과 함께 반인반수적인 괴물로 모습을 바꾸게 된 것이다. 모권 사회에서 동물신은 여신의 신성한 힘을 나타내는 표현이었으나 부권 사회로 넘어오면서 동물신은 인간의 얼굴을 한 신들보다 하위 존재로 지위가 추락하고 급기야는 희생되어야 할 괴물로 변한다.

신화 속 남성 영웅은 대지의 힘을 제어했을 때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입증받는다. 미노타우로스의 아버지는 미노스가 아니라 포세이돈이다. 어머니는 ‘빛의 여인’이란 의미를 지닌 파시파에다. 파시파에는 태양신인 헬리오스(Helios)의 딸이다. 그렇다면 미노타우로스는 태양빛과 바닷물이 만들어 낸 작품이다. 찬란한 신의 작품이 괴물이 되고 동물성은 인간의 추악한 면모를 상징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 이야기는 표면에서 보자면 인간의 도를 넘는 탐욕이 불행을 낳는다는 교훈을 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또 이러한 해석이 오랫동안 이 이야기를 물들여 온 표피적이며 단선적인 해석이다. 신화는 사회적 교훈을 널리 설파하기 위해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그것이 신화의 본래 진면목은 아니다. 신화가 근친상간을 비롯해 사회적 금기를 어기고 우리에게 익숙한 자연법칙을 마음껏 무시하면서 이야기를 펼쳐 나가는 건 인간 중심적인 자연법과 사회법 너머의 진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부디 그 두 편협한 그물망에 걸려들어 신화의 광대한 우주를 놓치는 우를 범하지 마시기를.

테세우스가 죽음을 감내하면서 마주한 미궁은 사실 어머니 대지 여신의 몸이다. 구불구불 이어진 어두운 동굴 속 길은 대지 여신의 뱃속을 걸어가는 길이다. 그렇다면 그 길 자체가 바로 죽음의 길이다. 그는 죽음의 세계를 걸어 들어갔다 걸어 나온 자인 셈이다. 그렇다면 아리아드네의 황금실은 테세우스의 생명줄이다. 그것을 건네준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의 아니마(anima)가 될 것이다. 아니마는 항상 저 너머의 세계에 한 발 들여놓기 시작할 때 남성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그녀는 항상 열쇠를 쥐어 준다. 물론 그가 받은 열쇠로 여는 문 안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리아드네의 역할은 테세우스에게 황금실을 건네주는 것으로 끝난다. 그 이후에 아리아드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낙소스 섬에서 만날 디오니소스의 축복이다. 아리아드네는 나중에 하늘의 별자리가 된다.

죽음의 여행길에서 테세우스가 마주해야 했던 존재가 미노타우로스다. 그는 미궁의 중심에 있다. 미궁의 중심에서 마주치게 되는 존재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렇다면 미노타우로스는 테세우스의 다른 모습이다. 하늘의 빛의 딸과 바다의 신이 빚은 작품인 미노타우로스가 바로 테세우스다. 그런데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죽인다. 자신의 일부를 스스로 희생해버리는 셈이다. 무엇을? 바로 오랫동안 계승되어 온 신적인 자연성을 희생하는 것이다.

제우스 이후의 신화는 지중해 지방에 널리 자리 잡고 있던 여신 문명의 신들 이야기를 재편한 결과다. 철기시대 북방계 아리안(Aryan)이 침입하기 이전에 여신 문명은 동물과 인간, 먹는 것과 먹히는 것, 삶과 죽음 등 우리가 분할된 것으로 바라보곤 하는 것을 하나로 연결된 것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지니고 있었다. 황소를 먹는 독수리나 제 꼬리를 먹는 뱀 등의 이미지는 모두 이러한 우주적 고리를 나타내는 고태적 상징이다. 그런데 이 연결과 합일에 대한 관점이 거꾸로 분할과 독립의 관점으로 변하게 된 것이 바로 북방 유목민에 의한 가부장제의 도래라는 사건이다. 물론 신화는 여전히 서로 다른 존재 간의 연결과 하나 됨이라는 관점을 남기고 있기는 하지만 그 이후 신화의 표면적 목소리는 고대의 다층성과 신비를 깊숙이 감춰 버리고 말았다.

테세우스는 장차 아테네의 왕이 될 자다. 왕은 다른 부족, 다른 생명체를 정복함으로써 태어난다. 그는 살리는 자이기 전에 죽이는 자다. 그리고 그의 무한대에 가까운 권력은 무엇인가를 희생하지 않고서는 얻어질 수 없다. 그 희생의 대상이 자기 자신이 되든 다른 생명이 되든 말이다.

거의 모든 남성 영웅은 원시적 면모의 괴물과 맞부딪쳐 싸우고 이들을 죽이거나 무력화시킴으로써 영웅으로서의 자기 입지를 정립한다. 테세우스도 일종의 괴물인 미노타우로스를 무찌름으로써 영웅으로 아테네에 귀환하는 것이다. 그는 괴물의 공포로부터 사람들을 구한 자다. 그런데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에는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까? 그들은 누구일까? 그리스 신화 속 괴물들은 주로 반인반수다. 말하자면 인간적인 면모와 동물적인 면모를 함께 가지고 있는 존재다. 그들이 해가 되는 것은 그들의 법이 인간의 법과는 상충하기 때문이다. 괴물이 지나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거나 바닷속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은 그들 나름대로 지킬 것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들의 삶을 영위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영웅과 괴물과의 싸움은 자연의 의지에 따르고 있는 동물과 자연의 보이지 않는 생명력이 인간에 의해 정리되고 통제되고 제어되어 가는 장면을 보여 준다.

분석심리학에서는 신화적 괴물을 우리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의식의 그림자로 간주한다. 우리 자신의 일부이지만 우리가 자신이라고 간주하고 싶어 하지 않는 면모들이 그림자 인격이 된다. 그림자 인격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이성 중심, 사유 중심, 또는 전두엽 중심적인 문명에서 그림자 인격은 주로 동물 형상으로 나타난다. 그것도 파충류적인 형태로. 개구리나 두꺼비, 뱀 등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이미지는 생명의 원초적인 활동, 말하자면 생명의 본능에 충실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대변한다. 연못 속에 숨어 있다가 공주가 빠트린 공을 꺼내 주는 개구리 왕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공주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아무리 왕자라 하더라도 개구리와 한평생을 지내고 싶지는 않다. 동화 속 개구리 왕자는 징그럽고 못생겼으며 펄쩍펄쩍 뛰어다니고 끈적끈적하기까지 하다. 그들은 우리에게 너무 혐오스러운 존재, 열등한 존재로 비춰지는 것이다.

파충류 모습을 한 괴물은 외계인을 소재로 한 영화 속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1979년부터 제작된 리들리 스콧의 영화 〈에일리언〉 시리즈에 등장하는 외계인의 모습이 아마 그 전형이자 전범이 될 것 같다. 못생긴 도마뱀 같은 외모에 진액을 흘리는 커다란 입을 지닌 이 괴이한 존재는 인간과 같은 또는 그 이상의 지능을 갖고 인간과 싸운다. 그런데 에일리언은 인간 여자를 숙주로 삼아 번식한다. 이상한 얘기 같지만 모든 인간은 자신의 어미를 숙주로 해서 태어난다. 주인공 여자는 갈등한다. 흉악한 외모를 지닌 괴물이 바로 자신의 아이인 셈이니까. 그녀는 모성애를 따라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모성을 위반하고 인간을 구하기 위해 자식을 죽여야 하는 것일까.

에일리언의 이미지 역시 그림자 인격이 투영된 것이다. 현대 문명의 냉혹함은 파충류적인 본능과 전두엽의 기계적 지성이 혼종된 결과다. 지성이 연민과 공감, 감성을 소실한 채 파충류적 생존본능과 결탁한 것이 문명의 괴물인 셈이다. 인류가 자신 내면에서 울리고 있는 자연의 힘과 메시지를 왜곡하면서 나타나는 이미지다. 자연성과 야생성을 배제하고 억압하면서 문명의 그림자가 만들어졌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그림자가 다시 인간 자신을 공격하는 것이다.

《황금가지》의 저자 프레이저(Sir James George Frazer)는 미노스 왕이 아주 오랫동안 크레타를 통치했다고 전한다. 당시 지중해 지방에서는 왕의 공식 통치 기간이 8년이었다고 한다. 8년이 지나면 왕의 신적인 힘이 약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의 임기를 8년 이상으로 연장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왕을 대신하는 대리 왕을 선정해 잠시 동안 그에게 왕의 역할을 맡기고 죽여 버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왕 대신 임시 왕이 죽는 것이다. 그런데 이 희생제의는 청동으로 만든 황소 안에 인간을 집어넣어 태워 죽이는 무시무시한 방식으로 행해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8년에 한 번꼴로 희생 제물로 바쳐진 아테네의 젊은이들은 크레타의 미노스 왕의 임기를 늘리기 위한 술책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미노스 왕은 자신의 임기가 끝나는 8년마다 희생제의를 치렀고 그렇게 해서 그는 테세우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적어도 24년 이상 자신의 임기를 연장할 수 있었다. 어찌 미노스 왕뿐이었을까. 수많은 젊은이를 8년에 한 번 꼴로 먹어 치우는 소머리의 괴물은 미노스 왕의 다른 모습이자 당대 모든 왕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미노스가 바로 미노타우로스인 셈이다.

그런데 왜 8년에 한 번꼴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8년 주기는 당시의 역법에 따르면 태양과 달이 겹쳐지는, 말하자면 양력과 음력이 겹쳐지는 가장 짧은 주기라고 한다. 독수리가 황소를 먹고 황소가 독수리를 먹는 시간이 8년에 한 번꼴로 되풀이되었다는 이야기다. 태양신 호루스가 매일 밤 하토르 여신의 품 안에서 죽고 다시 태어나듯이 8년 주기를 맞이한 하늘신의 아들은 우주적 황소에게 먹혀야 했다. 스스로 대지 여신의 품 안으로 걸어 들어가지 못한 미노스 왕은 희생양을 요구했고 왕은 아마도 재생의 신비를 경험하지 못한 채 끓는 물에 빠져 죽는 수모를 당해야 했으리라.

재생의 신비를 안고 있는 우주적 황소가 미노스에 의해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로 변해 버린 것이다. 왕이 신권을 갖게 되고 세상 모든 힘의 주인으로 군림할 때 그는 미노타우로스, 말하자면 ‘미친 소’가 된다. 오늘날의 왕은 금권의 주인이다. 뉴욕의 금융가인 월스트리트에는 황소상이 하나 세워져 있다. 이 황소는 금권의 상징이다. 오래전 지상의 풍요를 가져다주는 달의 여신을 상징하던 황소가 변형된 셈이다. 월 스트리트의 소는 8년 주기로 꽃다운 젊은이들을 먹어 치우는 미노타우로스의 다른 모습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 황소상 앞에서 신자유주의 반대 시위를 하고 있는 시민들은 테세우스의 다른 모습일까, 아니면 테세우스에게 황금실을 건넨 아리아드네일까? 미노스는 대체 누구일까?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아테네를 구한 테세우스는 또 다른 미노스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살기 위해 죽고 죽이는 게임 속에서 벗어날 길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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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조지프 캠벨, 《신의가면 Ⅲ: 서양 신화》, 이진구 옮김, 까치, 1999, 76쪽.
  • ・ 제임스 프레이저, 《황금가지 1》, 박규태 역주, 을유문화사, 2005, 659쪽.

김융희 집필자 소개

저자 김융희는 서강대학교에서 철학을, 홍익대학교에서 미학을 공부했다. 7년 동안 서울예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신화와 상상력, 예술철학 등을 가르쳤다. 지은 책으로는 《예술, 세계와의 주술적 소..펼쳐보기

출처

삶의 길목에서 만난 신화
삶의 길목에서 만난 신화 | 저자김융희 | cp명서해문집 도서 소개

신화와 상상력 등의 주제를 일상의 삶과 연결시키는 데 일가견이 있는 미학자 김융희. 어른들을 위한 인문학 강의를 진행하면서 보여 준 매혹적인 내용 그대로 ‘신들의 이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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