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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감독 야니크 하스트럽(Jannik Hastrup)이 만든 애니메이션 〈곰이 되고 싶어요(A boy who wanted to be a bear)〉(2003)에는 인간의 아이로 태어났지만 곰에게 길러진 아이가 등장한다. 그린란드의 어느 곳에서 인간 부부와 곰 부부가 같은 날 비슷한 시간에 각각 아이를 낳는다. 그러나 곰의 아이는 늑대의 습격으로 죽게 되고 실의와 슬픔에 빠진 엄마 곰을 위해 아빠 곰은 인간의 아이를 납치해 곰의 아이로 키운다. 인간 아이의 아빠는 그 이후로 아이를 납치한 곰을 찾아 사방을 헤매 다니고 아이가 소년으로 성장했을 즈음 아이의 아빠는 곰과 함께 지내고 있는 아이를 발견한다. 아이의 총에 아빠 곰은 죽음을 맞이하고 아이는 인간 마을로 돌아온다. 그러나 곰의 아이로 자란 소년은 인간 마을에서 매일 슬픔과 그리움으로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 곰이 예전에 알려 준 신의 동굴을 찾아간다. 그 동굴 속에서 아이는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이 곰에 있음을 깨닫고 곰의 세계로 돌아간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인간 아이는 물속으로 뛰어들어 곰으로 변신해 인간 세계를 등지고 곰 가족의 품에 안긴다.

근대의 늑대인간 이야기가 동물로 변신하는 것을 저주로 생각했다면 이 영화는 그 생각을 뒤집는다. 과거에 늑대인간 이야기 중에 또 다른 버전인 ‘늑대 젖을 먹고 늑대로 키워진 아이’는 나중에 인간 세계로 돌아와 억지로 적응하면서 살아가지만 이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은 자발적으로 곰의 세계로 돌아가 거기서 행복을 찾는다. 그러한 결단을 내리는 계기는 자기 마음의 신성한 목소리를 들려주는 동굴 안에서의 체험이다.

구석기시대부터 어둡고 깊은 동굴은 인간이 자기 내면의 신성을 경험하곤 하는 장소였다. 유럽의 중남부 지방에서 발견된 오래된 동굴벽화는 과거의 인간들이 동굴 속에서 동물과 연결된 우리 내부의 신성을 경험한 흔적을 담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어머니 대지의 자궁과도 같은 동굴 속에서 야생동물과 우리 인간이 깊은 곳에서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 것이다. 하스트럽의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동굴 장면 역시 비슷한 경험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무언가에 끌리듯 다가간 동굴 안에서 에스키모 아이는 동굴이 전해 주는 목소리와 영상 들을 만난다. 말하자면 마음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꿈의 세계에 들어간 셈이다. 거기서 아이는 자신이 곰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주인공 아이만 그러할까? 우리 역시 마음속 아득히 깊은 곳에서 어떤 동물들을 만난다. 분석심리학의 치유 방법 중에 무의식 속에 숨어 지내는 수호 동물을 불러내는 과정이 있다. 우리 몸 안의 에너지 센터에는 동물의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꿈속에 등장하는 동물은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수호 동물이다. 이 동물들은 평상시에 조용히 숨어 있다가 우리 삶의 중대 국면에 나타나 우리에게 길잡이 역할을 한다고 한다. 물론 이들은 마음의 너무 깊은 곳에 숨어 있어서 그들을 불러내는 일이 쉽진 않다. 더구나 우리 내면의 동물 역시 오랫동안 보살핌을 받지 못하면 심한 상처를 받고 앓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들을 길잡이로 삼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하는 일은 그들의 상처를 보듬어 안는 것이다. 마음속에 동물을 잘 보살필 때 삶도 건강해진다.

우리 시대의 삶은 동물과의 연계를 존중하기보다는 오히려 무시하고 억압하며 그 연계를 억지로 끊어 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가 우리 바깥에 거주하는 동물들을 학대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에 대한 학대로 이어진다. 우리 스스로가 거대한 생명체의 일부라는 것, 동물이건 식물이건 사람이건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 친족과 같다는 것을 망각한 탓이다. 상처받은 생명은 분노하고 슬퍼한다. 우리의 안과 밖에서 동시에 학대받고 상처받고 있는 동물들의 분노와 슬픔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든 일련의 작품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모색하고 있는 듯하다. 〈원령공주〉로 더 잘 알려진 〈모노노케 히메〉(1997)에서부터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를 거쳐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벼랑 위의 포뇨〉(2008)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엔 동물과 인간, 더 나아가 자연과 인간 간에 잃어버린 연대를 되찾고 싶어 하는 감독의 소망이 담겨 있다. 〈모노노케 히메〉가 인간의 탐욕과 공포, 무지에서 비롯된 자연의 신성파괴에 대한 슬픈 레퀴엠이라면 〈센과 치히로〉에서는 주인공 소녀가 상처 입은 강의 신 하쿠를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준다.

〈모노노케 히메〉의 여주인공 산은 늑대개 편에 서서 인간에게 대적한다. 스스로 인간이면서도 늑대개의 딸로 사는 셈이다. 그녀에게 인간은 탐욕스럽고 이기적이며 악한 존재다. 그녀는 숲을 파괴하고 무기를 만드는 자들에게 동물과 마찬가지로 맨몸으로 대적한다. 이 영화 속에서 자연의 신성은 동물신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숲 속 깊은 곳 신성의 샘에 사슴 신이 내려오면 그 물에 몸을 담그는 자는 누구든 상처를 치유받는다. 하지만 동물 신이 항상 선하고 사랑만을 베풀어 주는 존재는 아니다. 한때 숲을 활보하던 오래되고 지혜로운 신이던 멧돼지 신은 인간의 폭력에 상처를 심하게 받아 재앙 신으로 변해 버린다. 재앙신의 몸은 핏빛으로 물들어 꿈틀대는 분노의 에너지로 가득 차게 된다. 재앙신의 분노는 그 옆에 가까이 가는 모든 존재를 감염시킨다. 한번 그 분노에 감염되면 몸은 영원히 헤어 나올 수 없는 고통을 주는 상처를 입게 된다.

이 영화에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오래된 동물 신과 그에 적대적인 인간 사이를 중재하고 화해시키는 존재가 재앙신에게 감염된 사내아이 아시타가다. 고통 속에서 허덕이는 생명을 구원하는 것은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자가 아니라 늘 상처받은 자, 그 상처 속에서 고통받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는 자다.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반은 말이면서 반은 인간인 켄타우로스(Centauros) 부족은 현자이자 치유하는 자로 알려져 있다. 켄타우로스가 그럴 수 있는 것도 스스로 활을 쏘는 자이면서 활에 맞아 상처를 안고 사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오랫동안 사람들이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고 추종한 예수 역시 십자가에 매달려 영원한 고통 속에 빠져 있는 모습으로 숭배된다. 슬픔의 성모만이 우리를 슬픔으로부터 구원한다.

보티첼리, 〈팔라스와 켄타우로스〉, 1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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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영화의 말미에 숲의 정령들의 왕인 사슴 신은 탐욕스러운 인간의 칼에 머리가 잘리고 만다. 사슴 신의 죽음과 함께 숲은 과거의 싱싱하고 찬란하며 경외로운 생명력을 잃고 검은 기름처럼 번져 가는 어둠에 빠진다. 오늘날 위대한 동물 신이 자취를 감춘 자연이 ‘스스로 그러함(自然)’을 잃고 인간을 위한 테마파크로 전락해 버리는 것처럼 이제 숲은 예전의 신성함을 잃어버렸다. 늑대개의 편에 섰던 산도 재앙신의 상처를 공유하는 아시타가도 결국 숲을 구하지는 못한다. 〈모노노케 히메〉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숲과 자연에게 바치는 슬픈 레퀴엠이다.

그는 단절된 자연과의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는 대안을 끊임없이 모색한다. 그가 희망을 거는 존재는 어린 소녀들이다. 〈모노노케 히메〉에서 오로지 인간에 대한 분노로만 가득 찼던 소녀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는 분노한 곤충들의 습격을 맨몸으로 막아서는 구원자의 역할을 맡는다. 나우시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그녀가 곤충들의 분노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구하려는 존재는 자신의 부족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달려드는 곤충들과 문제를 일으킨 어리석은 적들 그리고 숲과 자연 모두다. 이것이 과거의 한 부족을 구하는 남성 영웅과 다른 점이기도 하다. 우리를 공격하는 생명 역시 구해야 하는 생명이라는 것을 이해하며 실천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이해가 바로 생명 모두에 대한 친화력과 공감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어린 소녀들이 지니고 있는 공통된 심성이다.

칸 영화제에서 애니메이션 작품으로는 처음으로 대상을 수상해 화제가 된 작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도 갈라진 두 세계를 연결하고 화해시키는 역할을 맡는 존재는 어린 소녀다. 소녀의 이름인 센과 치히로는 그녀가 두 세계를 넘나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인간계에서는 치히로라 불리지만 정령들의 세계에서는 센이다). 또한 정령계에서 그녀가 하는 허드렛일은 인간계에서 타락해 돼지로 변한 부모를 인간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는 영혼의 힘을 그녀가 잃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그녀는 신들의 목욕탕을 매일 걸레질하며, 갖은 오물을 묻히고 들어와 신음하는 오물신의 욕조를 깨끗이 청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녀는 자신을 아래로 낮춰 그 모든 일을 기꺼이 감당한다. 마녀의 공격에 피 흘리는 강의 신 하쿠를 구하기 위해 또 다른 이방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여기서 소녀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구원의 전사다. 그러나 그녀는 누구와 싸워서 세계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연민과 공감이 가득한, 다정한 노동으로 주변 사람을 구원한다.

구원의 주체인 어린 소녀들은 과도하게 분할된 합리성의 틀에 아직 적응되지 않은 말랑말랑한 상상력의 힘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이며 태고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영감과 직관의 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이들이다. 세계에 잃어버린 균형을 되찾아 올 수 있는 힘은 명령이나 지시에 굴복하는 힘도, 강한 전투력이나 전략적 꾀도 아니다. 사람, 동물을 포함해 자연계 전체에서 울리는 생명의 신성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교감하고 조응하는 능력일 것이다. 우리가 사라진 부족들의 신화에 귀 기울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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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융희 집필자 소개

저자 김융희는 서강대학교에서 철학을, 홍익대학교에서 미학을 공부했다. 7년 동안 서울예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신화와 상상력, 예술철학 등을 가르쳤다. 지은 책으로는 《예술, 세계와의 주술적 소..펼쳐보기

출처

삶의 길목에서 만난 신화
삶의 길목에서 만난 신화 | 저자김융희 | cp명서해문집 도서 소개

신화와 상상력 등의 주제를 일상의 삶과 연결시키는 데 일가견이 있는 미학자 김융희. 어른들을 위한 인문학 강의를 진행하면서 보여 준 매혹적인 내용 그대로 ‘신들의 이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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