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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명장열전

이성계

李成桂, 李成桂

불패의 명장, 조선을 건국하다

요약 테이블
시대 조선
출생 1335년(충숙왕 복위 4)
사망 1408년(태종 8) 05월 24일
본관 전주(全州)
이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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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의 시대, 변방에 뜬 별

고려 말 대내외적으로 혼란했던 시대에 이성계(李成桂)는 새로운 왕조를 일으켜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시대의 흐름을 읽고 정확하고 과감하게 정치적 판단을 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유연한 성품으로 사람을 끌어모으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그는 전장에 나가 패배를 모르는 훌륭한 무장이었다. 타고난 체격과 갈고닦은 무예,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전략과 전술이 이성계를 왕으로 만든 바탕이 되었다.

이성계는 1335년(충숙왕 복위 4) 화령부(현 영흥)에서 아버지 이자춘(李子春)과 어머니 최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중결(仲潔), 호는 송헌(松軒)이다. 왕이 된 후 이름을 단(旦), 자를 군진(君晉)으로 고쳤다. 이성계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전주의 향리였던 고조부 이안사(李安社)가 동북면(東北面)의 덕원(德源)으로 이주하면서 그곳에서 자리를 잡았다. 이안사는 고려인과 여진족이 섞여 살던 이 지역에서 원나라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관리가 되었다. 이후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李行里), 이춘(李春)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원의 천호(千戶) 등 지방관을 역임했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도 쌍성총관부의 천호였는데, 이자춘은 당시 주변 정세 변화를 잘 읽고 있었다. 중국 대륙에서는 명나라가 새로 일어섰고 원의 세력은 약해지고 있었으며, 고려 공민왕은 그 틈을 타 쌍성총관부를 공격해 고려의 영토를 회복하려 했다. 이자춘은 고려를 돕기로 하고 1356년(공민왕 5)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내응해 고려가 옛 영토를 회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 일로 이자춘은 고려로부터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에 임명되어 동북면을 안정시키는 데 공헌했다.

어릴 때부터 장대한 기골과 총명함을 자랑하던 이성계는 무예, 특히 궁술에 뛰어났다. 힘이 좋아 남보다 갑절은 무거운 활과 화살을 쓰면서도 빗나감이 없어 명궁 소리를 들었다. 아버지 이자춘이 고려와 함께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훌륭한 조력자가 되었으며, 이자춘이 병마사가 된 지 4년 만인 1360년(공민왕 9) 병으로 죽자 뒤를 이어 동북면의 세력가로 떠오르게 되었다.

패전을 모르는 맹장, 이성계

이성계가 무장으로 활동하던 14세기 중엽은 중국 내륙에서 명나라가 일어나 원나라 세력을 몰아내던 때였다. 고려는 이 시기에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세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이 때문에 원나라와 사이가 나빠져 자주 무력 충돌을 빚었다. 게다가 정세가 혼란한 틈을 타 북으로는 여진족, 남으로는 왜구의 침탈이 끊이질 않았다. 이성계는 이즈음 여러 전투에 참여해 전공을 세우며 고려 무장으로서 확실한 지위를 차지했다.

1361년(공민왕 10)에 독로강 만호인 박의(朴儀)가 반란을 일으켰다. 박의의 무리가 정부군을 무너뜨리고 기세를 올리자 이성계가 친병조직을 이끌고 출동해 박의를 토벌했다. 또 같은 해 홍건적이 고려를 침입해 개경이 함락될 지경에 이르렀을 때도 이성계가 군대를 이끌고 개경 탈환작전에 나섰다. 이성계는 성에 가장 먼저 입성해 승리했다. 이로써 이성계는 공민왕의 신임을 얻게 되었고, 무장으로서의 능력도 인정받았다.

1362년(공민왕 11)에는 원나라가 쌍성총관부를 되찾기 위해 병사 수만 명을 이끌고 침입했다. 이때 원나라의 사주를 받은 여진족 나하추의 부대를 맞아 고려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자 공민왕은 이성계를 동북면병마사로 임명해 출정하도록 했다. 당시 나하추 부대는 계속된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러나 결국 이성계의 거침없는 공격에 맥을 못 추고 대패했다. 나하추는 수하 몇 명과 함께 겨우 목숨을 부지해 도망치면서 말했다고 한다.

"이자춘이 지난날에 '내가 재주 있는 아들이 있노라'라고 하더니, 과연 거짓말이 아니었다."

1364년(공민왕 13), 원나라로 도망을 갔던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德興君)이 고려 출신 최유(崔濡)와 함께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원나라를 등에 업은 덕흥군은 공민왕을 폐하고 고려의 왕이 되려고 했다. 압록강을 건너온 덕흥군과 최유의 군대를 의주(義州)에서 만난 고려군이 패전해 후퇴하자, 공민왕은 최영을 급파하고 이성계 역시 출정시켰다. 최영과 이성계는 수주(隨州) 달천(獺川)에서 적에 맞서 합동작전을 펼쳤다. 이성계는 뛰어난 궁술로 적장을 쓰러뜨려 승기를 잡은 후 덕흥군의 선봉부대를 무찔렀다. 이어서 최영과 함께 주력부대를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철통같이 북방을 지켜오던 이성계는 1376년(우왕 2)에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남으로 내려왔다. 당시 일본은 내분을 겪어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 때문에 살기가 힘들어진 일본의 일부 영주들은 무사들을 이끌고 고려나 중국 해안을 침입해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성계는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에서 고려의 백성을 괴롭히다가 충청도까지 올라온 왜구를 지리산 일대에서 물리쳤다. 특히 1380년(우왕 6)에는 아기바투(阿其拔都)가 이끄는 왜구가 함양과 경산, 상주까지 올라와 노략질을 했는데, 이성계가 이들을 운봉에서 맞아 섬멸했다. 이를 황산대첩(荒山大捷)이라고 한다. 이 전투에서 최무선(崔茂宣)이 화약과 화통을 이용한 포를 개발해 처음 사용하기도 했다.

이성계는 1382년(우왕 8)에 여진족 호바투(胡拔都)가 동북면 일대를 침략하자 다시 북으로 올라가 이들을 격퇴했다. 또한 1385년(우왕 11)에는 함주(咸州)까지 올라온 왜구를 무찔렀다. 이처럼 크고 작은 전투에서 뛰어난 전략과 용맹으로 승리한 이성계는 고려가 인정하는 최고의 맹장으로 이름을 높였다.

그러다 마침내 1388년(우왕 14)에는 수문하시중에 올랐다. 이는 최영이 맡고 있던 최고관직 문하시중 바로 아래 직급이었다. 이로써 이성계는 고려 조정에서 명실상부한 지위와 권력을 쥐게 되었다.

위화도 회군으로 개국의 바탕을 다지다

패전을 모르는 무장으로 이름을 떨친 이성계가 수문하시중에 오른 뒤, 우왕은 요동을 정벌하겠다고 나섰다. 명나라가 지나치게 무리한 공물을 요구할 뿐 아니라 철령 이북 땅을 내놓으라고 고려를 위협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철령 이북 땅은 본래 고려 땅으로 원나라가 강점하고 있던 것을 공민왕 때 겨우 되찾은 곳이었다. 명나라는 원나라를 이었으니 원래 원나라 땅이던 이곳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우왕은 사신을 보내 명나라의 뜻을 꺾어 보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최영을 중심으로 한 친원 세력의 뜻을 받아들여 요동 정벌을 단행하였다.

우왕은 1388년(우왕 14) 4월, 최영을 팔도도통사,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에 각각 임명하고 요동 정벌을 명했다. 이성계는 현실적으로 요동 정벌이 불가능하다는 '사불가론(四不可論)'을 제기했다.

지금에 출사(出師)하는 일은 네 가지의 옳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에 거역하는 것이 한 가지 옳지 못함이요,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두 가지 옳지 못함이요, 온 나라 군사를 동원해 멀리 정벌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탈 것이니 세 가지 옳지 못함이요, 지금 한창 장마철이므로 활(弓弩)은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들은 역병(疫病)을 앓을 것이니 네 가지 옳지 못함입니다. - 《태조실록》 권 1, 총서 83번째 기사

그러나 우왕은 이미 군사를 일으켰으니 중지할 수 없다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이성계는 일단 왕의 명에 따라 조민수와 함께 5만의 대군을 이끌고 출정 길에 올랐다. 이성계와 조민수의 부대는 압록강 하류에 위치한 위화도(威化島)에 당도했다. 그곳에서 전열을 가다듬어 요동성을 칠 계획이었다. 하지만 때는 5월이었고 장마로 압록강이 불어나자 도망병이 속출했다. 이성계는 이대로 정벌에 나선다는 것은 자멸의 길이라 여겼다. 더구나 친명파로서 명을 친다는 것은 명분에도 맞지 않았다.

마침내 결단을 내린 이성계는 조민수를 설득해 회군을 감행했다. 역사를 뒤흔들 사건의 시작이었다. 개경으로 돌아온 이성계는 조민수와 함께 우왕을 친위하는 최영의 부대와 싸워 승리를 거뒀다. 이렇게 이성계는 정권을 장악했다. 싸움에서 진 최영은 고봉현(지금 경기도 고양)으로 귀양갔다가 처형되고 우왕도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바라보는 견해는 둘로 나뉜다. 이성계가 쿠데타를 목적으로 계획적으로 단행했다는 시각과 요동 정벌의 무모함을 현실적으로 판단해 단행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시각이다. 여러 정황상 이성계가 처음부터 역성혁명을 목적으로 회군을 계획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성계는 성공해도 친명파로서 명분을 구기는 일이고, 실패하면 어차피 망하는 것이었다. 어떻든 결과적으로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확실한 권력을 거머쥐게 되었으며, 고려 왕조는 그 존립이 위태롭게 되었다.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

개경을 점령한 이성계와 조민수는 각각 우시중과 좌시중에 오르고,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등 신진 사류들과 협력해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그런데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후 뒤를 이을 왕을 누구로 할 것인가의 문제로 조민수와 이성계의 의견이 달랐다. 조민수는 우왕의 아들 창을 왕으로 옹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이성계는 우왕이 공민왕이 아닌 신돈의 아들이라며 왕씨 일족 중에서 왕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조민수가 국새(國璽)를 맡긴 공민왕의 정비 안 씨가 우왕의 아들 창(昌)을 왕으로 지목함으로써 창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정몽주 등과 함께 이듬해인 1389년(창왕 1)에 창왕을 폐위시키고 고려 20대 왕 신종의 7세손을 왕으로 등극시켰다. 그가 바로 고려 최후의 왕 공양왕이다. 공양왕 즉위 후 이성계는 우왕과 창왕을 죽이고 조민수까지 변방으로 내쳤다. 이로써 고려 조정은 이성계가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공양왕을 세울 당시 이성계를 아예 왕으로 옹립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를 반대하는 조정 신료들을 의식한 이성계가 사양했다.

조준과 정도전, 남은, 이방원 등은 적극적으로 이성계를 왕으로 세우고자 했다. 그리고 마침내 정몽주 등 반대파를 제거한 뒤, 1392년(공양왕 4) 7월에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를 왕으로 세웠다. 30여 년간 전장을 누비며 패할 줄 모르는 무장 이성계가 474년의 고려 역사를 끝내고 마침내 조선(朝鮮)을 건국한 것이었다. 이때의 장면을 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대소신료(大小臣僚)와 한량(閑良)·기로(耆老) 등이 부축해 호위하고 물러가지 않으면서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함이 더욱 간절하니, 이날에 이르러 태조가 마지못해 수창궁(壽昌宮)으로 거둥하게 되었다. 백관(百官)들이 궁문(宮門) 서쪽에서 줄을 지어 영접하니, 태조는 말에서 내려 걸어서 전(殿)으로 들어가 왕위에 오르는데, 어좌(御座)를 피하고 영내(楹內)에 서서 여러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육조(六曹)의 판서(判書) 이상의 관원에게 명해 전상(殿上)에 오르게 하고는 이르기를, "내가 수상(首相)이 되어서도 오히려 두려워하는 생각을 가지고 항상 직책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했는데, 어찌 오늘날 이 일을 볼 것이라 생각했겠는가? 내가 만약 몸만 건강하다면 필마(匹馬)로도 피할 수 있지마는, 마침 지금은 병에 걸려 손발을 제대로 쓸 수 없는데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경(卿)들은 마땅히 각자가 마음과 힘을 합해 덕이 적은 사람을 보좌하라." 했다. 이에 명해 고려 왕조의 중앙과 지방의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에게 예전대로 정무(政務)를 보게 하고, 드디어 저택(邸宅)으로 돌아왔다. - 《태조실록》 권 1, 태조 1년 7월 17일

이성계는 즉위 초기에 고려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법제나 여러 사회 제도 역시 고려를 이어받겠다고 선포했다. 급격한 사회변화가 백성들과 기존 세력들의 반발을 살 것을 우려해서였다. 하지만 고려 왕조와 차별화하면서 새 왕조의 정당성을 꾀하기 위해 유교적 정치이념과 제도들을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1393년(태조 2)에는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바꾸고, 한양으로 도읍지를 옮길 것을 결정했다. 한양에 궁궐과 도성을 건립하고, 정도전을 중심으로 법 제도와 군사, 재정, 과거 제도와 같은 국가 제도 전반의 개혁을 단행하도록 했다. 이로써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의 기틀이 잡히고 새로운 왕조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조선 태조로서의 이성계

새 국가의 기틀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이성계는 세자 책봉의 문제에 직면하였다. 이성계가 왕이 되었을 때 이미 58세였기 때문에 세자를 세우는 일이 급했다. 당시 이성계에게는 첫 번째 부인 한 씨 소생의 여섯 아들과 두 번째 부인 강 씨 소생의 두 아들이 있었다.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해 죽은 한 씨의 아들들은 모두 장성한 데 반해 강 씨의 아들들은 아직 어렸다. 하지만 이성계는 강 씨 소생의 막내아들 이방석(李芳碩)을 세자로 책봉했다. 이성계의 총애를 받은 왕비 강 씨와 당대 최고의 권력을 지닌 정도전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것은 장자 원칙도 아니요, 건국에 기여한 공도 배제된 세자 책봉으로, 한 씨 소생의 아들들의 불만이 컸다. 특히 건국에 공이 큰 다섯째 이방원(李芳遠)의 반발이 컸다. 결국 이 일은 이성계 말년에 불행의 씨앗이 되었다.

1398년(태조 6), 이방원과 형제들은 왕자들의 사병 혁파를 추진하던 정도전을 제거하기 위해 정변을 일으켰다. 이때 이성계는 왕비 강 씨의 병사로 시름에 빠져 지내다 병을 얻어 몸져누워 있었다. 이방원은 세자 이방석과 그 형 이방번(李芳蕃)을 유배시킨 후 죽였다.

형제들 간의 싸움으로 졸지에 아들 둘을 잃은 이성계는 큰 슬픔에 빠져 정사에 뜻을 잃고 둘째 아들 이방과(李芳果,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정종은 도읍을 다시 개경으로 옮겼으나 그곳에서 넷째 형 이방간의 난으로 다시 골육상쟁이 벌어졌다. 왕자들 간에 일어난 권력 쟁탈전이라고 해서 이른바 '왕자의 난'이라 한다.

이후 이성계는 불도에 정진하다가 이방원(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태상왕(太上王)이 되었다.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이 못마땅했던 태조는 서울을 떠나 소요산, 함주(咸州, 지금의 함안) 등에 머물며 사냥과 불공으로 시간을 보냈다. 함주에서 이성계는 안변부사 조사의와 함께 반기를 들었다가 실패했다.

패전을 모르는 맹장에서 한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이성계는 자식들의 다툼으로 불행한 말년을 보내다 1408년(태종 8) 5월 24일에 죽었다. 시호는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며, 묘호는 태조이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건원릉(健元陵)이다.

조선은 무장 이성계가 세운 나라였다. 그러나 태종 이후 문치주의로 돌아서 정계에서 무장들의 지위가 크게 약화되었다. 농사를 근본으로 유교를 숭상하는 사대부의 나라가 된 조선은 국방력이 약화되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존명사대(尊明事大)의 외교적 노선을 견지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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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 집필자 소개

1937년 충북 괴산에서 출생하여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사학과를 거쳐 국사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민대학교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 대학원 교수로 있으면서 미국..펼쳐보기

출처

명장열전
명장열전 | 저자이성무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사에서 활약한 31명의 명장을 만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명장부터 많은 조명을 받지는 못했으나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사람들까지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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