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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선국왕전

명종

조선 제 13대 왕, 明宗

수렴청정의 그늘에서 시름의 세월을 보내다

요약 테이블
시대 조선
출생 1534년(중종 29)
사망 1567년(명종 22)
본명 이환(李峘)
본관 전주(全州)

후사 없이 죽은 인종의 뒤를 잇다

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명종은 1534년(중종 29)에 중종과 셋째 부인인 문정왕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인종의 이복동생으로, 출생과 함께 경원군(慶源君)에 봉해지고 인종이 즉위한 1544년(인종 1)에 경원대군(慶源大君)에 봉해졌다. 이름은 환(峘), 자는 대양(對陽)이다.

중종의 첫 번째 계비이자 인종의 모후인 장경왕후 윤씨는 인종을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그 후 중종의 두 번째 계비로 궁에 들어온 문정왕후 윤씨는 세자인 인종을 친아들처럼 대하고 인종 역시 문정왕후에 대한 효성이 극진했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중종의 둘째 아들인 경원군을 낳은 후로 태도가 돌변했다. 경원군은 자랄수록 총명하고 의젓해졌다. 게다가 세자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그때부터 문정왕후와 그의 오빠 윤원로, 동생 윤원형 등의 소윤 일파는 왕의 자리를 탐내기 시작했다. 이는 세자 비호 세력인 대윤과의 정치적 대립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가운데 중종이 죽고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대윤과 소윤의 정치적 대립은 일단 대윤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다. 마음이 급해진 문정왕후와 소윤은 왕이 후사가 없으니 경원대군을 세제로 책봉해 종사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했다. 그런데 세제 책봉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인종이 8개월의 짧은 치세를 끝으로 죽고 말았다. 인종은 죽기 전 경원대군에게 전위한다는 전교를 내렸다. 결국 경원대군을 왕으로 삼고자 했던 문정왕후와 소윤 일파의 꿈은 이루어졌다.

1545년(명종 즉위) 7월 6일 명종이 즉위했다. 이때 나이 12세였다. 너무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윤원형을 비롯한 소윤 일파가 정치 전면에 드러나면서 실세로 부상했다.

명종의 비는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로 심강(沈鋼)의 딸이다. 1542년(중종 37)에 경원대군과 혼인했으며, 명종의 즉위와 함께 왕비에 책봉되었다.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는 1551년(명종 6)에 순회세자(順懷世子)를 낳았다. 순회세자는 명종의 유일한 자식이다. 1557년(명종 12)에 7세의 나이에 세자에 책봉되었고 2년 후 윤옥(尹玉)의 딸과 혼인까지 했으나 1563년(명종 18)에 13세의 나이로 후사 없이 죽었다. 명종은 6명의 후궁을 두었으나 그 사이에서는 모두 자식을 보지 못했다.

을사사화, 소윤의 세상이 오다

명종의 즉위와 함께 정권을 잡은 소윤 일파는 곧바로 정적인 대윤 일파를 비롯해 자신들의 뜻에 반하는 세력들을 제거했다. 이른바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킨 것이다. 사화로 불리는 이유는 대윤 일파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사림들이 화를 입었기 때문이다.

을사사화를 주도한 인물은 윤원형과 결탁한 이기(李芑)였다. 이기는 인종이 즉위하고 대윤이 정권을 잡았을 때 탄핵된 인물로, 대윤인 윤임, 유관, 유인숙 등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명종의 즉위와 함께 조정에 복귀한 이기는 양사(兩司)를 앞세워 윤임, 유관, 유인숙을 탄핵했다.

그런데 일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사화로까지 비화되었다. 백인걸(白仁傑)을 비롯한 사림들이 윤임 등에 대한 탄핵이 정당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대비(문정왕후)는 노여워하며 백인걸을 의금부에 가두는 한편 백인걸에게 동조했던 양사의 관원들을 파직시켰다. 또한 이미 탄핵된 윤임 등을 귀양 보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권벌(權橃)이 유관과 유인숙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대해서 소윤파인 정순붕(鄭順朋)은 권벌이 역적들을 옹호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윤임, 유관, 유인숙은 사사되었으며, 그들을 옹호했던 권벌도 체직(遞職)되었다.

여기에다 김명윤(金明胤)이 성종의 아들인 계성군(鷄城君)의 양자이자 윤임의 생질인 계림군(桂林君)과 중종의 아들인 봉성군(鳳城君)이 역모를 꾸몄다고 고변하는 일이 일어났다. 고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계림군 이유(李瑠)는 윤임의 3촌 조카로서, 윤임이 그에게 의지해 흉측한 모의를 했으니 이유도 반드시 그 실정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미 그 실정을 알고서도 즉시 고변하지 않았으니, 용서할 수 없는 죄이어서 당연히 처치한 바가 있어야 할 터인데도 조정에서는 아직까지 처치함이 없습니다. 이는 필시 범죄의 괴수가 이미 제거되었으니 이런 것쯤은 염려할 것이 없다고 여겨 버려두고 거론하지 않는 것일 겁니다. ……봉성군 이완(李岏)은 신의 죽은 아내의 가까운 친척인데 나이가 아직 어리니 필시 계략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완이 여러 왕자군(王子君) 중에서 조금 뛰어나다고 해 무지한 무리들 중에 간혹 칭찬하는 자가 있으니, 국가가 위험한 시기를 당해 공훈을 탐내고 재앙을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이 이에 의지해 반란의 계제로 삼을 자가 없다고 또한 보장할 수 없습니다. 아울러 처치하소서. - 《명종실록》 권 2, 명종 즉위년 9월 1일

이 일과 관련해 이미 사사된 윤임, 유관, 유인숙의 아들들과 계림군의 친인척 그리고 봉성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혐의를 가진 사람들이 모두 잡혀와 고초를 받고 좌천되는 등 피해를 입었다.

을사사화로 소윤 일파는 확실하게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 이후에도 윤원형 등은 양재역 벽서사건(정미사화), 이홍윤(李洪胤) 역모 사건(이홍남 고변 사건) 등을 일으키며 자신들의 뜻에 반하는 정적들을 제거해 나갔다.

수렴청정의 그늘

명종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모후인 문정왕후가 8년간 수렴청정을 했다. 문정왕후는 '타고난 자질이 영명(英明)하고 성도(聖度)가 강정(剛正)'하며, '규문(閨門)이 법도가 있고 내정(內庭)이 엄숙'했다. 소윤 일파와 더불어 정국을 이끌어 감에 있어서 정사에 비판적인 인사들을 가차 없이 내치는 등 단호한 면모를 보였다. 명종은 명색이 왕이었지만 모후의 그늘에 가려 전혀 자기의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이는 비단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기간 동안만이 아니라 성인이 되어 친정을 하게 된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임금이 나이 이미 장성했으므로 대비가 비로소 환정(還政)했다. 따라서 마음대로 권력을 부리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만일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곧 국문(國文)으로 조목을 나열해 중관(中官)을 시켜서 외전에 내어 보냈다. 임금이 보고 나서 일이 행할 만한 것은 행하고, 행하지 못할 것이면 곧 얼굴에 수심을 나타내며 그 쪽지를 말아서 소매 속에 넣었다. 이로써 매양 문정왕후에게 거슬렸으므로 왕후는 불시에 임금을 불러들여, "무엇 무엇은 어째서 행하지 않느냐." 하고 따지면 임금은 온순한 태도로 그의 합당성 여부를 진술했다. 문정왕후는 버럭 화를 내어 "네가 임금이 된 것은 모두 오라버니와 나의 힘이다." 했다. 어떤 때는 때리기까지 해 임금의 얼굴에 기운이 없어지고 눈물 자국까지 보일 적이 있었다. - 《연려실기술》 권 10, 명종 조 고사본말

사정이 이러하니 명종에게는 '눈물의 왕'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명종이 스스로 정치적 견해를 밝히고 자신의 의지대로 정책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모후인 문정왕후와 외숙인 윤원형을 비롯한 소윤 일파의 벽을 뛰어넘어야 했다. 그러나 명종에게는 자력으로 친정 체제를 구축할 힘이 없었다.

문정왕후가 집권하는 동안 가장 눈에 띄는 정책 변화는 불교 중흥책이었다. 역대 왕들 중에도 개인적인 불심 때문에 억불숭유(抑佛崇儒)의 국시를 어기고 불교를 장려한 경우가 있었지만, 문정왕후처럼 정책적, 전폭적으로 불교를 지지하고 장려한 경우는 없었다.

문정왕후의 불교 정책을 이끌어 간 핵심 인물은 보우(普雨)라는 승려였다. 정만종(鄭萬鍾)의 추천으로 문정왕후와 인연을 맺은 보우는 막강한 권력을 등에 업고 불교를 개혁하고 중흥시키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우선 성종 대에 폐지된 도첩제(度牒制)를 부활시켜 불법승의 폐해를 없애려고 했다. 또한 강제로 통합되었던 양종(兩宗)을 다시 분리해 봉은사(奉恩寺)에 선종을, 봉선사(奉先寺)에 교종을 두었다. 이러한 보우의 불교 정책은 성리학을 중시하는 관료들과 유생들의 반발을 샀다. 그러나 문정왕후의 비호 아래 보우는 승승장구했다. 세간에서는 권력에 붙어 불교를 일으키려고 하는 보우를 '요승(妖僧)'이라고 헐뜯기도 했다.

그러나 보우의 불교 중흥 정책은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죽으면서 끝나고 말았다. 일찍 죽은 순회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대규모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문정왕후의 죽음 이후 보우는 처단되었으며, 15년 동안 추진되었던 불교 중흥 정책도 모두 취소되었다.

들끓는 민란과 임꺽정의 출현

조선 중기인 15, 16세기는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져 도적떼가 들끓고, 크고 작은 민란이 끊이지 않았다. 흉년이 겹치고 왕과 권신들이 토지를 독점하면서 먹고 살기가 힘들어진 농민들이 삶의 터전을 버리고 스스로 도적의 소굴로 들어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왜구들의 노략질도 백성을 괴롭혔다. 1555년(명종 10)에는 대마도 등에서 거주하던 왜인들이 배 70여 척을 이끌고 쳐들어와 전라도 일대에서 대규모 노략질을 했다. 이 사건을 을묘왜변(乙卯倭變)이라 한다. 중종 시절에 발생한 삼포왜란 이후 줄어든 교역량에 불만을 품은 왜구들의 도발이었다. 을묘왜변을 계기로 임시기구였던 비변사가 상설기구로 되었다.

한편 명종 대에 이르러 도적들이 많이 일어났는데, 그중에서도 임꺽정이라는 희대의 도적이 출현해 조정에서는 임꺽정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임꺽정은 황해도 지역을 기반으로 전국에 걸쳐 활동했는데, '의적(義賊)'이라고 불리며 백성들의 비호를 받기도 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조정에서는 임꺽정의 무리를 소탕하기 위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이러한 논의가 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영의정 상진, 좌의정 안현, 우의정 이준경, 영중추부사 윤원형이 함께 의논해 아뢰었다. "개성부도사를 무신으로 뽑아 보내라는 상교(上敎)가 지당하나, 비록 무신을 뽑아 보내더라도 별다른 조치 없이 일상적으로만 해 나간다면 오히려 이익됨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듣건대, 요사이 많은 강적(强賊)들이 본부(本府)의 성저(城底)에 몰려들어 주민을 살해하는 일이 매우 많은데도, 사람들은 보복이 두려워 감히 고발하지 못하고, 관리들은 비록 보고 듣는 바가 있어도 매복을 시켜 포착(捕捉)할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 합니다.

지난날 임꺽정을 추적할 즈음에 패두(牌頭, 개성부 포도관이었던 이억근을 이름)의 말을 듣지 않고 군사 20여 명만을 주어 초라하고 서툴게 움직이다가 마침내 패두가 살해당하게 되었는가 하면, 바로 뒤를 이어 적을 끝까지 추격하지 않았다가 끝내 적들이 멋대로 날뛰게 했으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무신을 보내 포착할 방법을 강구해서, 혹은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기도 하고, 혹은 문견(聞見)을 근거로 추적하기도 해 반드시 포착할 것을 기하게 해야 합니다." - 《명종실록》 권 25, 명종 14년 3월 27일

조정의 임꺽정 소탕 작전은 3년간 계속되었다. 그러다 1560년(명종 15)에 임꺽정 패거리의 모주(謀主)인 서림이 잡히면서 그와 관련된 정보를 고했고, 이를 바탕으로 관군이 출동해 임꺽정과 그 일당을 잡아들였다. 임꺽정은 무리를 이끌고 구월산으로 들어가 끝까지 항전했지만 결국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체포되었다.

임꺽정의 출현과 도적떼들의 잦은 민란은 당시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피폐했는지를 보여 주는 단면이다. 민생이 피폐해진 데는 자연재해로 인해 흉년이 겹친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권신들이 득세하면서 정치가 문란해졌기 때문이었다. 힘 있는 사람이 토지와 경제적 이익을 독점하는 사회·경제적 착취가 극에 달해 있었던 것이다.

소윤의 몰락 그 후, 짧았던 명종의 친정

명종은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둔 후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인순왕후의 외삼촌인 이량(李樑)을 기용한 것이 대표적인 일이다. 즉, 외척인 윤원형을 또 다른 외척으로 견제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력을 키운 이량이 잔존 사림 세력을 제거하려다 인순왕후의 동생인 심의겸(沈義謙)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량은 생질인 심의겸이 사림 세력과 가깝게 지내는 것이 마음에 걸려 그를 제거하려다가 오히려 역으로 당하고 만 것이다. 이제 조정에는 윤원형과 심의겸이라는 두 외척 세력이 존재하게 되었다. 이것이 문정왕후가 죽기 직전까지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소윤 일파의 권세도 영원하지는 않았다. 특히 문정왕후가 죽으면서 세상은 이들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명종 역시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친정 체제를 구축하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외숙인 윤원형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양사의 탄핵을 받은 윤원형은 1565년(명종 20) 8월에 삭탈관작되어 귀양갔다. 그리고 정권을 잡은 20년 동안 함께 악행을 저질렀던 처 정난정(鄭蘭貞)과 함께 귀양지에서 죽었다.

비로소 명종은 인재를 고루 등용하며 소신 있게 정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사림의 전성기가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그러나 명종의 치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명종은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죽고 난 지 불과 2년 만인 1567년(명종 22) 6월에 3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명종은 갑자기 병세가 위독해지는 바람에 왕위 계승자를 미처 정하지도 못했다. 이에 영의정 이준경이 명종비인 인순왕후에게 물어 생전에 정해 놓은 덕흥부원군(德興府院君)의 셋째 아들 하성군(河城君)을 입승대통(入承大統)시켜 후계를 잇게 하니, 이가 선조이다.

명종의 시호는 공헌(恭憲)이며, 능은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한 강릉(康陵)이다. 강릉은 문정왕후의 묘인 태릉(泰陵) 옆에 있다.

명종의 가계도

제13대 명종(明宗, 1534∼156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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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 집필자 소개

1937년 충북 괴산에서 출생하여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사학과를 거쳐 국사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민대학교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 대학원 교수로 있으면서 미국..펼쳐보기

출처

조선국왕전
조선국왕전 | 저자이성무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국왕의 혈통부터 즉위 과정, 시대와의 관계, 해결해야 했던 현안 등을 추적하여 각 왕의 치적을 보다 입체적으로 살펴본다. 선입견 속에 가려진 조선 국왕들의 때로는 정치..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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