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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선국왕전

정종

조선 제2대 왕, 定宗

왕자들의 반란 속에 왕위에 오르다

요약 테이블
시대 조선
출생 1357년(공민왕 6)
사망 1419년(세종 1)
본명 이경(李曔), 이방과(李芳果)
본관 전주(全州)

태조의 둘째 아들 방과, 역성혁명에 공을 세우다

정종은 함흥 사저 시절인 1357년(공민왕 6) 이성계와 첫째 부인 한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경(曔), 초명은 방과(芳果), 자는 광원(光遠)이다.

정종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전인 1377년(우왕 3)에 아버지를 도와 왜구 토벌에 나섰으며, 1389년(창왕 1)에는 절제사 유만수(柳曼殊)와 함께 해주에 침입한 왜적을 방어했다. 1390년(공양왕 2)에도 지밀직사사 윤사덕(尹師德)과 함께 양광도에 침입한 왜적을 영주 도고산 아래에서 격파하는 등 전공을 많이 세웠다. 특히 아버지 이성계가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적극 가담해 그 공로로 공신에 책록되기도 했다. 또한 장남 방우가 역성혁명에 반대해 아버지와 척을 진 이후로는 실질적인 장남 역할을 했다.

이성계는 조선 개국 후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 소생의 방석을 세자로 삼았다. 정종은 정도전 등의 견제를 받아 다섯째 아들인 방원과 함께 개국공신에서 제외되었다. 결국 이것이 원인이 되어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이후 방원의 비호로 세자에 책봉된 후 왕위에 올랐다.

정종은 김천서(金天瑞)의 딸인 정안왕후(定安王后)와 7명의 후궁을 두었다. 정비인 정안왕후와의 사이에는 후사가 없었고, 후궁들로부터 15명의 아들과 8명의 딸을 얻었다. 이 밖에 정식 후궁이 아닌 애첩들로부터 2명의 아들을 더 낳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차 왕자의 난과 정종의 즉위

조선 건국 초기의 비극은 태조와 전실 왕자들의 대립에서 시작되었다. 특히 태조가 신덕왕후 소생의 어린 아들 방석을 세자의 자리에 올림으로써 첫째 부인인 한씨 소생의 아들들과 갈등이 더욱 깊어졌다. 설상가상으로 태조의 신임을 얻어 정권을 장악한 정도전이 병권까지 장악하자 개국공신에서 소외된 왕자들과 종친 세력의 불만은 불안으로 변해 갔다. 사병 혁파로 손발이 묶인 무인 세력들의 불만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국 커져 가던 불만은 다섯째 아들인 방원을 중심으로 결집되어 터져 나왔다. 1398년(태조 7년) 8월에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것이다. 실록은 이를 "봉화백(奉化伯) 정도전, 의성군(宜城君) 남은과 부성군(富城君) 심효생 등이 여러 왕자들을 해치려 꾀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형벌에 복종해 참형(斬刑)을 당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는 태종과 그의 가신들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어린 이복동생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정도전 일파의 탓으로 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태조는 병중이었다. 조선 건국에 온 힘을 기울인 탓에 기력이 급격히 쇠한 것이었다. 게다가 사랑하던 신덕왕후가 두 해 전에 죽고 난 후로는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 애통한 마음에 조석으로 절에서 재를 올리느라 심신이 고단했던 것이다. 태조는 병중에도 궐 안에 있는 신덕왕후 소생의 두 아들만 챙겼다.

그러던 중 정도전이 궐 밖 왕자들에게 태조가 피접을 가기 전에 병문안을 하러 들어오라고 했다. 이방원은 이를 혁명의 계기로 삼았다. 무방비 상태로 궐 안에 순순히 들어갔다가는 정도전 일파의 무장 병력에게 당할 것이 분명하니 역으로 그들을 공격하는 것이 살 길이라 여긴 것이다. 이방원의 거사에는 태조의 셋째 아들 방의와 넷째 아들 방간이 적극 동참했고, 여러 종친과 무인 들이 합세했다. 부인 민씨 일가와 이숙번(李叔蕃) 등도 열심히 도왔다.

이방원은 난을 일으키기에 앞서 세자인 방석의 동복형 방번을 조용히 불러 "나와서 나를 따르기를 바란다. 그 종말에는 저들이 너도 보전해 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일렀다. 그러나 방번은 방원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의 막료들이 곧 자기를 세자로 삼도록 하겠다는 말을 곧이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방원의 말을 무시했던 방번은 동생 방석과 함께 목숨을 잃고 말았다.

한편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이 남은의 첩 집에 모여 술을 마시고 있다는 정보를 들은 방원은 심복들을 보내 그들을 처단케 했다. 그런데 여러 왕자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제거하려고 모의한 사람들이 한가하게 모여서 술이나 마시고 있었다는 것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과연 그들이 진짜 왕자들을 죽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 의심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어쨌든 방원은 정도전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만약 세자인 방석이 군사를 출동시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변변찮은 무기와 병졸 몇십 명이 전부인 방원의 세력은 꼼짝없이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방석은 변고가 생겼다는 보고를 듣고도 군사를 출동시키지 않았다. 궐 밖 광화문에서 남산에 이르기까지 말 탄 사람이 횃불을 들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고 두려운 마음에 군사를 움직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방원의 허허실실 작전이었다. 방원은 시위군의 군사를 접수하고 도평의사사를 소집해 강제로 정도전 등이 난을 일으켜 선참후계(先斬後啓)했다고 태조에게 보고하게 했다. 이러한 작전이 먹힌 것을 보니, 천운(天運)이 방원에게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결국 세자 방석과 그의 동복형인 방번, 신덕왕후의 딸 경순공주의 남편인 이제(李濟)가 죽임당하고, 경순공주는 이듬해 출가해 승려가 되었다.

1차 왕자의 난으로 세자의 자리가 공석이 되자 상당수의 대소신료들은 정안군 방원을 세자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미 이때부터 방원이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방원은 적장자가 세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사양했고, 영안군 방과가 세자가 되었다.

그런데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방과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다른 형제들이 방원의 편에 서서 정도전과 방석, 방번 형제를 제거하는 데 동참하는 동안, 방과는 소격서(昭格殿)에서 아버지 태조의 건강을 빌고 있었다. 즉, 그는 방원이 일으킨 난에 직접 참여하지도, 측면에서 지원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방과는 자신이 세자에 오르게 된 것을 방원의 양보 덕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아버지 태조를 이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렇게 세자의 자리에 오른 방과는 불과 열흘 만에 왕위에 올랐다. 그가 조선의 2대 왕인 정종이다.

2차 왕자의 난과 정종의 정치적 의중

왕위에 오른 정종은 결코 허수아비 왕이 아니었다. 그는 나름대로 왕권 강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우선 한양을 버리고 옛 도읍인 개경으로 다시 옮겨갔다. 또한 벼슬 청탁 관습인 분경(奔競)을 법으로 금지하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양인을 구제하기 위한 노비변정도감을 설치하는 등 개혁적인 제도를 마련했다.

그러나 정종이 안정적으로 정국을 이끌어 가기에 방원의 존재는 커다란 부담이 되었다. 비록 동생이긴 하지만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장본인으로서 정국의 주도권을 방원이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이후 방원 스스로 세제(世弟)가 아닌 세자(世子)의 자리에 오른 것은 이방원 자신이 태조의 후계자임을 만천하에 공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즉, 정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분명히 한 것이다. 정종의 정치적 생명은 그만큼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다.

한편 1400년(정종 2) 1월에 일어난 2차 왕자의 난은 태조의 넷째 아들 방간이 박포 등과 함께 동생인 방원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것이었다. 정종에게는 정비인 정안왕후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없었고, 그런 와중에 방간은 아버지의 허락만 받는다면 자신도 후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방원이 버티고 있는 한 방간이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길은 없었다. 뜻을 이루려면 방원을 제거하는 수밖에 없었다. 박포는 선수를 치면 유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방간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태조의 이복동생인 이화(李和)를 비롯한 종친들이 먼저 나서서 방원에게 방간을 제압하라고 했다. 방원은 이미 1차 왕자의 난에서 이복형제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전력이 있었다. 동복형을 상대로 다시 한 번 칼을 뽑아들어야 한다는 것은 내심 꺼림칙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당할 방원이 아니었다. 결국 그는 군사를 움직여 방간을 제압했다.

이 과정에서 정종은 과연 어떤 정치적 입장을 취했을까? 실록에 따르면, 정종은 방간이 한 부모에게서 난 형제에게 칼을 겨눈 것을 몹시 안타까워하며 당장 그만둘 것을 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종의 태도와 달리 왕의 군사들 중 일부가 방간의 궐기에 참여하는 일이 발생했다. 일설에는 정종이 그들을 보내 방간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다고도 하지만 사실로 확인된 바는 없다. 다만 실제 정종의 의중이 어디에 있었든 간에 이 일로 정종은 정치적인 압박을 받게 되었다.

결국 정종은 1400년(정종 2) 2월에 방원을 세자로 책봉한 데 이어, 그해 11월 세자에게 양위하는 교서를 내리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당시의 상황을 야사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정안왕후는 매양 태종이 들어가 뵐 때마다 정종에게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그의 눈을 어찌해 못 보십니까? 속히 왕위를 전하시어 마음을 편하게 하소서." 했다. 정종이 그 말을 좇아서 상왕으로 별궁에 거처했다. - 《연려실기술》 권 2, 정종 조 고사본말

그야말로 용상이 가시방석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정종은 상왕으로 물러나 아무런 정치적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한 채 격구 등으로 소일하면서 살았다. 그러다가 1419년(세종 1) 인덕궁에서 63세의 나이로 죽었다. 정종은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태종 때문에 사후에도 오랫동안 묘호를 받지 못하다가 1681년(숙종 7)에 이르러서야 추존되어 묘호를 받았다.

권력의 세계에 양보란 없다

정종은 두 차례의 왕자의 난으로 정권을 장악한 방원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잠시 왕의 자리를 지켰던 허수아비 임금이었을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정종 역시 정치적인 야망이 있었으며, 왕으로서도 결코 무능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1, 2차 왕자의 난 때 취했던 태도를 통해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방원이 1차 왕자의 난 이후 장자에게 왕위를 양보했다거나 정종이 실권자인 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했다고 보는 것도 올바른 시각은 아니다. 권력의 세계에 양보란 없기 때문이다. 하려고만 했다면 바로 왕위에 오를 수도 있었던 방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태조와의 관계 그리고 이복동생들을 죽이고 권좌를 탐했다는 세상의 비난을 고려한 정치적 포석이었다. 또한 정종이 방원에게 양위한 것은 권력 투쟁에서 패한 패장의 마지막 선택이었을 뿐이다. 그가 궐 밖에 있던 가의궁주(嘉懿宮主) 유씨의 아들 불노(佛奴)를 불러들여 원자로 삼으려 한 것만 보아도 그의 욕심을 엿볼 수 있다. 불노는 방원의 반대로 인해 정종의 아들이 아니라는 명분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이처럼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원수지간으로 만들고, 형제들끼리 칼을 겨누게 만드는 것이 권력이다. 조선 건국 초기, 왕권이 안정되지 않은 가운데 벌어진 혈육 간의 투쟁은 권력의 속성을 극명하게 보여 주었다.

제2대 정종(定宗, 1357∼1419년)의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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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 집필자 소개

1937년 충북 괴산에서 출생하여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사학과를 거쳐 국사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민대학교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 대학원 교수로 있으면서 미국..펼쳐보기

출처

조선국왕전
조선국왕전 | 저자이성무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국왕의 혈통부터 즉위 과정, 시대와의 관계, 해결해야 했던 현안 등을 추적하여 각 왕의 치적을 보다 입체적으로 살펴본다. 선입견 속에 가려진 조선 국왕들의 때로는 정치..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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