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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걸프전의 주인공

사담 후세인

사담 후세인 아브드 알마지스 앗티크리티이이, Saddam Hussein al-Majid al-Awja
요약 테이블
출생 1937년
사망 2006년
본명 사담 후세인 아브드 알마지스 앗티크리티이이
국적 이라크

1979년부터 2003년까지 대통령으로 이라크를 통치했다. 두 번의 걸프 전쟁을 치른 장본인이고, 제1차 걸프 전쟁으로 인해 이라크는 국제 사회에서 경제제재 조치를 당했다. 9·11 테러와의 관련성 및 대량학살무기 문제로 인하여 결국 제2차 걸프 전쟁 이후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사담 후세인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사담 후세인은 1979년 7월 16일부터 2003년 4월 9일까지 이라크를 통치한 대통령이었다. 그가 처형되고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이라크는 여전히 테러가 난무하는 불안정한 정치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의 정식 이름은 사담 후세인 아브드 알마지스 앗티크리티이이로 이라크 내 소수종파인 수니파 출신이다. 사담은 세속적 범아랍주의와 아랍사회주의를 추구하는 바트당의 지도적 인물이었다. 그는 바그다드의 민족주의적 고등학교를 다녔고, 이라크 법학대학에서 3년간 공부했으나 1957년 20세의 나이에 학교를 그만두고 숙부 카이랄라가 가입되어 있는 범아랍혁명당인 바트당에 입당했다. 이 기간에 사담은 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당시 이라크와 전 중동 지역에서는 혁명 분위기가 주도적이었다. 이라크 진보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정치적 엘리트(식민 시대 관료들과 지주들, 부유한 상인과 부족장, 귀족들)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젊은 사담은 이집트의 범아랍민족주의자 가말 압델 나세르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나세르의 등장으로 1950, 60년대 중동 지역에는 혁명의 기운이 불어오며 이라크와 이집트, 리비아에서 왕권이 전복되었다. 나세르는 중동 전역의 민족주의자들에게 1956년 수에즈 사태에서 영국과 프랑스에 대항해 싸울 것을 촉구했으며, 이집트를 현대화하고 아랍 세계를 정치적으로 통합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1958년, 아브둘 카림 카심과 군 장교들이 이라크 왕 파이잘 2세를 암살했다. 1959년 사담은 미국의 후원을 받은 아브둘 카림 카심 암살계획에 연루되었으나 실패하여 부상을 입고 시리아, 이집트 등지로 피신했다. 1963년에 바트당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압둘 살람 아리프 장군이 인솔한 쿠데타로 카심 정권이 붕괴했고, 사담은 귀국해 바트당 서기가 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권력투쟁에 휘말려 바트당 지도부가 전원 체포되었고, 사담 역시 1968년까지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는 일 년 먼저 탈옥해서 당의 주요 지도자가 되었다.

1968년 7월 17일, 사담은 아흐마드 하산 알 바크르 장군이 인솔하는 바트당 주도의 무혈 쿠데타에 참여했고, 이로 인해 카심은 실각했다. 바크르가 대통령이 되었고, 사담은 그 보좌관이자 바트당 혁명지도 평의회의 의장이 되었다. 그는 바트당의 분열로 인한 실패를 잊지 않았고, 당의 통합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사담은 점차 당의 실질적인 권력자가 되었다.

걸프 전쟁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이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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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잡은 사담은 인종, 종교 문제로 분열되어 있는 이라크를 통합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이라크의 경제를 발전시키고, 쿠데타를 막기 위해 경찰력을 강화했다. 이라크 경제발전 및 권력의 핵심에 있는 것은 바로 석유였다. 1972년 6월, 사담은 외국의 석유회사들을 이라크에서 쫓아내고 석유를 국유화했다. 일 년 후 석유 가격이 엄청나게 치솟으며 석유 파동이 일어났고, 사담은 자신의 계획을 착착 진행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이라크는 중동 국가들 사이에서 전례가 없는 사회적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었다. 사담은 '문맹 퇴치운동'과 '무상교육'을 실시했고, 군인 가족을 지원하고, 무상 의료 서비스를 집행했으며, 농부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했다. 이라크는 중동에서 가장 현대화된 공공보건체계를 가진 국가가 되었고, 사담은 이 공로로 유네스코 상을 받았다.

1979년 바크르는 시리아와 이라크의 바트당원들을 통합시키는 조약을 성사시켰다. 이 일은 사담의 입지를 뒤흔들었고, 사담은 이에 대해 1979년 7월 16일 바크르를 사임시키고 공식적으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음모에 가담한 사람들을 모두 구금하고 대대적인 처형을 집행했다.

또한 사담은 이라크가 중동 지역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를 바랐다. 이라크는 1972년 소련과 협력조약을 맺었고, 무기와 수천 명의 조언자들을 얻었다. 하지만 1978년 이라크 공산당이 무너지고 서방과의 교역 문제로 이라크는 소련과의 관계를 끊었고, 1991년 걸프전 때까지 서방친화적인 정책을 추구했다.

1979년, 이웃한 이란의 샤 모하마드 레카 팔라비가 이슬람 혁명으로 퇴위하고,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슬람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사담은 이라크 국내의 시아파까지 혁명에 물들 것을 우려해 1980년에 이란을 선제공격했다. 개전 초에는 이라크가 우세했지만, 차츰 물량이나 병력이 우수한 이란이 반격해 이라크 영토에까지 침입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슬람 혁명이 중동 전역에 파급될 것을 우려한 미국은 1984년 이라크와 국교를 회복하고 거액의 무기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또한 중동의 석유를 노리던 유럽 국가들도 이슬람 혁명을 우려해 이라크에 무기 및 기타 물자들을 원조했다. 결국 1988년 이란 측이 정전을 수락하여 전쟁은 끝났다.

십 년에 걸친 전쟁은 이라크를 군사 대국으로 끌어올렸다. 전쟁이 끝난 후 사담은 누적된 외채를 해결하고자 석유가 풍부한 쿠웨이트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1990년 8월 2일 선전포고도 없이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이는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의 편을 들었던 모든 서방 국가들의 반발을 샀고, 결국 대이라크 무역 제재조치가 취해졌다. 1991년 미국을 위시한 다국적군이 쿠웨이트의 편에서 참전했고, 전쟁은 6주 만에 빠르게 종결되었다.

석유 전쟁

공중 폭격으로 인해 석유 저장 탱크가 파괴된 쿠웨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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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서방 세계에서는 후세인 정권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았고, 이란 역시 내정 문제로 이라크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이라크 내에서는 여러 민족과 종파들이 사담에게 반란을 일으켰지만 곧 진압되었고, 이라크의 경제적, 군사적 상황은 추락했으나 사담의 권력만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중동 지역의 반서방 정서에 힘입어 사담은 미국과 싸워서 살아남은 승리자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사담은 중동 지역에서 자신의 입지를 위해 이슬람교를 이용했다. 이슬람 율법 몇 가지가 재도입되었고, 국기에는 사담이 직접 쓴 "알라는 위대하시다(Allahu Akbar)"라는 말이 첨가되었다.

미국과 이라크 사이에는 긴장 관계가 조성되었다. 1993년 미국은 바그다드에 있는 이라크군 수뇌부를 향해 미사일 공격을 준비하며 이라크가 계속해서 쿠웨이트를 침공하려고 비행 금지 조항을 어기고 있다고 주장했다. UN의 제재조치가 풀리지 않아서 이라크의 경제상황은 더욱 어려워졌으며 전쟁 당시 파괴된 기반시설은 복구되지 않았다. 1996년 UN은 사담 정부에 음식과 약 구매를 위한 제한적인 석유 판매를 허용했다.

하지만 미국은 계속해서 사담이 걸프 전 종전 조약을 어기고 있으며, 대량학살용 무기를 제조 중에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1998년 12월 16일부터 19일까지 나흘 동안 미국은 사막의 여우 작전을 통해 이라크에 폭격을 퍼부었다. 이 일로 인해 이라크 내부의 소요는 더욱 심각해졌고, 사담은 공포정치에 돌입했다.

미국은 사담을 정권의 안정에 위협이 되는 사악한 독재자로 간주했고, 빌 클린턴 대통령은 사담이 이라크 내부의 정적에게 밀려나기를 바라고 제재조치를 계속했다.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엄청난 테러 사건이 일어났다.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를 이란, 북한과 함께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대량살상무기를 버리지 않으면 다시 군사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위협했다. 사담은 이에 대해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핵을 보유한 것처럼 보이게 했을 뿐 실제로는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사담 정권은 2003년 3월 20일, 미국의 공격을 받고 3주 만에 무너졌다. 미국은 공중 폭격으로 사담을 제거하고자 했으나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되었다. 4월에 미군은 이라크 대부분을 점령했고, 사담은 바그다드 외곽으로 지지자들과 함께 도망쳤다. 미군은 4월 9일 바그다드를 점령했다.

사담은 한참 동안 숨어 지냈으나 2003년 12월 14일 체포되어 바그다드 부근의 미군기지로 이송되었다. 그는 재판에서 수많은 살상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고, 2006년 12월 30일 처형되었다.

처형 후 그의 변호사가 공개한 마지막 편지에는 국민에게 보내는 글이 실려 있다. "위대한 국가와 나의 민족들, 그리고 전 인류에게. 여러분 다수가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사람이 신실하고, 정직하고, 다른 사람을 아끼고, 현명하고, 판단력이 훌륭하고, 공정하고, 단호하고, 부유한 자들에게 신중하며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품는 넓은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알 것이다. ……충실한 민중들이여, 여러분에게 작별을 고한다. 그러나 나는 신실하고 정직한 신자를 실망시키지 않으시는 자비로운 신의 곁으로 가는 것이다. ……신은 위대하시다. ……우리나라여 영원하라. 우리 분투하는 위대한 민족이여 영원하라. 이라크여 영원하라. 지하드와 무자헤딘이여 영원하라. 이라크 무장군 총사령관이자 대통령인 사담 후세인."

미국의 한 이슬람 신자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무슬림들은 사담보다 미국에 더 집중하고 있다. 사담이 틀렸을 수는 있지만 그것을 지적하고 고치는 주체가 미국일 필요는 없다."

미국의 개입 때문에 사담은 공정한 평가를 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일각에서 그가 아직까지도 영웅이고, 일각에서는 전쟁을 일으킨 범죄자이자 독재자로 비판받는 대상이다. 어느 것이 그의 진정한 모습인지는 아직까지 정확하게 알 길이 없다.

현재 사담 정권이 사라진 이라크에는 미군이 주둔하며 안정을 지키려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군을 상대로 끊임없이 테러가 일어나고 이라크인에 대한 미군의 가혹행위 문제 등 바람 잘 날이 없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사담 후세인의 잘못은 아니겠지만, 그가 이라크의 현 상황을 만들어낸 가장 큰 장본인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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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엽 집필자 소개

단국대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서 사학과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는 <이야기 그리스로마사>, <로마제국과 곡물문제>, 논문으로는 「초기 프린키파투스 체제하에서 기사신분..펼쳐보기

김지원 집필자 소개

서울대학교 및 동 대학원에서 화학생물공학을 전공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언어교육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번역서로는 『렘브란트의 유산』 『나폴레옹의 영광』 『손 안에 ..펼쳐보기

출처

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 저자김상엽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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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사담 후세인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김상엽,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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