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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히틀러

베니토 무솔리니

Benito Amilcare Andrea Mussolini
요약 테이블
출생 1883년
사망 1945년
국적 이탈리아

이탈리아 파시스트당의 당수이자 파시즘의 창시자. 최연소 총리로 당선된 후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펴서 한때 국민들의 지지를 얻으며 영웅으로 존경받았다. 제국주의의 야망을 품고 독일과 협력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었으나 연전연패를 거듭하고 결국 사살되었다.

베니토 무솔리니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1883년 7월 이탈리아 포를리 근처의 프레다피오에서 대장장이인 알렉산드로 무솔리니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혁명가로서의 그의 운명을 미리 짐작이라도 한 것일까. 무솔리니의 이름 '베니토(Benito)'는 멕시코 혁명영웅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훗날 무솔리니는 자신이 평민 출신임을 내세우며 '인민의 아들'을 자처했다.

어린 시절 무솔리니는 아버지의 대장장이 일을 도우며 시간을 보냈고 그러면서 정치적으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알레산드로는 사회주의자이자 공화주의자였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통치하에 사는 이탈리아 인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이후 무솔리니는 살레시오 수도사들이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들어갔으나 반항적이고 폭력적인 학생이었다. 그는 미사 시간에 돌을 던지고, 친구를 칼로 찌르고, 선생에게 잉크병을 던지는 등 사고만 치다가 결국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하지만 새로운 학교로 옮겨간 다음에는 좋은 성적을 받았고, 마침내 1901년 초등학교 교사 자격을 얻게 되었다.

1902년 무솔리니는 군 징집을 피하기 위해서 스위스로 이민을 갔다. 떠도는 동안 그는 니체의 철학서와 사회주의자인 빌프레도 파레토의 저서들을 접하고, 마르크스주의자인 샤를 페기의 영향을 받는다. 또한 러시아에서 정치적 망명을 한 안젤리카 바라바노프, 블라디미르 레닌 등을 만나며 마침내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1904년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이탈리아 정부는 그의 죄를 관대하게 덮어주었고, 그는 이탈리아군에 자원 입대해 군 생활을 마치고 교사로 되돌아왔다.

1908년 그는 트렌토의 노동당 서기가 되었다. 또한 〈노동자의 미래(L'Avvenire del Lavoratore)〉라는 기관지의 편집도 맡게 된다. 그 후 고향인 포를리로 가서 〈계급투쟁(La Lotta di Classe)〉을 창간했다. 이제 그는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사회주의자 중 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1911년 9월에는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의미로 리비아에서 벌어진 이탈리아 전쟁 반대 시위에 참여했으나 결국 5개월의 감옥살이로 끝났다. 풀려난 다음 해에는 사회당 기관지 〈전진!(Avanti!)〉의 편집장이 되었다. 이 기관지는 그가 편집장을 맡고 있는 동안 2만 부에서 10만 부까지 부수가 늘어났다. 그러나 1914년 10월, 무솔리니는 유럽전쟁에서 이탈리아가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당의 주장과 마찰을 일으켜 결국 편집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리고 직접 〈이탈리아 인민(Il Popolo d'Italia)〉을 창간하여 훨씬 더 날카로운 주장을 쏟아냈다. 그는 전과는 달리 이탈리아의 참전이 당연한 일이라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무솔리니는 폭발로 인해 몸에 40여 개의 파편이 박히는 중상을 입고 전역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후 "사회주의 이론은 죽었다. 남은 것은 원한뿐이다"라며 사회주의 이론을 실패한 이론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영국 정치가 사무엘 호른의 도움을 받아 정치활동을 재개했고, 1918년 무렵에는 이탈리아의 재건에 반드시 필요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1919년 3월 23일 무솔리니는 밀라노에서 퇴역군인 200여 명으로 구성된 최초의 파쇼 세력인 '전투연맹(Il Fasci Italiani di Combattimento)'을 창립했다. 이탈리아 정권 찬탈의 첫 행보였다. 파시즘은 태동 당시에도 계급갈등이나 투쟁과는 무관한 이념이었다. 곧 파시즘은 국가의 강력한 통합과 계급갈등에 대한 혐오, 그리고 로마 제국의 부흥을 염원하던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의 열띤 지지를 받게 되었다. 파시즘의 기본 원리인 엘리트에 의한 국가 지배, 계급 질서의 보호와 계급 간의 협동, 국가의 병영화, 미래의 지도자와 전사 육성 등은 플라톤의 철인정치론과 다소 유사하다. 파시즘은 당시 유사한 정치 이념이 없었기 때문에 '제3의 길'이라고도 불렸다.

파시스트의 일원이자 무솔리니의 측근이었던 디노 그란디(Dino Grandi)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예비역 병사들을 중심으로 '검은 셔츠단'을 만들었다. 검은 셔츠단은 거리 활동으로 파시즘을 선전했고, 세는 빠르게 늘어나 마침내 1921년 로마에서 '전국 파시스트당(Partito Nazionale Fascista)'이 창당되었다.

취임 연설을 하는 무솔리니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같은 해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1922년 여름, 사회당이 총파업을 선언하고 거리에 나왔다. 무솔리니는 이를 막기 위해서 나폴리에서 군중을 모아 로마로 진격했다. 결국 이 쿠데타로 총리였던 루이지 파크타가 실각했고, 같은 해 10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무솔리니를 총리로 위촉하는 전신을 보냈다. 무솔리니는 군부, 자본가, 우익의 지지를 등에 업고 총리직에 올랐다.

무솔리니는 총리가 되고 먼저 내각을 새로 구성했다. 그는 파시스트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자, 우익 세력 등 비파시스트 인사들까지 끌어들여 이탈리아 전 인민의 지지를 받는 수장이 되고자 했다. 그리고 그는 동생 아말도를 시켜 파시스트 기관지 〈인민(Il popolo)〉을 내고 파시즘을 선전했다. 그의 권위주의적 통치방식은 파업과 불안정한 사회체제에 시달리고 있던 국민들에게 대환영을 받았다.

일 년 후 무솔리니는 마침내 독재자 일 두체(Il Duce)의 지위를 합법적으로 획득했다. 그는 새로운 선거법을 통해 국가의 주권을 자신에게 귀속시켰으며, 반대 세력은 무차별적으로 진압했다. 권력을 쥔 무솔리니는 대규모 공공토목사업과 국가 주도 공업화를 통해 완전고용 수준으로 실업률을 낮추었다. 또한 이른바 '곡물 전투'를 독려하여 5,000여 개의 농장을 건립하고 폰티네 습지를 개간하여 다섯 곳의 '새 마을'을 지었다. 그 결과 농업이 곡물에 집중되어 곡물 외의 경제작물의 산출량이 줄어들게 되었다. 그는 비효율적이던 교통망을 확충하고 농민에 대한 보조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국민들은 열광했다. 유럽과 미국에서도 그가 이룩한 경제적 성과를 극찬했다.

여기에서 멈추었다면 그는 영원히 이탈리아의 영웅으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꿈이 있었다. 제국에 대한 환상이었다. 즉, 높은 출산율과 자원 고갈로 인한 이탈리아의 몰락을 방지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 무한한 영토 확장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1935년 10월, 동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유럽의 모든 국가가 이 사건에 충격을 받았으나 마땅한 제재 조치를 취하지는 못했다. 오스트리아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독일의 히틀러는 무솔리니의 아프리카 원정을 적극 고무했고, 이탈리아는 새로운 동맹 세력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처음부터 이탈리아에 불리했다. 비효율적인 데다 제대로 훈련도 받지 않은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나선 무솔리니는 연전연패했다. 그 와중에 옆에서는 독일 총통 히틀러가 세계 제국의 야심을 설파하고 있었다. 매번 패배하기만 하는 무솔리니로서는 히틀러에게 할 말이 없었다. 1940년 10월 그는 그리스를 침공했으나 실패했고, 이집트 전투에서도 영국군에게 패했다. 그리고 1941년에는 에티오피아마저 영국군에게 내주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일본의 진주만 습격을 계기로 미국이 세계대전에 정식으로 참전하게 됨에 따라 이제 세계는 연합군과 이탈리아·독일·일본 3국 간의 전쟁양상을 띠었다. 1942년, 영국의 몽고메리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에 의해 이탈리아와 독일의 연합군은 튀니지까지 후퇴했으며, 이곳에서의 대접전 끝에 이탈리아와 독일군은 100만 명에 가까운 사상자와 포로를 낸 채 몰락하고 말았다. 이제 무솔리니의 선전술은 더 이상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아 둘 수 없었다. 1943년 7월,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했다. 무솔리니는 해외 군대의 회군을 지시했고, 히틀러는 7월 19일 이탈리아 북부에서 무솔리니와 회동했다. 무솔리니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더 이상 독일의 말만 따르지는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이제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대회의조차 무솔리니의 편을 들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이 시작된 후 최초로 일 두체를 소환했고, 그 자리에서 불신임안을 가결했다. 이에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대의회는 자문기관일 뿐 자신을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고 응수했다. 다음 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무솔리니를 왕궁으로 불러 해임을 통고했고, 그는 왕궁을 나서자마자 근위대에게 체포되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무솔리니를 아브루치 산맥 부근에 구금했다. 새로 출범한 바돌리오 정부는 출범 이틀 만에 국가 파시스트당을 해산시켰고 연합국과의 휴전협상을 개시하여 1943년 9월 3일 휴전조약을 체결하였다.캄포 임페라토레의 그란사소 호텔에 연금되었던 무솔리니는 나치 독일 무장친위대의 도움으로 구출되었고, 1943년 9월 23일 살로에서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망명정부를 세웠다. 그러나 이 망명정부는 나치 독일의 이탈리아 전선 유지를 위한 명분에 불과한 괴뢰정부였다. 더 이상 무솔리니는 독자적으로 정치를 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1945년 4월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자 무솔리니는 연인 클라라 페타치와 함께 탈출을 시도했지만, 이탈리아 파르티잔에 발각되어 다음 날 총살당했다. 파시즘을 창안했고, 한때 이탈리아 온 시민의 존경을 받던 일 두체의 마지막은 이렇게 비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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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엽 집필자 소개

단국대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서 사학과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는 <이야기 그리스로마사>, <로마제국과 곡물문제>, 논문으로는 「초기 프린키파투스 체제하에서 기사신분..펼쳐보기

김지원 집필자 소개

서울대학교 및 동 대학원에서 화학생물공학을 전공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언어교육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번역서로는 『렘브란트의 유산』 『나폴레옹의 영광』 『손 안에 ..펼쳐보기

출처

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 저자김상엽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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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베니토 무솔리니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김상엽,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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