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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독립의 아버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Mustafa Kemal Ataturk
요약 테이블
출생 1881년
사망 1938년
국적 터키

터키 공화국의 창시자, 초대 대통령.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장군으로 활약했고, 특히 그리스의 아나톨리아 침공에 맞서 침략을 막아냈다. 이후 로잔 조약을 체결하여 터키를 공화국으로 독립시켰다. 칼리프제를 폐지하고 남녀평등을 이루었으며 여성에게도 선거권을 부여했다.

아타튀르크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아타튀르크라는 이름은 '튀르크 인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터키가 패배한 후 영국·프랑스·러시아의 3국 동맹에 대항해 터키를 해방시킨 인물이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1881년 오스만 제국하에 있던 그리스 살로니카에서 '무스타파'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재학 중에 아버지가 죽자 시골로 내려갔다가 살로니카로 돌아온 무스타파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1893년 군사중등학교 시험을 쳤다. 이 학교에서 그의 수학적 재능을 칭찬해주던 한 교사가 그에게 케말('성숙' 혹은 '완전'이라는 뜻)이라는 두 번째 이름을 붙여주었다. 1896년 그는 모나스티르에 있는 군사고등학교에 진학했고, 1899년에 이스탄불의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1902년에 졸업하고 참모대학으로 진학했다.

1905년 육군대위로 대학을 마친 그는 다마스쿠스의 기병연대에 배속되었다. 1908년 그는 청년터키당이 압둘아미드 2세에게서 정권을 탈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1911년에는 이탈리아-터키 전쟁에 참전했다. 1912년 발칸 전쟁이 터지자 수도로 돌아왔고, 제1차 발칸 전쟁 때 갈리폴리 반도의 방어 책임을 맡았다. 1913년 그는 소피아에 대사관 소속 무관으로 부임했고, 1914년에는 중령으로 진급했다.

1914년, 오스만 제국이 동맹국의 편을 들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케말은 19사단을 조직하고 지휘할 책임을 맡았고, 갈리폴리 전투에 참전하게 되었다. 그는 최전선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었으며 1916년까지 에디르네에 주둔했다. 그 후 제16군의 지휘를 맡아 캅카스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고, 그의 부대는 러시아군에 두 번이나 패했다. 1917년 3월 케말은 16군에서 제2육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마침 러시아 혁명이 벌어지며 캅카스 전선의 차르군이 해산되었다. 그는 제7육군 사령관으로 시나이와 팔레스타인 전쟁에 참전했다가 1918년 8월 28일 알레포로 돌아왔고, 요르단까지 후퇴해서 영국군에 대항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 후 무드로스 휴전협정이 맺어졌다.

케말의 마지막 임무는 전선 남쪽에 남아 있던 군사들을 이끌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는 1918년 11월 13일 점령당한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로 돌아왔다. 오스만 제국 분할을 결정한 영국·이탈리아·프랑스·그리스군은 아나톨리아까지 점령했다. 이로 인해 터키에서는 민족운동과 독립전쟁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스탄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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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와 그의 지지자들은 터키를 영국의 보호 아래 두고자 생각하고 있었고, 이에 대항하여 터키의 저명한 언론인과 지식인들은 터키를 미국의 위임통치령 아래 두기 위한 선전 전략을 펴고 있었다. 그러나 케말은 자국의 경계 안에 사는 독립된 튀르크 민족을 오랫동안 구상하고 있었으며, 터키가 새로운 투쟁에 임한다면 이 안이 성취될 수 있다고 믿었다.

케말은 남은 오스만 군대와 민족주의 단체들의 해산을 감독할 감독관으로 임명되며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할 기회를 잡았다. 1919년 5월 19일 삼순에 도착한 그는 열강들을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할 저항조직을 창설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나라의 독립이 위태롭다는 사실을 알리고 군대와 사람들의 참여를 호소했다. 7월 8일에 군에서의 지위를 사임한 그는 9월 4일 시바스의 민족의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오스만 정부는 그의 행동을 반역으로 규정하고 체포령을 내렸다.

케말은 새로운 터키 의회를 만들기 위해 선거를 요구했고, 1920년 2월 12일 최후의 오스만 의회가 소집되었다. 그의 지지자들은 여기에서 터키의 독립을 주장했으나 이런 변화의 조짐들에 당황한 영국은 1920년 3월 16일 공식적으로 이스탄불을 점령하고 하원을 해산했다.

케말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새로운 하원의원을 선출한 후 4월 23일 앙카라에서 터키대민족의회(GNA)를 개원하고 의장에 선출되었다. 1920년 8월 10일, 오스만의 페리드 파샤가 세브르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오스만 제국의 분할계획이 최종화되었다. 그는 완전한 독립과 터키 땅에서 터키 다수 민족의 이익을 수호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GNA에 국민군을 모집하자고 제안했고, 국민군과 점령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1921년 8월 케말은 총지휘관이 되었고, 사카리아 전투에서 그리스군이 패배했다. 1922년 8월 케말은 그리스군에 총공격을 퍼부었고, 그해 9월 스미르나를 되찾았다. 10월에 그는 국제연맹에 전보를 보내 앙카라 정부는 대학살에 책임이 없다고 명시했다.

11월 21일 로잔 회담이 개최되었다. 터키 대표 이스멧 이뇌뉘는 터키의 주권을 침해하는 어떤 제안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결국 1923년 7월 24일 로잔 조약이 체결되었고, 그 결과 1923년 10월 29일에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로잔 조약 체결 후 실시된 총선에서 그는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터키의 독립전쟁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여 연합국이 제국을 분리하려 하자 반발한 터키 민족주의자들은 정치적·군사적 저항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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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말이 가장 기본으로 여긴 정치적 신념은 나라의 완전한 독립이었다. 그는 독립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완전한 독립이라는 것은 물론 경제적, 재정적, 사법적, 군사적, 문화적 분야 등 전 분야의 독립과 자유를 말한다. 이 중 어떤 것이라도 독립을 잃는 것은 나라 전체의 독립을 잃는 것과 같다." 그는 사회, 문화, 경제적 분야에서 광범위한 개혁을 시행했다. 또한 종교적이었던 동양식 의복을 유럽식으로 바꾸고, 사회체제와 문화 역시 유럽식 형태를 도입했다. 그 결과 새 공화국의 법률, 사법, 경제적 체제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이 중에서 특히 케말이 중요하게 여긴 것은 칼리프제의 폐지였다. 칼리프제는 수니파 이슬람의 핵심적인 정치 개념이었으나 공화국체제에서 정치적 수장인 칼리프가 따로 존재한다는 것은 권력의 분산을 의미했다. 게다가 칼리프라는 이름하에 군주제가 되살아날 수도 있는 가능성도 존재했다. 결국 1924년 1월 1일, 그는 칼리프제를 공식적으로 폐지했다. 그는 "이슬람이라는 종교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지 않을 때 더욱 순수해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그의 개혁에 반발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쿠르드 족 족장인 셰이크 사이드 피란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칼리프제 폐지를 반대하고, 유럽식 문화 도입과 종교적 지침을 무시하고 일부다처제를 금지하는 법률 역시 반대했다. 피란은 이슬람 율법을 되살리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고, 정부는 이를 반혁명으로 규정하여 즉각 군사력을 동원해 반란을 진압했다. 정부는 이런 모든 종류의 반란에 대해 조금의 자비도 보이지 않았고, 1929년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법안〉을 통과시켜 반란에 대한 무력 사용을 법제화했다.

아타튀르크는 "집안도 평화롭게, 세계도 평화롭게"라는 자신의 주장대로 국내정책과 외교정책 모두 일관되게 진행했다. 문명화와 현대화라는 그의 개혁 역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터키의 독립전쟁을 마지막으로 케말은 군사력을 사용하는 것을 그만두었고, 대통령 임기 내내 외교에 있어서 평화정책을 사용하여 노력했다.

1931년 케말에는 터키 역사협회를 만들어 터키의 역사에 대한 연구에도 박차를 가했다. 또한 교육을 발전시켜야 여러 영역에서 계속적으로 자국의 문화를 발전시키는 노력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 1928년 터키 교육협회를 설립했다. 협회는 어린이들에게 교육 비용 등 경제 지원과 교육에 필요한 과학적 연구를 하는 일을 맡았다. 1933년에는 이스탄불 대학을 현대적인 학교로 재조직했고, 후에 수도에 앙카라 대학을 세웠다. 그는 특히 과학 연구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종교가 아닌 과학이야말로 나라를 현대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분야라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남녀평등을 주장하면서 1934년에는 여성에게 완벽한 참정권을 보장했다. 터키 시민법을 만들 때 혼인 관계에서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권리를 인정한 케말은 여성을 모든 면에서 남성과 동일한 위치까지 올려놓은 것이다. "여성을 정치적으로 고립시켜야 할 논리적인 이유가 전혀 없다. 이 문제에 대한 거부감은 과거의 사회적 유물에 불과하다. 여성은 투표를 하고 선거에 나갈 권리가 있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여성이 사회적으로 행해야 하는 의무가 존재하므로 여성의 이득 또한 보장되어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쉽지 않았지만, 최소한 1935년 선거에서 여성 의원 18명이 선출되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었다.

케말은 1938년 11월 10일 5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많은 개혁을 하려고 했으나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일부밖에 없고 소수의 부유층을 위한 개혁을 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게다가 세속주의를 추구하여 독실한 이슬람 신자들은 그의 태도를 혐오하기도 했으나 많은 터키 사람들이 아직까지 그를 독립영웅이자 국가의 아버지로 추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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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엽 집필자 소개

단국대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서 사학과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는 <이야기 그리스로마사>, <로마제국과 곡물문제>, 논문으로는 「초기 프린키파투스 체제하에서 기사신분..펼쳐보기

김지원 집필자 소개

서울대학교 및 동 대학원에서 화학생물공학을 전공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언어교육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번역서로는 『렘브란트의 유산』 『나폴레옹의 영광』 『손 안에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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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 저자김상엽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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