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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를 지배한 강철의 사나이

이오시프 스탈린

Ioseb Dzhugashvili
요약 테이블
출생 1879년
사망 1953년
본명 이오세프 주가슈빌리인 이오시프 스탈린
국적 소련

1922년부터 1953년까지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지냈고, 1941년부터 1953년까지 소련 국가평의회 주석을 지냈다. 소련을 공업화하고, 농업을 강제로 집단화했으며, 철저한 경찰 테러에 의해 그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또한 동유럽 전체를 소련의 지배하에 두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패망에 크게 기여했으나 이후 영국·미국과의 협력체제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고 동서 냉전의 시작을 만들었다.

스탈린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가난한 술주정뱅이의 아들로 태어나 러시아의 지배자가 된 사람, 지금까지도 그 이름을 세계사에 올려놓고 있는 사람, 죽어서도 신처럼 여겨졌던 그가 소련에 부는 개혁의 바람으로 몰락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전 세계인들은 '역사가 내리는 비정한 판결'에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본명이 이오세프 주가슈빌리인 이오시프 스탈린은 1879년 그루지야의 고리에서 태어났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1899년 신학교에서 쫓겨난 스탈린은 레닌의 저서를 읽고 마르크스주의 혁명론에 깊은 감화를 받게 된다. 그리고 1903년 볼셰비키에 입당하고, 곧 차르의 비밀경찰인 오흐란카(Okhranka)에 위험인물로 찍히게 되었다. 그는 캅카스 지역의 볼셰비키 우두머리가 되어 준군사조직을 만들어 파업을 주도하거나 공산주의를 퍼뜨렸는데, 자금은 은행강도, 납치, 강탈 등으로 마련했다. 그러던 중 1907년 6월 25일에 당 운영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은행의 현금수송차를 탈취하다 40명이 죽는 사건이 벌어져 잠시 당을 떠나 바쿠에 몸을 숨기게 된다.

그는 평생 일곱 번이나 시베리아로 유형을 갔지만, 대부분 도망쳐서 돌아오곤 했다. 1912년 2월, 레닌은 그를 멘셰비키파와 최종적으로 결별한 볼셰비키당의 제1차 중앙위원회에 신입 위원으로 선출했다. 이 무렵부터 그는 러시아 어로 '강철'을 뜻하는 '스탈(Stal)'에서 딴 스탈린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이 활동으로 다시 유형을 떠난 그는 1917년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왔고, 11월 7일 레닌 및 다른 중앙위원회 위원들과 케렌스키 정부에 대해 쿠테타를 일으켰다. 이것이 10월 혁명이다. 11월 8일, 그들은 겨울궁전에 진입하여 케렌스키 내각을 전원 체포했다. 볼셰비키는 곧 폴란드-소련 전쟁을 일으켰는데, 여기서 폴란드가 점령하고 있는 르비프를 탈환하고자 하는 스탈린과 바르샤바를 우선시하는 레닌·트로츠키의 충돌이 일어났다. 결국 두 도시 모두 탈환하지 못한 볼셰비키는 스탈린에게 책임을 물었고, 그는 1920년 모스크바로 돌아와 장교직을 사임한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을 공공연하게 비난했다.

하지만 1921년 스탈린은 붉은군대가 그루지야를 공격할 때 강경노선을 취하며 독보적으로 두각을 드러낸다. 그는 그루지야 반란을 진압하자, 레닌은 그에게 트로츠키 대신 공산당 서기장 지위를 약속했다. 트로츠키와 달리 당에서 일반적인 조직 업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정치국 위원과 여러 위원회의 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트로츠키가 산업 분야에 집중하고 있을 때 실질적인 직위들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스탈린의 정치 선전 포스터

'위대한 스탈린의 지도하에 공산주의로!'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사실 레닌은 그루지야에 대한 스탈린의 강경책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고, 스탈린의 무례한 태도와 권력욕, 야심을 비난하며 서기장 자리를 사임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 등과 연합하여 트로츠키를 축출하고, 레닌의 사후 트로츠키를 후계자로 삼는다는 유서를 없애버렸다. 그의 지위는 레닌 사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 즉 소련이 탄생하고 그가 공산당 서기장으로 정권을 잡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신장되기 시작했다.

러시아 내전과 전쟁으로 인해서 국가 경제는 엉망진창인 상태였다. 1922년의 사업 생산량은 1914년의 13퍼센트 수준이었다. 이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정부는 신경제정책을 도입하여 사회주의의 테두리 내에서 유연한 시장 상황을 만들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를 뒤엎고 1928년 모든 산업을 국영화하는 '5개년 계획'을 도입했다. 이는 야심 찬 국가주도적 산업계획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공산주의 정책에 대한 국제적인 반응이 좋지 않아 자본도 없고, 무역도 거의 하지 않는 데다 현대적인 기반시설조차 없었다. 때문에 스탈린 정부는 소련 시민들의 소비를 제한하여 이를 다시 산업에 투자하고, 쿨라크(kulak)라는 부농층의 돈을 강탈해서 산업화에 필요한 자본을 만들어냈다. 또한 농민들을 집단농장으로 끌고 가서 강제노동을 시키고, 식량을 해외에 수출하여 자본금을 만들었다.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에 대기근이 발생하기도 했다.

1933년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은 1926년의 10분의 1로 떨어졌다. 노동수용소의 죄수들은 정치범이든 일반 강도든 할 것 없이 무급 노동을 강요받았고, 공산주의자들과 공산청년동맹 당원들은 여러 가지 건설계획을 진행시켰다. 외국인 전문가들을 불러들여 새 공장을 짓고, 건설을 감독하고, 일꾼들을 부리고, 제조 과정을 개선했다.

처음 두 번의 5개년 계획은 낮은 경제적 기반에서도 놀랄 만큼 빠른 산업화를 이룩해냈다. 그러나 정확한 성장 수치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으며, 이 경제성장은 수백만 명의 목숨을 바탕으로 했기에 비난을 받아왔다. 게다가 소련의 성장률은 스탈린의 사후 일시적이지만 훨씬 빠르게 치솟았다. 확실한 것은 5개년 계획이 뒷걸음질치고 있던 소련의 경제를 현대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물품이 개발되었고, 생산품의 규모와 질이 훨씬 증가했다. 기술적인 발전도 잇따랐으며 외국의 기술을 수입해오기도 했다. 대가가 어찌 되었든 이 덕택에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정치국 수장이자 흔들림 없는 권력을 움켜쥔 스탈린은 대숙청에 착수했다. 대상은 공산정부에 반대하는 반체제인사나 정부의 전복을 기도한 혁명당원들이 아니라 공산당의 주요 간부들이었다. 스탈린은 자신의 독재정권을 위협할 만한 여지가 있는 인물을 가차 없이 숙청했다. 그는 '기회주의자'들이나 '혁명에 반대하는 첩자들'을 없앤다는 명분으로 노동수용소로 보내거나 처형했다. 그 후 몇 년간 스탈린의 권위에 도전할 만한 사람뿐만 아니라 예술계, 학계, 법조계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히틀러와 스탈린

히틀러는 러시아와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어 유럽 세계를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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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스탈린은 처음에 영국 및 프랑스와 대독일 전선을 형성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1939년 히틀러와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1941년 6월 22일, 히틀러는 조약을 깨고 바르바로사 작전을 시작했고, 소련 동부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스탈린은 첩자들을 통해 독일이 조약을 깨리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독일이 영국을 점령한 다음 소련으로 화살을 돌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기 대응이 늦어졌다. 1941년 말, 소련은 430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 독일군은 1,690킬로미터나 소련 영토 안으로 밀고 들어온 상태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곧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하여 1942년 겨울 스탈린그라드에서 대승을 거두고 다음 해 쿠르스크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1943년 말이 되자 소련은 잃었던 영토를 전부 되찾았고 소련의 군수산업도 덕택에 빠르게 발전했다.

전쟁 후반에 스탈린은 영국의 처칠과 미국의 루스벨트를 만나 회담을 했고, 전후 유럽의 재편에 대해서 논의했다. 1945년 얄타 회담에서 스탈린은 동유럽 국가들의 지배권을 요구했고, 폴란드 역시 소련에서 만드는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영국과 미국은 해방된 각 소국에서 자국이 원하는 정부를 세울 수 있도록 한다는 데 동의했다. 스탈린 역시 겉으로는 동의했으나 결국은 동유럽 각국에 소련에 종속되는 꼭두각시 정부를 세웠다. 포츠담 회담에서 그는 각국 수뇌들에게 뛰어난 협상가라는 평가를 얻었고, 자신이 원하던 거의 모든 것을 얻어냈다.

붉은 광장은 소련 정치의 중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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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소련은 동부와 중부 유럽까지 차지하게 되었고, 그보다 더 서쪽으로는 가지 못했다. 처칠은 모스크바가 '철의 장막'으로 덮여 있다고 묘사했다. 이제 세상은 세계대전의 시절을 넘어 동서 냉전의 시기로 들어선 것이었다.

스탈린은 1953년 3월 5일 크렘린 궁에서 죽었고, 레닌과 함께 붉은 광장에 있는 무덤에 묻혔다. 그가 소련의 생산성을 끌어올린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일반 시민이 이용할 수 있는 물품은 하나도 생산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다. 군비와 경찰기구 유지비에 수많은 돈을 쏟아 붓던 스탈린 체제가 아닌 다른 체제가 들어섰다 해도 당시 그 정도의 공업화는 충분히 해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의 관료제도는 이후로 소련의 행정체제에 깊숙이 뿌리를 박았으나 이것은 제도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스탈린의 독재정치가 러시아 인들의 머릿속에 깊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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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엽 집필자 소개

단국대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서 사학과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는 <이야기 그리스로마사>, <로마제국과 곡물문제>, 논문으로는 「초기 프린키파투스 체제하에서 기사신분..펼쳐보기

김지원 집필자 소개

서울대학교 및 동 대학원에서 화학생물공학을 전공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언어교육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번역서로는 『렘브란트의 유산』 『나폴레옹의 영광』 『손 안에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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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 저자김상엽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역사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다! 진시황제, 카이사르, 다 빈치, 갈릴레오, 링컨, 간디, 체 게바라, 마더 테레사 등 고대 영웅부터 현대의 성녀까지 100인으로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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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이오시프 스탈린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김상엽,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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