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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인 100
인 노동자여 단결하라
카를 마르크스
Karl Heinrich Marx출생 | 181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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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83년 |
본명 | 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 |
국적 | 독일 |
대표작 | 《1844년의 경제학-철학 초고》, 〈공산당 선언〉, 《자본론》 등 |
독일의 혁명가, 철학자. 과학적 사회주의를 창시자했다. 1847년 공산주의자 동맹을 창건했다. 1847년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공동 집필해 이듬해 2월에 〈공산당 선언〉을 발표하고, 1867년 《자본론》을 출간했다. 그의 철학은 혁명적 노동운동과 현실 사회주의의 건설로 이어졌으며,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에 의해 더욱 발전되어 전 세계 공산당과 노동자 정당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프로이센의 라인 주 트리어 시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본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다가 베를린으로 옮겨 역사와 철학에 몰두했고, 1841년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에 대한 논문으로 예나 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베를린에서 마르크스는 헤겔에게서 혁명의 방안을 찾는 좌익헤겔학파, 혹은 청년헤겔학파와 교류했다. 그리고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1836년 《기독교의 본질》을 비롯한 좌익헤겔학파의 그리스도교 비판을 통해 헤겔의 관념주의적 철학에서 유물론으로 전향하게 되었다.
1842년 10월 15일 마르크스는 〈라인 신문〉의 주필이 되었고, 베를린 빈민의 주택 문제부터 농민들의 산림 벌채와 새로운 공산주의 현상에 이르기까지 경제·사회 문제에 관한 수많은 논설을 집필했다. 그러나 헤겔의 관념론은 이러한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고,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계급에 충격을 가하는 것만으로 사회활동이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믿는 헤겔파 동료들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결혼 후 파리로 이주했다. 당시 파리에서는 사회주의 세력과 보다 급진적인 공산주의 혁명운동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혁명가가 된 마르크스는 프랑스와 독일 노동자들의 공산주의 조직들과 관계를 가지기 시작했다. 사상은 조잡하고 무지했지만, 그들의 인성은 그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1844년의 경제학-철학 초고》에서 그는 "형제애는 그들에게 있어서 단순한 구호만이 아니라 삶의 진실이다. 노동으로 단련된 그들의 육체는 우리에게 인간의 고귀함을 일깨워준다"라고 썼다.
《독일-프랑스 연보》가 해마다 출판을 거듭하는 사이에 마르크스와 기고가였던 프리드리히 엥겔스와의 관계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부유한 공장주의 아들로 헤겔의 추종자이기도 했던 엥겔스는 마르크스와 처음 대면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모든 이념과 행동을 같이 한 마르크스의 친구이자 동지였다.
그해 6월 런던에서 독일계 이민 수공업자들로 구성된 의인동맹(義人同盟)이 회합을 가지고 마르크스에게 참여를 요청했다. 그는 엥겔스와 동맹에 가입하고 '공산주의자 동맹'으로 명칭을 변경한 의인동맹의 정강 작성을 위임받았다. 엥겔스와 함께 작업한 〈공산당 선언〉은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정의하고, 계급 사회는 프롤레타리아 투쟁을 통해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1848년 초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에서 혁명이 촉발되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무력으로 조국을 해방시키자는 게오르크 헤르베크의 주장에 반대했고, 노동자 계급이 민주적 부르주아와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의회에 대표를 파견하는 데 반대하고, 노동자 동맹 지도자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노선에 제동을 걸었다.
1849년 6월 카를 마르크스는 〈신(新) 라인 신문〉을 통해 입헌적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러시아와 개전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1848년 노동자동맹의 급진파 지도자 안드레아스 고트샬크가 체포되자 그를 대신해 라인란트 민주의회를 창설했고, 프로이센 의회가 해산되자 무기와 병력을 끌어 모아 지하 저항운동을 도왔다.
이에 따라 〈신 라인 신문〉에 대한 후원이 중단되었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납세 거부운동을 조장했다는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다. 법정에서 배심원단은 그를 방면했으나, 1849년 5월 추방령이 내려져 파리에서 추방당했다. 그해 8월 그는 런던으로 향했고, 런던은 그의 마지막 정착지가 되었다.
1850년부터 1864년까지 마르크스는 물질적인 궁핍과 정신적인 고통 속에서 살았다. 힘든 시기에 엥겔스는 마르크스에게 재정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와의 우정을 자랑으로 여겼고 그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용납하지 않았다.
1864년 제1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이 창설되었고, 마르크스의 정치적 고립도 끝났다. 그가 초안을 작성한 〈제1인터내셔널 선언 및 잠정 규약〉은 입법 투쟁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영국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경우 정치적 힘을 쌓아나간다면 장차 국가 권력을 획득할 수도 있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이 무렵에 탄생한 것이 그의 최대의 걸작 《자본론》이다. 이 책은 1867년 1권이 완성되었고, 2권은 그의 사후 친구인 엥겔스가 마르크스가 남긴 자료들을 집대성해 완성했다.
그렇다면 《자본론》에 담긴 마르크스의 기본 이념은 무엇일까? 먼저 지목할 것은 '유물론(唯物論)'이다. 이는 한 마디로 "모든 역사는 이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경제적 요인에 의해 특징지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애국심이나 종교, 예술 등은 단순히 껍데기 같이 허망하며, 역사의 발전 방향을 결정짓고 나아가게 하는 것은 오직 경제적 요인이라고 말했다.
두 번째로 '변증법적 역사관'을 들 수 있다. 그는 역사의 발전을 사회 계급 간의 투쟁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산업혁명 이후 형성된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간의 투쟁을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 간의 투쟁으로 간주하고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에게 대항하기 위해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 번째는 '잉여가치설'이다. 그는 노동만이 새로운 경제적 가치를 창출해낼 힘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이런 노동자들의 노력에 대해 온전한 보상을 해주지 못하며, 자본주의하에서 노동자들은 더욱 착취당하고 점점 더 빈곤해질 뿐이라고 비판했다.
네 번째로 그는 프롤레타리아가 봉기하여 부르주아 계급을 타도함으로써 계급 없는 사회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사유재산과 계급의 개념이 사라지면 지상의 낙원이 도래하리라고 말했다. 즉, 인류 역사의 완성은 교육이나 이념이 아닌 오직 충돌과 투쟁에 의해서만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의 사상은 사회를 인식하고 변혁하는 무기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혁명적 노동운동과 현실 사회주의의 건설로 이어졌으며, 레닌에 의해 더욱 발전되어 전 세계 공산당과 노동자 정당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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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다! 진시황제, 카이사르, 다 빈치, 갈릴레오, 링컨, 간디, 체 게바라, 마더 테레사 등 고대 영웅부터 현대의 성녀까지 100인으로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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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카를 마르크스 – 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김상엽,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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