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세계사를 움
직인 100
최초의 세계일주를 시도하다

페르디난드 마젤란

Ferdinand Magellan
요약 테이블
출생 1480년
사망 1521년
국적 포르투갈

포르투갈의 항해가로 처음으로 세계일주를 시도했다. 포르투갈 출신이지만 에스파냐 왕의 후원으로 세계 항해길에 올라 마젤란 해협을 발견하고 태평양을 건넜다. 필리핀 섬 원주민들에 의해 불의의 죽음을 당해 세계일주를 끝마치지 못했다. 그의 사후 나머지 선원들이 항해를 계속하여 세계일주에 성공했다. 이로써 지구는 둥글다는 것이 입증되었으며 아메리카와 아시아가 별개의 대륙이었다는 점이 명백히 밝혀졌다.

마젤란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에스파냐 국왕의 후원을 받아 세계일주에 나선 최초의 항해가이다. 그는 포르투갈의 폰테 다 발카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콜럼버스와 《동방견문록》을 쓴 마르코 폴로를 존경했고 세계 탐험에 아낌없는 노력을 했던 엔리케 왕자를 숭배했다. 그는 인도항로 개척에 성공하고 귀환한 바스코 다 가마를 보며 자신도 언젠가는 세계 탐험의 길에 오르리라 다짐했다.

그는 1505년 포르투갈 최초로 동방에 간 프란시스코 데 알메이다의 함대에 입대했다. 3월 24일 알메이다 원정대는 마누엘 왕의 명으로 아프리카와 인도 지역의 이슬람 해군 세력을 파악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마젤란은 인도 말라바르 해안에서 벌어진 칸나노레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지만 이때의 경험으로 항해술을 익히고 많은 항해 지식을 얻었다.

또한 알메이다의 함대로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동부 해안과 인도 서부 해안에 대한 이슬람의 해상 세력을 물리쳤다. 그리고 1511년 6월 말, 마젤란은 알부케르케 휘하의 함대에서 말라카 전투에 참가해 그곳을 함락시켰다. 이로써 아랍인들에게서 해상무역의 거점을 빼앗는 함대의 임무가 완수되었다.

마젤란은 그 후에도 1513년 아자모르의 모로코 요소 점령작전에 참가했다. 이 전투에서 그는 부상을 입어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다. 제대한 마젤란은 마누엘 1세를 찾아가 연금을 신청했으나 거절당하고 그 길로 조국 포르투갈을 떠났다. 그가 향한 곳은 에스파냐였다.

향신료를 수확하는 원주민들

마젤란의 세계일주의 목적 중 하나는 향신료를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유럽인들의 세계 식민지화가 시작되었다.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1517년 에스파냐는 필리핀 제도의 남쪽에 있는 향료제도에 선단을 보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마젤란은 에스파냐에서 만난 루이 팔레이로와 함께 에스파냐 국왕 카를로스 1세를 알현하고 그 자리에서 자신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동인도 함대에 배속되어 있을 때 향료제도에 가본 적이 있었던 마젤란은 이 제도가 스페인령에 속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포르투갈이 장악하고 있는 희망봉 항로를 경유하지 않고, 아메리카 대륙을 돌아 향료제도까지 갈 수 있다면 막대한 이익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 주 남서쪽 끝을 이루는 암석 곶

1497년 바스코 다 가마가 이 곶을 통과하여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했다.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카를로스 1세는 1518년 3월 마젤란과 함께 항해계획을 수립한 팔레이로와 다음과 같은 계약을 체결했다. "발견될 나라에서 얻은 수입의 20분의 1을 마젤란과 팔레이로에게 주며, 6개 이상의 섬을 발견할 경우에는 2개 섬에 대한 특별권을 인정한다. 콜럼버스와 맺은 계약과 마찬가지로 발견된 모든 육지와 섬들에서 귀족이나 총독의 지위를 당사자와 그 자손들에게 세습할 것을 인정한다."

1519년 9월, 마젤란을 사령관으로 한 5척의 범선이 270여 명의 선원을 태우고 당당히 세비야 항을 출발했다. 이들은 서쪽으로 항로를 잡고 목적지인 몰루카 섬을 향해 돛을 올렸다.

지중해를 빠져나온 배는 빠르게 아프리카 서해안의 남쪽으로 항해해 나갔고, 아프리카의 서쪽 끝 베르데 곶에서부터 진로를 서남쪽으로 틀어 남대서양을 가로질러 나갔다.

항해에 나선 지 3개월 만인 11월에는 브라질에, 12월에는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했다. 다음 해 1월에는 남위 34도 부근에 있는 곳까지 다다랐고, 2월에는 산마티아스 만에 도달했다. 몇 명의 선원들이 주변을 탐색하려 뭍에 올랐다. 그러나 뭍에 내렸던 선원 중 로드리고가 갑자기 나타난 식인종들에게 잡혀 돌아오지 못했다. 마젤란 항해의 첫 희생자는 이렇게 발생했다.

원정대가 남위 48도 부근까지 내려가자 참을 수 없는 혹한이 밀어닥쳤다. 원정대는 하는 수 없이 근처에 배를 정박시키고 겨울을 나야만 했다. 여행을 떠난 지 벌써 반 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선원들은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선원들 중에는 마젤란의 계획이 지나치게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급기야는 선원의 일부가 스페인으로 돌아가자며 반란을 일으켰다. 5척 중 3척의 배가 반란군에 점령당했다. 마젤란은 반란군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는 척하며 기습하여 곧 반란을 평정했다. 반란을 주도했던 케사이더 선장은 참수당했고 몇몇 선원들은 무인도에 버려지는 참혹한 형벌을 받아야 했다.

다섯 달 동안이나 정박해 있던 마젤란은 8월에 다시 항해길에 올랐다. 11월에는 남위 52도까지 내려와 그곳에서 커다란 곶과 깊은 만을 발견했다. 이 해협에 마젤란은 '파타고니아 해협'이라고 이름 붙였고, 훗날 이 곶은 '마젤란 해협'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11월 28일, 수많은 고생 끝에 마젤란 해협을 돌아 그들은 드디어 드넓은 대양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는 이곳을 '태평양'이라고 불렀다.

마젤란의 빅토리아 호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12월 21일, 원정대는 진로를 북서쪽으로 바꾸어 드넓은 태평양을 가로질러 몰루카 섬으로 향했다. 가도 가도 끝없는 바다,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식량과 물이 바닥나기 시작하고 배에는 돌림병이 돌기 시작했다. 2월에 적도를 통과했으나 아무리 가도 육지는 나오지 않았다. 배 위의 사정은 급기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악화되었다. 괴혈병으로 목숨을 잃는 선원의 숫자가 눈에 띄게 늘어갔고 갑판 위는 신음하는 선원들로 가득 찼다.

1521년 3월 6일, 바다를 가로질러 달린 지 99일 만에 그들은 괌에 도달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새롭게 찾은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였다. 괌에서 그들은 병든 선원들을 치료하고, 물과 식량도 새롭게 보충했다.

원기를 보충한 마젤란과 선원들은 다시 3월 16일 필리핀 군도의 사마르 섬에 도착했으며 인근 섬의 추장들을 차례로 만났다. 추장들 중에는 마젤란에게 우호적인 사람도 있었으나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일부 추장들은 마젤란의 권유에 따라 기독교로 개종하는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

마젤란에 대항한 추장 중 가장 막강한 힘을 갖고 있던 사람은 시라푸랏프 추장이었다. 그는 마젤란에게 반대하는 세력을 규합하여 막탄 섬에 집결시켰다. 마젤란은 무장한 선원들을 대동하고 막탄 섬에 상륙해 무력으로 이들을 진압하고자 했다. 그러나 마젤란의 선원들은 그들에게 이길 수 없었고, 결국 마젤란은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사령관을 잃은 에스파냐 선원들은 뱃머리를 돌려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새로운 사령관을 뽑아 항해를 계속했다. 그해 11월 8일, 항해를 떠난 지 무려 2년 1개월 만에 그들은 목적지인 몰루카 섬에 도달했다.

12월 17일, 목적을 이룬 탐험대는 조국 에스파냐를 향해 다시 돛을 올렸다.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1522년 9월 7일이었다. 항해를 떠난 지 3년 28일 만에 세계일주에 성공한 것이다. 3년 전 마젤란을 포함하여 270여 명이 이 항구를 출발했지만 살아서 돌아온 인원은 불과 17명의 유럽 인과 4명의 인도인뿐이었다.

마젤란의 업적은 대담한 발상으로 최초의 세계일주 항해를 훌륭하게 이끌었다는 데 있다. 그는 또 태평양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횡단한 최초의 항해가였다. 그 항해의 결과로 마젤란은 당시 신대륙에서 단 며칠만 서쪽으로 항해하면 동인도에 도착할 것이라던 생각을 입증하고 3개월 이상 걸린 항해 끝에 대륙을 횡단하는 데 성공했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김상엽 집필자 소개

단국대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서 사학과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는 <이야기 그리스로마사>, <로마제국과 곡물문제>, 논문으로는 「초기 프린키파투스 체제하에서 기사신분..펼쳐보기

김지원 집필자 소개

서울대학교 및 동 대학원에서 화학생물공학을 전공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언어교육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번역서로는 『렘브란트의 유산』 『나폴레옹의 영광』 『손 안에 ..펼쳐보기

출처

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 저자김상엽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역사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다! 진시황제, 카이사르, 다 빈치, 갈릴레오, 링컨, 간디, 체 게바라, 마더 테레사 등 고대 영웅부터 현대의 성녀까지 100인으로 ..펼쳐보기

전체목차
6. 서양의 근대, 15세기 중엽 ~ 20세기 초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다비드 상을 사랑한 조각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최초의 세계일주를 시도하다, 페르디난드 마젤란 종교개혁의 출발 신호, 마르틴 루터 신대륙에 제국주의를 불러온 피의 학살자, 에르난 코르테스 국가와 결혼한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 1세 영국이 사랑한 최고의 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 망원경으로 지동설을 증명하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17세기가 낳은 최고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 공화국을 수립한 청교도, 올리버 크롬웰 유럽 절대왕정의 상징, 루이 14세 현대 과학의 아버지, 아이작 뉴턴 러시아 개혁의 일인자, 표트르 대제 음악의 어머니,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당대에 인정받지 못했던 음악의 아버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순수이성비판》을 쓴 멋쟁이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 벌거숭이 군대로 얻은 미국의 독립, 조지 워싱턴 기계 수리공이 만든 증기의 기적, 제임스 와트 독일 문학의 상징,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베르사유의 장미, 마리 앙투아네트 신이 사랑한 천재,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워털루에서 흘린 눈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고전주의의 형식과 낭만주의의 정신, 루트비히 판 베토벤 남아메리카의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 주세페 가리발디 가난한 이민자의 아들에서 대통령으로, 에이브러햄 링컨 신에 대한 위대한 반역, 찰스 로버트 다윈 피와 철로 이룬 독일의 통일, 오토 폰 비스마르크 노동자여 단결하라, 카를 마르크스 간질병과 도박벽을 이기고 얻은 문학적 완성,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잊힐 뻔했던 구원의 천사, 장 앙리 뒤낭 세상에 빛을 준 노력하는 천재, 토머스 앨바 에디슨 평생 팔린 그림은 단 한 점, 빈센트 반 고흐 정신분석학의 기수, 지그문트 프로이트 런던 베이커 가 221번지 B호에는 탐정이 산다, 아서 코넌 도일 실험을 하지 않고 살 수 있을지 모르겠어, 마리 퀴리 러시아에 세운 공산주의 정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경외, 알베르트 슈바이처 시간·속도·공간의 수수께끼를 벗기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러시아를 지배한 강철의 사나이, 이오시프 스탈린 터키 독립의 아버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미치광이거나 천재거나, 파블로 피카소 대공황에서 미국을 구해낸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탈리아의 히틀러, 베니토 무솔리니 세계를 전쟁의 포화 속으로 몰아넣다, 아돌프 히틀러
전체목차
TOP으로 이동


[Daum백과] 페르디난드 마젤란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김상엽, 청아출판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