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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후드 이야기의 배경이 된 용맹한 기사

리처드 1세

Richard I of England
요약 테이블
출생 1157년
사망 1199년
국적 영국

잉글랜드의 왕으로 '사자왕 리처드'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제3차 십자군 원정에 나섰으나 목표였던 예루살렘 점령은 이루지 못했고, 돌아오는 길에 독일에 포로로 붙잡혀 많은 돈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십자군 원정으로 인해 실제로 영국에 머무른 기간은 얼마 되지 않지만 영국인들에게 중세 기사의 전형으로 여겨지며 여러 가지 이야기에서 영웅으로 묘사된다.

리처드 1세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리처드 1세는 잉글랜드 왕국의 두 번째 국왕으로 생애의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냈으며 그 용맹함으로 인해 '사자왕' 또는 '사자심왕(Coeur de Lion 혹은 Richard the Lionheart)'이라고도 불린다.

리처드는 1157년 헨리 2세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전에 큰아들 윌리엄 9세가 사망했고, 그는 형이 가지고 있던 푸아티에 공작 작위를 받았다. 그리고 열한 살에 어머니의 영지 아키텐을 물려받았다.

큰형이 죽은 후 왕위를 이을 후계자가 된 젊은 헨리는 아버지 헨리 2세에 대한 반란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약속했던 땅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독립을 유지하고 싶어했지만 헨리 2세는 아들에게 준 영지에서도 손을 떼려 하지 않았다. 이 반란을 엘레오노르가 조종했다는 설도 있다. 결국 젊은 헨리는 동생 리처드, 조프리와 함께 프랑스로 가서 루이 7세에게 몸을 의탁했다. 아들들은 루이 7세와 동맹을 맺고 군사를 모았고, 이에 대응해 헨리 2세는 용병 2만 명을 고용했다. 이 싸움은 1174년 헨리 2세와 루이 7세가 화약을 맺으며 끝났고, 아들들은 아버지의 밑에 다시 머리를 숙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헨리 2세는 아내 엘레오노르를 감금하여 아들들에게 인질로 사용했다.

십자군 복장을 한 리처드 1세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후 리처드는 국내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힘썼고, 특히 견고하기로 유명했던 카스티용 쉬르 아헨(Castillon-sur-Agen) 성을 함락시키며 '사자심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헨리는 아들들이 또다시 반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이들의 관계는 특히 헨리 2세가 리처드의 약혼녀이자 루이 7세의 딸이었던 알뤼스를 두 번째 아내로 삼아 영지 뱅센(Vexin)을 차지한 후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1183년 젊은 헨리와 조프리, 브르타뉴 공이 아키텐을 침입했다. 리처드 아래의 귀족들이 모두 그들에게서 돌아섰지만 리처드는 침략군을 막아내고 포로들을 전부 처형했다. 젊은 헨리가 사망한 후 리처드가 장자가 되었지만 헨리 2세는 막내아들 존에게 아키텐 침공 허가를 내렸고 전투는 계속되었다. 1187년 리처드는 루이 7세의 아들인 22세의 존엄왕 필리프 2세와 동맹을 맺고, 아버지와의 싸움을 돕는 대가로 필리프에게 노르망디와 앙주의 소유권을 약속했다.

십자군 원정을 떠나는 리처드 1세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1188년 헨리 2세는 아키텐을 막내아들 존에게 주기로 하였다. 다음 해에 리처드는 필리프의 군사와 함께 아버지를 공격했다. 1189년 7월 4일 리처드와 필리프의 군대는 발랑에서 헨리의 군대를 무찔렀으며, 헨리는 존의 중재로 리처드를 후계자로 삼는 데 동의했다. 이틀 후 헨리 2세가 사망했고, 9월 30일에 리처드는 영국의 왕이자 노르망디 공, 앙주 백작이 되었다.

1188년에 리처드는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왕이 된 다음 리처드와 필리프는 제3차 십자군 원정을 떠나기로 합의했다. 프랑스에 있는 영지에 군사를 배치한 후 그는 1190년 여름 마침내 십자군 원정을 떠났다. 왕위에 오른 지 겨우 6개월 만의 일이었다. 이에 대해 몇몇 역사가들은 그를 비난하기도 한다. 19세기 영국 역사가 윌리엄 스터브스는 "그는 형편없는 왕이었다. 그의 엄청난 공적, 뛰어난 군사적 기술, 시적 재능과 모험심 넘치는 영혼은 백성들의 상황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하게 했다. 그는 오로지 모든 것을 팔아 싸움을 하려 했던 전사였을 뿐이다. 그가 찾던 영광은 정복이 아니라 승리에 있었다"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사실 리처드는 영국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가 젊은 시절 주로 머물렀던 곳은 노르망디, 앙주, 아키텐 등으로 영국에 대해서는 "춥고 언제나 비가 내린다"고 불평했다. 십자군 원정에 드는 자금을 모으며 그는 "런던을 사겠다는 사람만 있으면 기꺼이 팔 텐데"라고 말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륙에 있는 영지보다 브리튼 섬 쪽은 오히려 반란이 덜한 편이었다. 그는 관료들의 손에 영토를 맡기고 4,000명의 무장군인과 4,000명의 보병, 전함 100척으로 원정을 떠났다.

프랭크 굿윈이 그린 로빈후드

로빈후드는 12세기경의 인물로 추정되며 14세기 초반부터 음유시인들에 의해 노래로 불리면서 이후 서민들의 사랑을 꾸준히 받은 문학상의 인물이 되었다.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1191년 키프로스의 리마솔(Limassol)에 도착한 리처드의 함대는 도시를 점령했다. 그리고 반항하는 사람들을 모두 학살하고, 6월 초에 다시 성지를 향해 떠났다.

1191년 6월 8일 리처드는 마침내 아크네에 도착해서 도시를 탈환했다. 도시에 입성한 왕들이 차례로 깃발을 걸었고, 그중에는 이사아키우스 콤네누스의 대리로 온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의 깃발도 있었다. 신성로마 제국의 봉신인 레오폴트가 왕인 자신들과 함께 기를 걸었다는 사실에 리처드와 필리프는 분개했고, 리처드의 부하들이 그 깃발을 찢어서 해자에 던져버렸다. 레오폴트는 발끈해서 십자군을 떠나버렸고, 필리프 역시 얼마 후 키프로스의 소유권을 놓고 리처드와 말다툼을 벌이다가 원정에서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리처드는 진군을 멈추지 않았다.

1191년 9월 7일 그는 아르수프 전투에서 살라딘의 군대를 물리치고, 아스칼론 성을 지었다. 그러나 동맹군을 잃은 리처드는 예루살렘을 탈환한다 해도 지킬 가능성이 없음을 깨닫고 물러나기로 하고 살라딘과 협상에 나섰다. 살라딘의 요구조건은 리처드의 부하들이 새로 지은 아스칼론 성채를 부수는 것이었다. 리처드는 살라딘의 주요 본거지인 이집트를 침공함으로써 협상에서 우위를 차지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필리프와 동생 존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식에 가능한 한 빨리 돌아가기 위해 결국 협상에 응했다. 두 사람은 1192년 9월 2일 협상을 맺었고 여기에는 아스칼론 성벽 파괴와 그리스도교도들이 예루살렘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허가, 그리고 3년간의 휴전이 포함되어 있었다.

육로를 통해 영국으로 돌아가던 리처드는 불행히도 작센에서 그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레오폴트 5세에게 잡히고 말았다. 리처드는 뒤른슈타인 성에 감금됐고, 이 소식은 곧 영국에까지 알려졌다. 1193년 초 대공은 리처드를 신성로마 제국 황제 헨리 6세에게 넘겼고, 헨리 6세는 그의 몸값으로 15만 마르크를 요구했다. 이는 십자군 원정을 위해 모았던 금액과 똑같은 액수이며 영국 왕가 연간 수입의 두세 배에 달한다. 영국 전역에서 돈이 모였고, 어머니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역시 아들을 위해 돈을 모았다. 1194년 2월 4일에 리처드는 몸값을 지급하고 풀려났다.

리처드가 원정을 떠나고 없는 사이에 존은 왕위를 노렸지만 돌아온 리처드는 그를 용서하고 후계자로 삼았다. 하지만 존의 어머니 콘스탄스가 영지로 필리프 2세를 끌어들였고, 리처드는 필리프와 계속 전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필리프는 리처드의 영지에 지속적으로 침입했고, 그 사이 내정은 캔터베리 대주교인 휴버트 월터가 맡았다.

1199년 3월 25일 저녁, 리처드는 갑옷을 입지 않은 채 성 주변을 산책하다 화살에 맞은 상처가 덧나 4월 6일에 사망하고 말았다. 유언장에는 동생 존에게 전 재산과 영토를 넘긴다고 쓰여 있었다. 리처드의 머리는 푸아티에에 있는 샤루 수도원에 묻혔고, 그의 심장은 노르망디의 루앙에, 나머지 시신은 앙주에 있는 퐁텐블로 수도원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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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엽 집필자 소개

단국대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서 사학과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는 <이야기 그리스로마사>, <로마제국과 곡물문제>, 논문으로는 「초기 프린키파투스 체제하에서 기사신분..펼쳐보기

김지원 집필자 소개

서울대학교 및 동 대학원에서 화학생물공학을 전공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언어교육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번역서로는 『렘브란트의 유산』 『나폴레옹의 영광』 『손 안에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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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 저자김상엽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역사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다! 진시황제, 카이사르, 다 빈치, 갈릴레오, 링컨, 간디, 체 게바라, 마더 테레사 등 고대 영웅부터 현대의 성녀까지 100인으로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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