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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인 100
인 역사의 두 얼굴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출생 | 184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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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09년 |
본명 | 하야시 도시스케(林利助) |
국적 | 일본 |
메이지 유신 이후에 정부의 요직을 거쳤으며, 일본 메이지 헌법의 기초를 마련하고, 초대, 제5대, 제7대, 제10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아시아 진출과 조선의 식민지화를 주도했으며, 일본의 근대화에 기여한 인물이다. 1909년 10월 26일에 중국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에게 저격당해 사망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우리에게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이자 경술국치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라고 생각되지만, 정작 그가 일본 역사에서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역사에는 언제나 여러 가지 측면이 있음을 유의하여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살펴보자.
이토 히로부미의 본명은 도시스케(利助)로 현대 일본의 기반을 다지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메이지 헌법(1889년)의 초안을 마련하고 양원제 의회(1890년)를 수립하는 데 기여한 공로로 1884년 후작 작위를 받고 이어 1907년 공작이 되었다.
이토는 1841년 스오노쿠니 구마게 군에서 태어났다. 농민이던 그의 아버지는 조슈번의 무사인 미즈이 부베에(水井武兵衛)의 양자가 되어 하급 무사의 신분을 얻고, 성을 이토(伊藤)로 바꾸었다. 이토는 그 후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 입학하여 수학한 후 다카스기 신사쿠, 이노우에 가오루 등과 '토막 운동(討幕運動, 막부 타도를 기치로 근대적인 군사력을 정비하면서 국가 통일을 목표로 한 일본의 근대화 운동)'에 참여했다.
이토는 1603년부터 일본을 다스려온 도쿠가와 막부의 몰락과 일본 내의 서양 세력의 등장으로 빚어진 혼란스런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그는 메이지 시대 초기의 위대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인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와 친분을 맺으면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메이지 시대 초기 정계 거물인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와의 친분으로 미국 파견 사절단(1870년)과 이와쿠라(岩倉) 사절단(1871~1873년)에 참가해 해외에서 세금, 예산제도, 조약 개정 등의 다양한 분야를 연구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이토 히로부미로 개명하고, 조슈번의 유력자로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 외국 사무국 판사, 관선 효고번 지사, 초대 공부성 장관 등 정부의 요직을 역임했다. 정부 요인들이 정치 현안과 향후 문제에 대해 논의한 오사카 회의를 알선하기도 했으며, 오쿠보 도시미치가 암살된 후에는 내무성 장관이 되었다. 이로써 야심 있고 재능 있는 정치가 오쿠마 시게노부와 대립하게 되었지만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1881년 오쿠마와 지지자들을 정부에서 축출하고, 헌법을 제정하게 했다.
메이지 헌법은 이토의 가장 큰 업적이다. 일본 근대화의 포문을 연 메이지 헌법은 민권과 의회의 권한 제한 등 독재정치를 정착시켰다는 한계가 있지만 이는 당대의 상황을 생각하지 않은 현대적인 시각일 수도 있다. 당시 지도부는 대부분이 무사 출신이었고, 대내외적인 압박과 혼란, 보수적인 시대적 상황에서 기본권 보장과 의회 수립을 명문화한 이 조치는 진보적이고 계몽적인 처사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토는 1894년에 영국과 맺은 조약을 통해 1899년까지 일본 내에 들어오는 영국인에 대한 치외법권을 철폐했다. 그리고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메이지 헌법과 이 두 가지 사건은 일본이 아시아의 어느 나라보다 먼저 서구화, 근대화되는 기반을 마련하여 이에 따라 서구 열강이 아닌 동양의 소국이 제국주의적 식민지를 펴는 데 일조하는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이토는 대외적인 관계에서 일본의 세력을 키워나가는 데 일조함은 물론, 고위 관료 집단과 정당 사이의 관계를 협조적으로 전환시켜 양극화된 세력을 보다 생산적으로 국내 정치에 기여하도록 만들어 정국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1905년 11월 일본과 대한제국 사이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5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진 이 조약문은 양국의 이익을 위해 조선을 일본의 보호하에 둔다는 것으로 사실상의 식민지를 의미했다. 이 조약에 따라 조선통감부가 설치되었고, 이토는 초대 통감(총독)이 되었다. 그리고 1906년 3월, 이토는 초대 통감으로 취임해 조선에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했다. 을사늑약에 기재된 각종 부당한 조치들과 이권 침탈 조치 등이 차례로 실행되었고, 조선인들의 불만은 점차 고조되어갔다.
1907년 이토는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를 궁내대신으로 임명하고, 총리대신 이완용, 탁지부대신 고영희, 법무부대신 권중현, 농상공부대신 송병준, 내부대신 임선준, 군부대신 이병무, 학부대신 이재곤 등 을사오적을 중심으로 새 내각을 구성했다.
1907년,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는 밀서를 보내 조약을 무효화시키려 하는 헤이그 밀사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이토는 고종을 강제 양위시켰다. 그리고 1909년 통감직을 사임한 그는 추밀원 의장 자격으로 10월 26일 만주를 순방하던 중에 하얼빈 역에서 대한제국의 안중근에게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이토의 장례는 같은 해 11월 4일에 히비야 공원에서 국장으로 치러졌다. 이토가 일본의 근대화에 기여한 공로는 의심할 바 없지만 그는 일본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으뜸가는 인물은 아니다. 그는 영웅들, 특히 위대한 군사적 대의를 위해 싸우다 실패한 사람들을 선호하는 일본인들의 취향에 부합하지는 않은 인물이었다. 게다가 오쿠보 도시미치, 오쿠마 시게노부처럼 강력한 의지를 소유한 정치가도 아니었다. 그는 타협자의 역할을 추구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메이지 시대의 최고 걸작이라 할 수 있는 헌법을 만들어 일본의 정치를 질서정연하고 점진적으로 평화롭게 변혁했고, 국민들의 정치 참여라는 중요한 과정을 통해 정치의 폭을 더 넓혀나가도록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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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다! 진시황제, 카이사르, 다 빈치, 갈릴레오, 링컨, 간디, 체 게바라, 마더 테레사 등 고대 영웅부터 현대의 성녀까지 100인으로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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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이토 히로부미 – 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김상엽,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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