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세계사를 움
직인 100
천하통일의 꿈을 이룬 인물

도요토미 히데요시

하시바 히데요시, 豊臣秀吉
요약 테이블
출생 1536년
사망 1598년
국적 일본

일본의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천하를 통일했다. 영지전봉(領地轉封)정책을 펴 다이묘들의 세력을 축소시켰다. 철저한 검지(檢地)정책과 무기회수정책으로 무사 계급과 농민들의 반란을 봉쇄했다. 두 차례에 걸쳐 조선 정벌을 단행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우리에게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임진왜란 외에 그가 일본에서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일본 역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전국시대를 마감시키고 천하를 통일한 위업을 달성한 인물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와리 국(尾張國) 나카무라(中村)에서 기노시타 야에몬과 나카 사이에서 태어났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에 따르면 아버지 기노시타 야에몬이 전사한 후 어머니 나카는 지쿠아미와 재혼했지만, 양아버지 지쿠아미와 히데요시의 관계는 좋지 않았고 지쿠아미는 히데요시를 학대했다고 한다. 때문에 히데요시는 집을 뛰쳐나와 무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스루가 국으로 향했다고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도토미 국 나가카미 군 즈다지 장원의 성주 마쓰시다 유키쓰나를 섬기는 이마가와 가문의 가신이 되었다. 그는 어느 정도 성과를 냈지만 곧 가신의 자리에서 물러났고, 1554년(덴분 23년) 무렵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고모노(小者, 무사들의 시중을 드는 직책)로 일하게 되었다.

오다 노부나가 아래에서 히데요시는 천하를 통일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기요스 성의 성과 관련된 업무와 내방 업무 등에서 기발한 아이디어를 자주 제안했다. 그는 솔선수범하여 큰 성과를 보이면서 노부나가의 환심을 샀고, 점차 오다 가문 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 무렵 히데요시의 용모를 보고 노부나가가 '원숭이', '대머리 쥐'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1568년(에이로쿠 11년) 음력 9월 히데요시는 오미 미쓰쿠리 성 공략에서 큰 활약을 했으며, 같은 해 오다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쇼군에 옹립하고 교토를 평정하자 아케치 미쓰히데, 니와 나가히데와 함께 교토에서 정무를 보았다. 1570년(겐키 원년) 에치젠 국의 아사쿠라 요시카게 토벌에 종군하였고, 아자이-아사쿠라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1573년(덴쇼 원년) 아자이 가문이 멸문하자 그의 영지였던 오미 3개 군을 하사받아 지명을 나가하마(長浜)로 개명하고 나가하마 성주로 부임했다.

오다 노부나가와 천하포무 인장

천하포무(天下布武)란 '무력으로 천하를 거머쥐겠다'는 의미이다.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후로 야마토 국의 마쓰나가 히사히데를 토벌하고 하리마 국을 점령하는 등 노부나가의 명을 받아 인근 국가들을 전부 정복하기에 이르렀다. 1579년(덴쇼 7년)에는 비젠 국, 미마사카 국, 다이묘 우키타 나오이에를 복속시켰고, 하리마 미키 성주의 반란을 진압했으며, 다지마 국 역시 오다 가문의 세력권으로 복속시켰다. 그 후 돗토리 성 정복, 아와지 국 점령, 빗추 공략 등 굵직굵직한 전투에서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1582년(덴쇼 10년) 음력 6월 2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인생에 대단히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가 교토 혼노지에서 아케치 미쓰히데의 모반으로 살해된 것이다. 당시 빗추 다카마쓰 성 공략에 힘쓰고 있던 히데요시는 이 소식을 듣고 곧 다카마쓰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의 할복을 조건으로 모리 데루모토와 강화를 맺고 주군의 복수를 하기 위해 교토로 회군했다. 히데요시의 출현에 당황한 아케치 미쓰히데는 음력 6월 13일 히데요시와 전투를 벌이지만, 압도적인 전력에 밀려 결국 패배하고 토착민의 손에 살해되었다. 그 후 히데요시는 미쓰히데 잔당을 토벌해 교토를 장악했다.

음력 6월 27일,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 문제와 영지 분할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기요스 성에서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오다 가문의 가신 시바타 가쓰이에는 후계로 노부나가의 삼남 오다 노부타카를 천거했지만, 아케치 미쓰히데의 토벌로 공을 세운 히데요시의 입김으로 노부나가의 적손 산보시가 후계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이후로 히데요시와 가쓰이에의 대립은 날이 갈수록 격화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음해하고 서로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애를 썼다. 결국에 가쓰이에는 산보시를 기후 성에 억류했다. 1582년(덴쇼 10년) 음력 12월, 히데요시는 시바타 가쓰이에의 양자 시바타 가쓰토요가 지키는 나가하마 성을 포위해 항복을 받아냈고, 노부타카의 가신 사이토 도시아키가 지키는 가지키 성을 함락시켰다. 결국 노부타카는 산보시를 히데요시에게 넘겼고, 생모 사카씨와 딸을 인질로 보내 화의를 맺었다.

1583년(덴쇼 11년), 다키가와 가즈마스가 가쓰이에와 손을 잡고 치밀한 계획을 세워 군사를 일으켰다. 다키가와가 이세에서 거병하면 히데요시가 이세를 칠 것이고, 그 틈을 타 가쓰이에가 히데요시의 거점을 친다는 계획이었다.

히데요시가 이세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동안 가쓰이에는 음력 3월에 히데요시가 다스리는 오미로 출발했다. 히데요시는 즉각 군사를 출동시켜 비와 호 북쪽 시즈가타케에서 가쓰이에 군과 대치하였다. 두 사람이 대치하고 있는 동안 이번에는 기후 성의 노부타카가 군사를 일으켜 히데요시 측의 오가키 성을 공략하는 등 점차 가쓰이에의 세력이 우위를 점하는 듯이 보였다.

음력 4월 가쓰이에의 중신 사쿠마 모리마사는 히데요시가 미노로 출병한 틈을 노려 오이와 산과 이와사키 산의 성채를 공격해 함락시켰다. 그러나 모리마사는 가쓰이에의 명을 어기고 함락한 성채에 계속 머물다가 신속히 회군한 히데요시의 반격을 받고 말았다. 거기다 마에다 도시이에가 배신하면서 가쓰이에 세력은 점차 패퇴하기 시작했다. 결국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히데요시에게 크게 패한 가쓰이에는 에치젠으로 퇴각했다.

24일 가쓰이에는 마에다 도시이에를 선봉으로 한 히데요시 군에 기타노쇼 성이 공격당하자, 정실 오이치노 가타와 함께 자결했다. 히데요시는 여세를 이어 미노를 공략해 오다 노부타카를 자결로 몰았고, 다키가와 가즈마스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리하여 반히데요시 진영을 멸한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 지위를 확립했다.

이제 히데요시의 앞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주군 오다 노부나가의 바람이기도 했던 천하통일을 위한 작업을 차근차근 진행했다.

그는 제일 먼저 영지전봉정책을 썼다. 이는 다이묘들과 영지의 전통적인 관계를 끊어버리는 정책이었다. 영지란 다이묘들에게는 권력을 유지시켜주는 힘의 원천이었기 때문에 영지를 떠나는 것은 곧 세력 약화를 의미했다. 이처럼 영지전봉정책에는 천하통일 작업을 수월히 진행하려는 히데요시의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오사카 성

천하통일의 본거지에 어울리는 위엄 있는 건축물로 내부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는 첫 번째로 전투에서 공을 세운 다이묘들에게 영지를 수여할 때 반드시 현재의 영지와 완전히 다른 영지를 내렸다. 그는 니와를 사카모토에서 기타노쇼로 이동시켰고, 이케다를 오사카에서 미노의 오가키로 이동시켰다. 그 후 오사카로 들어가 충실한 심복 다이묘들을 오사카와 교토 주위에 배치했다.

히데요시가 오사카를 근거지로 택한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오사카는 다섯 기내 지방(야마시로, 야마토, 가와치, 이즈미, 셋쓰)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교토와도 거리가 가까웠고 수상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평야로 둘러싸인 구릉 위에 위치해 있다는 것도 전략상으로 좋은 조건이었다. 또 주위에 덴노사, 스미요시, 사카이 등 풍족한 도시를 끼고 있어 그곳의 막대한 경제력을 이용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히데요시는 이곳 오사카에 웅장한 성을 축조했다. 1585년 5층의 천수각이 완성되었으나 성 전체를 완성시키기까지는 몇 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이렇게 오사카의 새 주인이 된 히데요시에게 새로운 골칫거리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충돌이었다. 1584년(덴쇼 12년)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 오다 노부카쓰는 '연하의 예'를 하러 오라는 히데요시의 명령에 반발하며 대립했다. 그는 노부나가의 맹우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연합했고, 이에야스와 내통하고 있던 조소카베 모토치카와 기이 사카이 무리도 반히데요시를 기치로 궐기했다. 이에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카쓰의 가신 나카야마 가쓰타다를 공략하고 미네 성을 함락하는 등 공세를 펴나갔다.

이에야스-노부카쓰 연합군도 반격하여 하구로에 포진한 모리 나가요시를 격파하고 히데요시와 대치했다. 압도적인 병력에도 히데요시는 이들을 단숨에 이길 수가 없었다. 이에 히데요시는 가가노이 성과 노부카쓰 측의 이가, 이세를 공략했다. 결국 음력 11월 11일, 오다 노부카쓰는 사실상 히데요시에게 굴복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상의하지 않고 단독으로 히데요시와 강화를 맺었다. 이에 대의명분을 잃은 이에야스는 미카와에서 철수하고 차남 오기마루(후의 유키 히데야스)를 히데요시의 양자로 삼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다.

1586년(덴쇼 14년), 히데요시는 소에다 요시나리의 부인인 여동생 아사히를 강제로 이혼시켜 이에야스에게 시집보냈다. 그리고 어머니 오만도코로를 인질로 보내 그의 입경을 재촉했다. 결국 이에야스도 이에 승복해 상경하여, 히데요시에게 신종을 맹세했다. 이로써 희대의 두 인물이 하나의 세력권을 구축하게 되었다.

1587년, 히데요시는 군사를 이끌고 수륙 양쪽에서 규슈를 침공했다. 규슈를 다스리고 있던 시마즈 가문은 있는 힘을 총동원하여 최후까지 항전했으나 도저히 승산이 없었다. 결국 5월 무렵이 되자 사쓰마의 다이헤이사에서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는 히데요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규슈를 평정한 히데요시는 관동의 호죠 가문에게 항복을 종용했다. 그러나 호죠 가문은 항복하지 않고 토착 무사들과 결합해 대항하려 했다. 1589년, 히데요시는 천황의 이름을 빙자하여 호죠 가문에 위협을 가했다. 호죠 가문은 크게 분개하여 사가미 각지에서 대포를 만들도록 하고 동원령을 내려 히데요시의 군대에 맞설 준비를 했다. 1590년, 히데요시는 교토를 출발하여 호죠 가의 본성인 오다와라 성을 포위하고 지구전을 펼칠 준비를 했다. 하지만 3개월 만에 호죠 가의 지성(支城)들의 항복을 차례차례 받았고, 7월에 이르러 호죠 가는 마침내 히데요시에게 항복을 제의했다. 호죠 우지마사는 할복을 명받고, 그의 아들 우지나오는 고야 산으로 추방되었다.

이로써 히데요시는 노부나가가 혼노사에서 피살된 후 불과 8개월 만에 일본 전국을 통일하기에 이르렀다. 약 100여 년간 이어지던 전국시대가 막을 내리고, 히데요시는 전국을 지배하기 위한 통일정권의 확립에 박차를 가했다.

검지(檢地, 토지조사)와 무장해제는 히데요시 통일정책의 주요 내용이다. 히데요시는 검지관을 전국에 파견하여 다이묘들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를 실제로 측량하여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역사상 태합검지[太閤檢地, 태합(太閤)은 히데요시를 가리킴]라고 부른다.

1591년 3월에는 전국에 걸쳐 호구조사와 인구조사를 실시하여 마을 단위로 그 수를 보고하도록 했다. 호구조사에 의해 작성된 가구별·인구별 대장은 연공을 징수하는 검지대장과 함께 농민을 토지에 묶어두는 대장으로 비록 다이묘라 할지라도 검지대장에 등록된 농민은 새로운 영지로 데리고 갈 수 없도록 하였다.

태합검지에 의해 전통적인 장원제는 종말을 고하고, 전국적으로 통일된 봉건지행제(封建知行制) 아래 히데요시와 모든 다이묘와의 관계는 앞서 노부나가와 모든 다이묘와의 관계처럼 동료의 관계가 아닌 주종 관계로 전환되었다. 농촌에서도 무사와 농민의 구별이 확실해져서 무사는 오로지 다이묘의 가신으로서 자신의 지행지를 다스리는 일에만 종사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히데요시는 무사는 다이묘의 가신으로, 농민은 토지에 정착하여 오로지 농업에만 열중하게 하는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유례없는 강력한 지배력을 과시하게 되었다.

국내 상황이 정리되자 히데요시는 몰락한 다이묘와 호족, 일반 무사 등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해외에서 영토를 획득하여 그들에게 나누어줄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해외에까지 자신의 명성을 떨치겠다는 공명심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어찌 되었든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이웃나라 조선이었다.

동래부사순절도

1592년 4월 15일 일본군의 침략을 받은 동래성 성민들의 항전을 그린 기록화이다.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고시니가 이끄는 제1군이 1592년 4월 12일 새벽 부산포에 입성하고 얼마 후 가토가 이끄는 제2군과 구로다가 이끄는 제3군이 차례차례 조선 땅에 입성했다. 히데요시는 나고야에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이들을 진두지휘했다. 이들이 조선에 입성한 지 불과 20여 일 만에 조선의 수도 한양이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조선 임금 선조는 급히 의주로 몽진했으며, 일본군은 각각 함경도와 평양 방면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육지에서의 기세와는 달리 바다에서 일본군은 연패의 늪에 빠졌다. 게다가 명나라 지원군까지 도착하자 육지에서의 전투 양상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조총을 앞세운 일본군에게도 대포를 앞세우고 진격해오는 명나라군을 감당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일본군의 사기는 현저하게 떨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강화조약을 맺자는 의견이 팽배해졌다.

히데요시는 결국 강화를 맺되 7개의 조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그 조건은 명나라의 황녀를 일본 천황의 후비로 삼는다, 조선 팔도 가운데 4개의 도를 일본에게 할양한다 등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어떻게든 강화를 성사시키고 싶었던 고시니는 명나라 사신 심유경과 함께 히데요시를 속이고 가짜 문서를 만들었으나 곧 들통나고 말았다. 히데요시는 크게 노해 다시 군사를 일으키니 이것이 바로 정유재란이다(1597년).

히데요시의 2차 출병은 오로지 조선 남부 지방의 약탈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2차 침공은 1차 침공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과 의병의 활약, 명나라의 지원 등으로 일본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 와중에 전쟁의 끝을 보지 못한 채 히데요시는 1598년(게이초 3년) 음력 8월 18일 고다이로[五大老,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권 말기에 도요토미 가의 가로(다이로)의 자격으로 정무에 참가하였던 다섯 명의 다이묘를 지칭]의 필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보호역을 맡은 마에다 도시이에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후시미 성에서 임종했다.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전군이 철수함으로써 7년간 끌어오던 전쟁은 막을 내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절명시

히데요시가 죽음에 대비하여 미리 만들어놓고 보관하게 한 것이라고 한다.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조선과의 전쟁을 통해 일본은 도공을 납치하고 활자를 포함한 많은 문화재를 약탈하여 도자기 문화나 인쇄 기술이 발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전쟁 기간에 일어난 문치파와 무단파 간의 갈등 및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대두로 도요토미 정권은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리고, 도쿠가와 정권의 에도 시대가 열렸다. 에도 시대가 도래한 것과 병자호란이 겹쳐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급격하게 호전되기도 했다. 명에서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국방력이 약화되었고, 후금이 대두되어 왕조가 교체되었다. 히데요시가 추진했던 전국통일 정책은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그대로 계승되어 평화로운 도쿠가와 시대의 초석이 되었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김상엽 집필자 소개

단국대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서 사학과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는 <이야기 그리스로마사>, <로마제국과 곡물문제>, 논문으로는 「초기 프린키파투스 체제하에서 기사신분..펼쳐보기

김지원 집필자 소개

서울대학교 및 동 대학원에서 화학생물공학을 전공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언어교육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번역서로는 『렘브란트의 유산』 『나폴레옹의 영광』 『손 안에 ..펼쳐보기

출처

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 저자김상엽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역사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다! 진시황제, 카이사르, 다 빈치, 갈릴레오, 링컨, 간디, 체 게바라, 마더 테레사 등 고대 영웅부터 현대의 성녀까지 100인으로 ..펼쳐보기

전체목차
6. 서양의 근대, 15세기 중엽 ~ 20세기 초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다비드 상을 사랑한 조각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최초의 세계일주를 시도하다, 페르디난드 마젤란 종교개혁의 출발 신호, 마르틴 루터 신대륙에 제국주의를 불러온 피의 학살자, 에르난 코르테스 국가와 결혼한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 1세 영국이 사랑한 최고의 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 망원경으로 지동설을 증명하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17세기가 낳은 최고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 공화국을 수립한 청교도, 올리버 크롬웰 유럽 절대왕정의 상징, 루이 14세 현대 과학의 아버지, 아이작 뉴턴 러시아 개혁의 일인자, 표트르 대제 음악의 어머니,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당대에 인정받지 못했던 음악의 아버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순수이성비판》을 쓴 멋쟁이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 벌거숭이 군대로 얻은 미국의 독립, 조지 워싱턴 기계 수리공이 만든 증기의 기적, 제임스 와트 독일 문학의 상징,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베르사유의 장미, 마리 앙투아네트 신이 사랑한 천재,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워털루에서 흘린 눈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고전주의의 형식과 낭만주의의 정신, 루트비히 판 베토벤 남아메리카의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 주세페 가리발디 가난한 이민자의 아들에서 대통령으로, 에이브러햄 링컨 신에 대한 위대한 반역, 찰스 로버트 다윈 피와 철로 이룬 독일의 통일, 오토 폰 비스마르크 노동자여 단결하라, 카를 마르크스 간질병과 도박벽을 이기고 얻은 문학적 완성,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잊힐 뻔했던 구원의 천사, 장 앙리 뒤낭 세상에 빛을 준 노력하는 천재, 토머스 앨바 에디슨 평생 팔린 그림은 단 한 점, 빈센트 반 고흐 정신분석학의 기수, 지그문트 프로이트 런던 베이커 가 221번지 B호에는 탐정이 산다, 아서 코넌 도일 실험을 하지 않고 살 수 있을지 모르겠어, 마리 퀴리 러시아에 세운 공산주의 정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경외, 알베르트 슈바이처 시간·속도·공간의 수수께끼를 벗기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러시아를 지배한 강철의 사나이, 이오시프 스탈린 터키 독립의 아버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미치광이거나 천재거나, 파블로 피카소 대공황에서 미국을 구해낸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탈리아의 히틀러, 베니토 무솔리니 세계를 전쟁의 포화 속으로 몰아넣다, 아돌프 히틀러
전체목차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멀티미디어 더보기 4건의 연관 멀티미디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다른 백과사전


[Daum백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김상엽, 청아출판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