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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스터리와
진실, 인물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과의 만남

비운의 인물 미스터리

프랑스 후기인상파 화가 폴 고갱

고흐는 그와 함께 작업하는 것을 커다란 기쁨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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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천재 인상파 화가 고흐와 고갱이 1888년 프랑스의 남부 프로방스의 아를르에서 9주 동안 함께 지냈다. 고흐가 고갱을 만난 것은 1년 전인 1887년 11월 파리에서였는데 그의 나이 서른네 살 때다. 고흐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겨우 7년이 지났을 무렵이다.

반면 서른아홉 살인 고갱은 화가로서의 경험이 풍부했고 모험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다.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 아내와 자식을 떠나 배를 타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선원 생활도 했고 카리브해의 마르티니크 섬으로 가서 방랑 생활도 맛보았다.

이러한 차이점에도 두 사람은 죽이 잘 맞았는데 이유는 고갱이 고흐의 예술에 대한 정열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고흐도 고갱의 그림이 고고한 시정(詩情)을 갖고 있다고 찬양했다.

그 후 고갱은 브레타뉴 지방으로 갔고 고흐는 프로방스 지방인 아를르로 향했다. 지중해의 기후와 정경에 매력을 느낀 고흐는 혼신의 정열을 다해 그에게 보이는 나무, 건초더미 등 일반인들은 시선조차 주지 않는 대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에게 생활비를 보내주는 동생 테오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순간순간 극도로 명확해지는 순간이 있는데, 그럴 때면 자연이 너무나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거의 무의식 상태에서 마치 꿈인 것처럼 그림이 떠오른다.

그러면서 파리에서 고갱과 만났던 일에 생각이 닿자 함께 작품을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동생 테오의 도움을 받아 ‘노란 집’이라고 부르는 작은 집을 한 채 빌렸다. 그는 이 집이 남부의 화실이 되기에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고갱을 초청했다. 고갱을 초청하기 위해 테오는 500프랑이라는 거금을 보냈다.

반 고흐의 〈노란 집〉

고흐는 이 집에서 예술가들과 함께 생활하길 원했다. 그는 평소 존경하던 고갱을 초청했고 고갱은 이곳에서 2개월가량 함께 생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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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이 오는 동안 고흐는 미친 듯이 작업에 몰두했는데 그중에는 그의 상징이 된 해바라기 그림도 포함되어 있다. 고갱은 10월 23일 아를르에 도착하여 고흐와 재회했다. 그는 다소 놀란 투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어떤 곳이든 무엇이든 무질서했으므로 대단히 충격을 받았다. 그의 화구 통에는 물감이 모두 들어 있는 일이라곤 없고 물감은 마개가 잠기지 않은 채 아무렇게나 뒤섞여 있었다.

게다가 고흐의 뒤죽박죽인 자금 관리에 놀란 고갱은 예산을 엄격하게 쓰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고흐의 생활에 방해되지 않도록 배려했는데 그가 적은 고흐의 예산에는 ‘위생용’이란 항목도 있었다. 이는 그들이 사창가에 방문했음을 뜻하는데 사창가를 찾는 이유가 걸작이다. 사창가를 찾는 것이야말로 연애 놀음에 빠지는 걸 방지하고, 그림을 그릴 때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고갱이 합류한 후 고흐는 그림 그리는 방식을 변경할 정도로 고갱에 몰두했다. 고갱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대상을 관찰하며 바로 그 자리에서 마무리까지 하는 것이 고흐의 제작 방식이었다. 그러나 고흐는 고갱을 만난 후 바깥에서 스케치를 하고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마무리 짓는 고갱의 제작 습관을 기꺼이 따랐다.

고흐와 고갱이 그림을 그리는 방법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있다. 그들의 아틀리에인 ‘노란 집’ 근처에 있는 카페 주인 마담 지누를 각각 그렸는데 고흐는 마담 지누가 두 사람을 위해 포즈를 취한 지 단 한 시간 만에 그림을 완성했다. 반면에 고갱은 종이에 백묵과 목탄을 가지고 스케치를 한 후 여러 날이 걸려 ‘밤의 카페’라 불린 술집 배경 전면에 그녀를 옮겨놓았다. 그림 전면에서 압생트 한 잔을 권하는 마담 지누의 모습이다.

고갱이 고흐에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하자 고흐는 해바라기 열두 송이와 열네 송이를 그려주었다. 이 그림을 받고 고갱이 기뻐하자 고흐는 또 〈해바라기〉 두 점을 그려 고갱에게 선사했다. 고흐의 〈해바라기〉는 그의 작품을 대표하는 것이므로 매우 큰 유명세를 탔는데 〈해바라기〉 한 점이 1987년 당시로써는 상상할 수 없는 고가인 3,950만 달러에 팔렸다. 이 그림은 일본의 야스다(安田) 화재해상보험회사가 구매했다.

그런데 이 그림은 나중에 큰 소용돌이에 빠진다. 이 〈해바라기〉를 정밀 연구한 영국인 노르만이 이 작품을 삼류 화가가 그린 위작이라고 폭탄선언했기 때문이다. 전하는 바로는 그 삼류 화가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자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보려고 고흐의 작품을 모사했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세계 언론이 이 내용을 특종으로 보도했지만 야스다 화재해상보험회사는 이에 대해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고흐의 〈해바라기〉가 진짜 위작이냐 아니냐는 사실 야스다 화재해상보험회사에서 정밀 감정하면 간단하게 밝혀질 일이다. 그러나 위작으로 판명되는 순간 휴지로 변할 수 있다면 굳이 과학적인 잣대를 들어대야 하는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여하튼 고흐의 작품이 그만큼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고흐의 대표작 중 하나인 〈해바라기〉

고흐는 노란 집에서 고갱이 오길 기다리며 기쁜 마음으로 이 작품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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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와 고갱이 함께 그림을 그리는 11월 중순 고흐의 동생 테오는 고갱의 그림 몇 점을 팔아 고갱이 수년간 번 것보다 더 많은 돈을 고갱에게 안겨주었다. 그러자 고갱은 아를르를 떠나 마르티니크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열대의 화실’을 차리겠다는 것이다. 고갱의 이런 생각은 고흐로 하여금 ‘남부의 화실’에 회의를 느끼는 것으로 비쳤고 결국 두 사람이 결정적으로 헤어지면서 잘 알려진 세기의 사건을 만든다.

고흐가 고갱을 찾아가 전날 술에 취하여 고갱의 얼굴에 압생트 술을 뿌린 것을 사과했다. 고갱은 고흐의 사과를 선선히 받아주었다. 그러나 다음 날 고갱이 아를르를 떠난다는 것에 화가 난 고흐는 거리를 걷고 있는 고갱에게 칼을 들고 쫓아가 욕을 퍼부었다. 고갱이 이를 맞받아치자 고흐가 그들의 아틀리에인 ‘노란 집’으로 들어가 자신의 귀를 잘랐다는 것이다. 이후 다소 엽기적인 이야기지만 고흐는 잘린 왼쪽 귀를 조심스럽게 포장하여 사창가의 젊은 여자에게 선물했다. 고흐의 이런 행동에 기가 질린 고갱은 다음 날인 12월 23일 파리로 떠났고 서로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반 고흐의 〈귀가 잘린 자화상〉

고갱과 언쟁을 벌이던 고흐는 결국 자신의 귀를 잘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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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은 고흐와 헤어진 후 13년 동안 브레타뉴와 남태평양에서 그림을 그렸지만 아를르에 대한 아픈 추억은 항상 그의 마음을 슬프게 했다. 타히티에서 병들고 파산 상태가 된 그는 1898년 파리의 한 친구에게 자기 정원에 심을 해바라기 씨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 해바라기가 꽃을 피우자 그는 일련의 정물화를 그렸다. 친구 고흐와 ‘남부의 화실’에서 함께 살던 시절에 대한 경의의 표시였다.

폴 고갱의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

고흐와 고갱은 서로 존중하며 함께 작업을 해나갔지만 얼마 안 있어 둘 사이는 파탄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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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매우 놀라운 내용이 발표되었다. 독일 미술사학자 한스 카우프만은 『반 고흐의 귀: 폴 고갱과 침묵의 계약』이라는 책에서 고흐의 귀를 자른 사람은 고흐가 아니라 고갱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당시 두 사람이 심한 언쟁을 벌이는 와중에 화가 난 고갱이 칼로 반 고흐의 귀를 잘랐고(고갱은 펜싱 솜씨가 수준급이었다), 이것이 형사 사건으로 비화하면 고갱에게 중형이 내려질 것을 우려한 두 사람이 합의해 고흐의 자해로 사건을 덮었다는 것이다.

카우프만은 고흐와 격한 언쟁을 벌이던 고갱이 들고 있던 칼로 고흐의 귀를 잘랐는데 귀를 노리고 잘랐는지, 단순 방어 차원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당대의 경찰 보고서와 주변 인물의 증언을 증거로 제시했다. 사건이 다소 확대되자 고갱은 말썽을 피하려 했고 고흐는 고갱이 아를르를 떠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에 두 사람 간의 ‘묵약(默約)’이 성립했다는 것이다. 고갱은 경찰 조사 중 고흐가 직접 귀를 잘랐다고 말했으며, 고흐는 반박하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갱이 총을 갖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다”라고 적은 것을 볼 때 고흐의 귀를 자른 것은 고갱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물론 나름의 논거를 가지고 제기한 주장이지만, 고흐 전문가 마틴 게이포드를 비롯해 많은 학자들은 이 주장을 일축한다. 사람들은 젊은 나이에 자살한 고흐에 대한 애정과 동정심으로 고갱이 고흐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괴롭힌 것처럼 착각하지만,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는 고흐와 단기간 동안이나마 함께 살아야 했다는 점에서 실제 피해자는 고갱이었으며, 고흐의 귀는 고흐가 자른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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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양지에, 문소라 역, 『세계 역사의 미스터리』(북공간, 2008).
  • ・ 조지프 해리스, 「고흐와 고갱」, 『리더스다이제스트』, 2002년 8월호.
  • ・ 신정선, 「고흐의 귀 자른 건 고갱이었다, 독 미술사학자 주장」, 『조선일보』, 2009년 5월 6일.
  • ・ 이주헌, 「이주헌의 캔버스 세상, 반 고흐의 귀 · 네페르티티의 흉상 논란」, 『서울신문』, 2009년 5월 12일.

이종호 집필자 소개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페르피냥 대학교에서 공학박사 학위(Dr. Ing.)와 '카오스 이론에 의한 유체이동 연구'로 과학국가박사(Dr. d..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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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와 진실, 인물편
미스터리와 진실, 인물편 | 저자이종호 | cp명북카라반 도서 소개

람세스에서 메릴린 먼로까지 역사 인물에 얽힌 세계 미스터리의 진실과 거짓을 밝힌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정보에 입각하여 동서양을 넘나들며 신과 인류가 남기고 간 수많은..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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