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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한양
의 기억을
걷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와 백제가 자웅을 겨루다

요약 테이블
관련 장소 광나루

광나루 위로는 아차산이 병풍처럼 지키고 있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인 <광진(廣津)>을 보면 아차산 아래, 오늘날 워커힐 호텔이 자리 잡은 광나루 북쪽 언덕에는 나루터를 관리하는 도승(渡丞)이 있어 사람들의 숙박을 도왔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에 오르면 한눈에 한강의 흐름이 다 보이고 백제 시대 토성도 시야에 들어온다.

이렇게 전망이 좋으니 광나루는 군사 전략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그런 이유로 삼국시대부터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한강을 가장 오랫동안 차지한 국가는 단연 백제다. 백제는 고구려에게 한강을 빼앗기기 전까지 약 500년 동안 이곳에 터를 잡고 있었다. 그러다 475년 수도 한성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함락되면서 개로왕도 전사한다.

그 후 551년 백제 성왕은 신라 진흥왕과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 유역을 되찾았지만, 진흥왕의 배반으로 도로 신라에 빼앗기고 만다.

590년 고구려 온달 장군이 아내 평강공주의 배웅을 받으며 신라에 빼앗긴 한강 땅을 찾으러 전투에 자원했다가 화살을 맞아 전사하는 비극을 낳은 곳도 이곳이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한강을 차지한 국가는 한반도의 패권국이 되었기 때문에 광나루는 늘 군사적·정치적 요충지였다.

겸재 정선의 <광진>(174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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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주변과 광나루 근처는 말을 기르는 목장이기도 했다. 겸재 정선의 그림에도 아차산에는 푸른 초원이 곱게 펼쳐져 있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도성 외곽을 대단위 목장 지역으로 활용했을 정도로 말 사육을 중시하는 국가였다. 삼봉 정도전의 <진신도팔경시(進新都八景詩)>에도 나타나듯 국운이 융성하는 기운은 '만마(萬馬)가 구름처럼 모여 뛰노는' 모습으로 표현되곤 했다. 조선의 말은 명나라가 선호하는 주요 무역 물품이기도 해서 특히 태종 시절 명나라 황제는 조선에서 사육된 말이 우수하다고 칭찬하면서 말 1만 마리를 조공으로 요구한 적도 있다.

삼봉 정도전 시비에 새겨진 <진신도팔경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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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1410년 5월 10일, 금주(衿州, 지금의 시흥)를 목장에서 해제해 백성들이 농사를 경작케 하고, 1413년 3월 18일에는 민가의 땅 5백 결을 전관(箭串)목장으로 흡수하였다고 한다. 땅 한 결은 요즘 단위로 보면 9,900제곱미터(3천 평)이니, 오늘날 495만 제곱미터(150만 평)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국가 전략 차원에서 한강 남쪽 땅은 민가의 농경 생활을 위해 전답으로 활용하고, 한강 동쪽 광나루 쪽은 국가 기간산업인 목축을 발전시키기 위해 목장을 확대하였던 것이다.

광나루 위 아차산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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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주변인 한양 동쪽 근교는 임금의 사냥터로도 애용되던 곳이다. 그런데 중종 이후에는 아차산에서 사냥을 즐겼다는 기록이 사라졌다.

근래 아차산을 살펴보았더니 산에 초목이 없어서 짐승들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이 없습니다. - 《중종실록》 1541년 10월 11일

벌채가 심하니 이를 엄히 금하게 해달라는 상소 내용이다. 실록을 보면 문무를 겸비했던 조선의 국력이 이미 16세기 중반에는 급격히 쇠약해져 문에 치중하는 국가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이유로 그 넓은 말 사육장에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민가가 많아지면서 사람들이 산에 있는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이용하다보니 짐승들은 숨을 곳이 없어졌다.

한양의 인구가 급속하게 늘어나면서 차츰 목장은 차츰 사라지고 많은 땅들이 전답으로 전환됐다. 말 사육을 국가 경제의 중요한 축으로 생각했던 조선 사회가 점차 농경 사회로 발전해가면서 유목민의 삶은 토착민의 삶으로 변화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농경민들 다수가 정착하면서 강가 풍경도 많이 변화했다. 강가에 드문드문 보이는 집들이 풍경과 어울린 고즈넉한 모습이었다면,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민가들이 많이 들어섰다.

광나루는 세종 때 삼전도가 설치되면서 그 기능이 급격하게 약해졌다. 물류 창고로 이용되던 뚝섬도 비만 오면 잠기는 바람에 지방에서 올라온 산물을 적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기능을 대신할 나루터가 필요했다.

송파나루와 삼전나루는 광진나루의 기능을 대신하기 적당한 곳이었다. 한강에서 광주·이천 방향으로 갈 때 반드시 이용하는 송파나루와 삼전나루 일대는 용산이나 서강, 마포처럼 도성과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은 없었지만, 지방에서 올라온 물건들을 바로바로 하역해 적재하기 편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또한 이곳에 상설 시장이 들어서면서 결국 광진나루 기능을 대부분 흡수하게 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의 실록(實錄)을 통칭하는 편년체 사서. 태조에서 철종까지 472년간에 걸친 25대 임금들의 실록 28종을 일컫는다. 국왕이 교체될 때마다 사관들이 다양한 자료들을 모아 편찬했다. 1,893권 888책. 필사본·영인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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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관 집필자 소개

《월간축구》, 《골든에이지》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조선의 군주와 역사에 관심이 많아 《월간중앙》과 《한경리쿠르트》 등에 조선 역사의 흥미로운 이야기와 조선 군주의 리더십에 관한 글을 연재한 바..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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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 저자김용관 | cp명인물과사상사 도서 소개

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시작으로 서울의 성곽, 마을, 강으로 이어지는 한양의 역사를 하나하나 탐색한다. 조선의 왕, 지식인,..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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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길 따라 마음 따라 1. 광나루 2. 잠실나루 3. 뚝섬과 두모포 4. 동작나루와 노들나루 5. 마포 6. 양화나루와 난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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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한강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와 백제가 자웅을 겨루다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김용관,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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