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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동(蓮池洞)은 북쪽으로는 연건동, 동쪽으로는 효제동, 서쪽으로는 인의동 남으로는 종로통에 접해 있다. 연화방이 있어 연지동이 된 듯하다. 조선 시대 한성부에는 동쪽, 서쪽, 남쪽에 연못이 있었다. 서지(西池)는 돈의문 밖 모화관 남쪽에 있었고, 동지(東池)는 동성(東城)의 연동(蓮洞)에 있었으며 남지(南池)는 숭례문 밖에 있다고 전해진다.

이 연못들은 장원서(掌苑署)에서 관리했다. 또 연못에서 나오는 연밥(연꽃의 열매로 식용하거나 약용한다)은 왕에게 진상했다. 창경궁과 경모궁(景慕宮) 앞으로 흘러가는 물 위에는 동대문에서 종로 쪽으로 있는 둘째 다리라는 의미인 두다리(이교, 二橋)가 있었다. 연지동에 있는 다리라고 해서 연지동교(蓮池洞橋)로도 불렀다. 오늘날 종로 5가 효제동 근방이다.

연지동은 조선 시대 동촌(東村)으로 불렸다. 1546년(명종 1년) 8월 23일 실록에는 수구문 안 동지가 황폐하니 다시 수리해서 그 옛 모습을 갖추게 하라는 임금의 명이 기록돼 있다. 동지를 수리해 다시 옛날 그 모습으로 복원된 감동을 이응희는 자신의 문집 《옥담유고》에서 시로 표현했다.

시냇가엔 네모난 연못, 연못가엔 단(壇)이라 은둔하는 사람이 한가로이 넉넉한 별천지 차지했구나. 천 가닥 실버들은 바람에 하늘대고 백 척의 높은 솔은 햇살 가려 차가워라. 긴 밤에도 고아한 회포는 여전히 시구 찾고 노년에 깊은 취미는 물결 구경에 있어라. 이곳의 기이한 형상 보고 싶으면 서산 쪽으로 봉우리들을 보아야 하리!

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연못이 맑고 깊어 자못 그 우아함이 대단하였을 듯하다. 특히 연못에 비친 서산(낙산)의 풍경이 참 고아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조 광해군의 별궁이 있던 이현궁(梨峴宮) 터는 인조 이후 왕실 인척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정조 대에 이르러 군사시설인 장용영을 설치하였으나 정조 사후 1802년(순조 2년)에 폐지되어 훈련도감에 귀속되었다. 이 부근의 지명을 배오개(이현, 梨峴)라고도 부르는데 이현궁이라는 이름도 거기에서 유래되었다.

이현궁 터에 있는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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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산동(芳山洞)이란 동명은 마을 부근에 있던 가산(假山) 또는 조산(造山)이라 불리던 곳에 무궁화꽃을 많이 심어 그 꽃향기가 발산된 데서 유래되었다. '인조 산'이란 뜻인 가산 또는 조산은 도성 안에 연못이나 하천 등을 조성할 때 파낸 흙을 처리하기 위해 쌓은 산이지만 땅의 기운을 북돋거나 경관을 가꾸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이곳에 있던 가산은 청계천 춘천공사로 개천 바닥에 쌓인 퇴적물을 쌓아 올린 것이다. 청계천에 살던 거지들은 이 조산에 땅굴을 파고 들어가 살았다. 그래서 이들을 땅거지라고 부른 것이다. 영조 때는 거지들이 세력화해서 박지원의 《광문자전(廣文子傳)》과 같은 작품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광문(廣文)이라는 자는 거지였다. 일찍이 종루의 저잣거리에서 빌어먹고 다녔는데 …… 외모는 극히 추악하고, 말솜씨도 남을 감동시킬 만하지 못하며, 입은 커서 두 주먹이 들락날락하고, …… 남들이 장가가라고 권하면 하는 말이 "잘생긴 얼굴은 누구나 좋아하는 법이다. 그러나 사내만 그런 것이 아니라 비록 여자라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나는 본래 못생겨서 아예 용모를 꾸밀 생각을 하지 않는다."

…… 서울 안에 명기(名妓)들이 아무리 곱고 아름다워도, 광문이 성원해주지 않으면 그 값이 한 푼어치도 못 나갔다. 예전에 궁중의 우림아(羽林兒), 각 전(殿)의 별감, 부마도위의 청지기들이 옷소매를 늘어뜨리고 운심(雲心)의 집을 찾아간 적이 있다. 운심은 유명한 기생이었다. 대청에서 술자리를 벌이고 거문고를 타면서 운심더러 춤을 추라고 재촉해도, 운심은 일부러 느리대며 선뜻 추지 않았다.

광문이 밤에 그 집으로 가서 대청 아래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마침내 자리에 들어가 스스로 상좌(上坐)에 앉았다. 광문이 비록 해진 옷을 입었으나 행동에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의기가 양양하였다. …… 온 좌상이 실색하여 광문에게 눈짓을 하며 쫓아내려고 하였다. 광문이 더욱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치며 곡조에 맞춰 높으락나지락 콧노래를 부르자, 운심이 곧바로 일어나 옷을 바꿔 입고 광문을 위하여 칼춤을 한바탕 추었다. 그리하여 온 좌상이 모두 즐겁게 놀았을 뿐 아니라, 광문과 벗을 맺고 헤어졌다.

이 소설은 당시 양반 사회를 풍자하는 글로 거지 광문의 높은 인격에 장안의 유명한 기생이 반한다는 내용이다. 광문이나 운심 모두 실존했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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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관 집필자 소개

《월간축구》, 《골든에이지》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조선의 군주와 역사에 관심이 많아 《월간중앙》과 《한경리쿠르트》 등에 조선 역사의 흥미로운 이야기와 조선 군주의 리더십에 관한 글을 연재한 바..펼쳐보기

출처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 저자김용관 | cp명인물과사상사 도서 소개

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시작으로 서울의 성곽, 마을, 강으로 이어지는 한양의 역사를 하나하나 탐색한다. 조선의 왕, 지식인,..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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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길 따라 마음 따라 1. 광나루 2. 잠실나루 3. 뚝섬과 두모포 4. 동작나루와 노들나루 5. 마포 6. 양화나루와 난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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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연꽃이 피는 연지동 연못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김용관,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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