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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장소 인왕산

인왕산은 대단한 예술적 소질을 타고나 꿈을 꾸듯 젊은 시절을 보냈던 안평대군이 터를 잡은 곳이다. 중년 이후에는 임금의 자리를 도모했지만 결국 세조에게 죽음을 당한 비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또한 인왕산은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18세기 조선 산천을 멋지게 표현한 진경산수화의 창시자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자취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인왕산은 오늘날에도 바라보는 각도와 계절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연출한다. 왕의 기운을 품고 있다는 산이어서인지 그 형상도 범상치 않다. 주봉은 둥글넓적하면서도 남산처럼 부드럽거나 단조롭지 않으며 북악처럼 빼어나지도 않다. 그러면서도 남성적이다.

한양의 주산을 정할 무렵 돌던 인왕산 왕기설은 전설이 돼 민중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전해온 듯하다. 실제로 임진왜란을 겪고 난 후 광해군은 인왕산의 왕기를 억누르기 위해 인왕산 기슭에다 경희궁을 세웠으며, 자수궁과 인경궁도 세웠다. 자수궁은 인조반정 뒤에 폐지되었고 그 후 자수원이라 해서 후궁 가운데 아들이 없는 여인들이 들어와 살게 하였는데 한때 여승 5천 명이 살기도 했다고 한다. 자수궁 터에는 현재 옥인동 군인아파트가 자리하고 있다.

자수궁터에 자리잡은 옥인동 군인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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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석만 남은 궁궐의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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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경궁에서는 광해군이 정권을 잡으면서 폐모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복권된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가 살다 죽었고, 그 후 1648년 홍제원 역참을 짓기 위해 이곳의 기와와 목재 등을 사용하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인경궁 자리는 현재 어딘지 확실하지 않다.

아무튼 인왕산 왕기설로 광해군 때 경희궁과 자수궁, 인경궁 등이 건설되었고 실제로 이 부근에서 살았던 능양군(綾陽君)이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켜 광해군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으니, 인왕산 왕기설은 입증된 셈이다.

한편 세조는 왕위 찬탈에 성공하자 동생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낸 뒤 죽였는데 안평대군이 살던 집이 이곳 인왕산 수성동(水聲洞)에 있었다. 물소리가 들린다는 수성동 기린교(麒麟橋) 부근에 대한 기록이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남아 있다.

수성동은 인왕산 기슭에 있는데, 골짜기가 깊고 그윽하다. 물 맑고 바위도 좋은 경치가 있어서, 더울 때 소풍하기에 가장 좋다. 이 동네는 옛날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이 살던 집터라고 한다. 개울을 건너는 다리가 있는데, 이름을 기린교라고 한다.

위항시인으로 유명한 박윤묵도 이곳 수성동 근처에 살았다. 그래서 비가 오는 날이면 종종 나막신에 우의 하나만 걸친 채 인왕산 수성동 계곡을 찾았다. 그곳에서 연락 닿는 친구들끼리 모여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다.

인왕산 물은 옆으로 흐르기도 하고 거꾸로 흐르기도 하며 꺾어졌다 다시 흐르기도 한다. 가파른 절벽 위에서 나는 듯 떨어지기도, 푸른 솔숲 사이를 씻어내듯 흐르기도 한다. 백 개의 골짜기와 천 개의 개울이 하나도 똑같은 형상을 한 곳이 없다. 이 모든 물이 수성동에 이르게 된 다음에야 하나의 큰 물길을 이룬다. 산을 찢을 듯, 골짜기를 뒤집을 듯 벼랑을 치고 바위를 굴리면서 흐르니 마치 만 마리 말들이 다투어 뛰어오르는 듯하고 우레가 폭발하는 듯하다. - 이종묵, 《글로 세상을 호령하다》
겸재 정선이 그린 <수성동>

안평대군의 비해당이 이곳에 있었다. 좌측에 기린교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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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묵이 잘 표현했듯 인왕산 수성동의 물길은 산을 찢을 듯한 기세로 우레가 폭발하는 듯한 굉음을 내며 흘렀다. 인왕산 옥인동 부근에 송석원(동양화가 박노수 가옥이 송석원 터로 알려져 있다)이란 곳에서 문인들과 풍류를 즐겼던 추사 김정희도 비오는 날 수성동 폭포의 장중함을 표현하기 위해 시를 남겼다.

골짜기 들어오니 나막신 아래로 물소리 우렁차고 푸름이 물들어 몸을 싸는 듯 대낮에 가는데도 밤인 것 같네. 고운 이끼 자리를 깔고 둥근 솔은 기와 덮은 듯 낙숫물 소리 예전엔 새소리더니 오늘은 대아휼(大雅譎) 같다. 산 마음 정숙하면 새들도 소리 죽이나 원컨대 이 소리 세상에 돌려 저 속된 것들 일침(一針) 가해 꾸밈없이 만들었으면 저녁 구름 홀연히 먹을 뿌리어 시의(時意)로 그림을 그리게 한다. - <수성동 우중(雨中) 폭포를 구경하다>
송석원 터로 알려진 옥인동 화가 박노수 가옥

추사 김정희가 바위에 새긴 ‘松石園’이란 글씨가 이 집 안에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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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은 혼인 후에 경복궁에 있던 살림을 인왕산으로 옮기고 저택을 짓기 시작했다. 이 집의 이름이 비해당이 된 배경에는 출중한 능력을 지녔지만 장자가 아닌 안평대군에게 전하는 세종의 당부가 있다.

1442년 6월 어느 날 안평대군이 경복궁에 들어가자 세종은 안평대군에게 집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안평이 대답을 못하자 세종은 《시경》 <증민(蒸民)> 편을 외워주었다.

지엄하신 임금의 명령을 중산보가 받들어 행하고, 나라 정치의 잘되고 안되는 것을 중산보가 가려 밝히네. 밝고도 어질게 자기 몸을 보전하며,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게으름 없이 임금 한 분만을 섬기네.

이 시는 노나라 헌왕의 둘째 아들인 중산보가 주나라 선왕의 명령을 받고 제나라로 성을 쌓으러 떠날 때에 윤길보가 전송하며 지어준 것이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 원문은 '숙야비해(夙夜匪解) 이사일인(以事一人)'으로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게으름이 없이 임금 한 분만을 섬기네'란 뜻이다. 세종이 여기서 두 글자를 따 편액을 '비해(匪懈)'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 것이다.

안평대군은 재주가 뛰어났지만 장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형제 간 권력 다툼이 일어날 것을 우려한 세종의 조처였다. 형 문종이 즉위한 뒤에도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게으름 없이 형을 임금으로 섬겨달라는 당부를 집 이름에 담은 것이다.

한경지략(漢京識略)
조선 시대 한성(漢城)의 역사를 간략하게 서술한 책. 연대는 미상이며, 저자는 유득공의 아들 유본예로 추정되는 수헌거사(樹軒居士)다. 2권 2책. 필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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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관 집필자 소개

《월간축구》, 《골든에이지》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조선의 군주와 역사에 관심이 많아 《월간중앙》과 《한경리쿠르트》 등에 조선 역사의 흥미로운 이야기와 조선 군주의 리더십에 관한 글을 연재한 바..펼쳐보기

출처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 저자김용관 | cp명인물과사상사 도서 소개

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시작으로 서울의 성곽, 마을, 강으로 이어지는 한양의 역사를 하나하나 탐색한다. 조선의 왕, 지식인,..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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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길 따라 마음 따라 1. 광나루 2. 잠실나루 3. 뚝섬과 두모포 4. 동작나루와 노들나루 5. 마포 6. 양화나루와 난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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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왕기가 서린 땅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김용관,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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