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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한양
의 기억을
걷다

사라진 천연 연못 서지의 빛과 그림자

요약 테이블
관련 장소 안산

하늘 사이에 걸린 고개. 인왕산과 안산 사이 하늘이 만든 관문. 1488년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이 한양에 당도하면서 "홍제에서 동쪽으로 가다가 5리가 못 되어 하늘이 만든 관문이 있으니 북으로 삼각산(三角山)을 잇대고 그 가운데 말 한 필 겨우 통할 수 있구나"라고 한탄한 적이 있다.

지금은 상상이 가지 않지만 무악재는 하늘로 올라가는 길목이라 불릴 정도로 참 높은 고개였다고 한다. 그러던 곳이 서대문에서 영천시장을 지나는 전차 노선 때문에 한 번 깎이고, 1960년 도로 폭이 넓어지면서 또 한 번 대대적으로 깎여 그 높이가 크게 줄어들었다.

이 고개는 한양에서 북쪽으로 넘어가는 가장 중요한 길목으로 빈번히 이용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 사신이 한양으로 오는 길목이기도 했다. 사신이 무악재를 넘으면 바로 영빈관인 모화루(慕華樓)에 당도한다.

새로 모화루를 서문 밖에 지었다. 송도 영빈관을 모방해서 만들었다. 신하들에게 명하여 각각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 바치게 하니, 성석린이 '모화(慕華)'란 이름을 지어 올렸는데 그것으로 정했다. 그리고 누각에 액자(額字)를 쓰라고 명하였다. - 《태종실록》, 1408년 5월 7일

1408년 4월 22일, 태종은 모화루 남쪽에 연못을 파게 한다. 서지(西池) 또는 천연지(天然池)라 불린 곳으로 서대문구 천연동이 아직도 동네 이름으로 있다. 이 연못가엔 큰 소나무가 세월의 풍상을 이고 펀펀하게 드리워져 있었는데, 고려의 왕들이 남경(한성의 고려 때 이름)으로 순행하다 비가 오면 이곳에서 비를 피하곤 했다. 그래서 쟁반 같은 소나무라 하여 이름을 반송(盤松)이라 하고 반송정(盤松亭)이란 정자를 지었다.

《태종실록》에는 연못 공사를 담당한 박자청이 탄핵당했다는 기록도 있다. 열흘 넘게 공사를 하고도 완성을 보지 못해 백성의 원성이 자자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태종은 "내가 명한 것인데 자청에게 무슨 잘못이 있느냐?"며 상소를 올린 사헌부 지평(持平) 최자해를 집에 감금하라 지시한다.

《태종실록》에는 연못의 위치와 규모까지 기록돼 있다. 연못은 모화루에서 150보 떨어져 있었으며 길이는 380척, 깊이는 두세 길이었다. 한 길이면 어른 키 높이에 해당하니 꽤 깊었던 모양이다. 1408년 5월 19일에는 개성의 숭교사에 있던 연꽃을 배로 실어 이곳에 옮겼다고 한다. 태종이 이 연못에 들인 공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1413년 6월에는 예빈시(禮賓寺)에서 군사들이 소비하는 쌀을 가지고 연못의 물고기를 기른다는 말을 들은 태종이 해당 관리를 불러 물었다. "이 물고기들이 쌀을 얼마나 소비하는가?" 그러자 관리가 대답했다. "예, 한 달에 족히 열 말은 소비합니다." 그 말을 들은 태종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가 즉시 그만두도록 명했다. 사람도 쌀이 없어 굶어 죽는 판에 어찌 물고기에게 그렇게나 많은 쌀을 허비하느냐는 질책도 함께 따랐다. 그런데 달리 보면 한 달에 쌀 열 말을 소비할 정도로 연못에 고기들이 많았다는 말이기도 하니 연못의 규모가 제법 꽤 컸을 것이란 추측을 하게 된다.

세조 때 강희맹이 반송정에서 쓴 시가 있는데 그 사치스러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게 한다.

수레 일산(日傘) 구름처럼 모여 먼 길을 전송하는데, 술잔 소반 흩어지고 황금 술병 곁들였네. 버들 푸른 큰길가에 술은 이제 다한 것이, 가고 남는 그 일을 한탄한들 어이하리. 슬픈 노래 한 곡조에 맑은 음률 울려나니, 애는 노랫소리 간장을 에이누나. 잠시 후 서로 떠나면 천 리 길 멀어지는데, 외로운 연기 저문 날이 창장(蒼莊)하기만 하구나.

조선 전기에 사신을 접대하는 명소로 이름을 날리던 곳이자 한양을 떠나는 여행객을 전별하는 장소로 애용되던 서지는 임진왜란 이후 자취를 감춘다. 커다란 연꽃을 피워내던 넓은 연못은 훈련장과 과시(科試) 장소로 쓰기 위해 메워졌다.

서지 부근에는 경기중군영이 있었다. 오늘날 동명여자중학교 자리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곳은 1876년 체결된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강화도조약)으로 일제의 침략 기지가 되는 아픔을 겪는다. 일본의 초대 주한공사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가 경기중군영을 점거하고 1880년 12월부터 주한 일본공사관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당시 청수관(淸水館)이라 불리던 일본공사관은 그렇게 우리나라 최초의 상주외교공관으로 기록된다.

<경기감영도12곡병(京畿監營圖十二曲屛)> 중 5~12폭 부분

모화관과 경기중군영, 서지 일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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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접관 홍우창이 일본 대리공사(代理公使) 하나부사 요시타다가 수행원 15인, 호위병 15인, 종자 4인과 함께 오늘 신시(申時)에 관소(館所) 청수관으로 들어왔다고 보고하였다. - 《고종실록》, 1879년 4월 24일

청수관이란 이름이 붙은 이유는 정문에서 청명수가 솟아나와 부근 주민의 식수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청수관 주변에 다시 천연지라는 연못도 생겼다. 그러니까 조선 개국 이후 태종이 만든 연못이 임진왜란 이후 메워졌다가 다시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오래가지 못하고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진다.

동명여자중학교 자리는 1876년 조일수호조규에 따라 1880년 최초의 상주외교공관으로 설치된 일본공사관이 있던 자리이다. 이곳은 경기중군영이 있던 공간으로 구내에는 청수관과 천연정(天然亭)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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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6월 9일, 무위영 소속인 옛 훈련도감 군병들은 신식 군대와의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고 임오군란을 일으킨다. 군란에 합세한 난민들도 일본공사관에 난입하여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를 비롯한 일본인을 살해했는데 이때 청수관도 소실된다.

또한 천연지는 1929년 일본공사였던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의 이름을 따 세운 죽첨공립보통학교가 천연지 터로 옮겨오면서 전면 매립되었다. 이 학교는 해방 후 금화초등학교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른다.

서지가 있던 금화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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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에는 서지 외에도 동대문 밖에는 동지(東池), 남대문 밖에는 남지(南池)가 있었다. 세 연못 모두 연꽃이 피었는데, 그 연밥은 궁궐에서 식용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 가운데 서지의 규모가 가장 크고 무성하여 도성 사람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속설에는 세 연못 가운데 서지의 연꽃이 가장 많이 피면 서인 세력이 권력을 잡고, 동지의 연꽃이 성하면 동인이 우세하며, 남지의 연꽃이 잘 피면 남인이 힘을 얻는다는 말이 떠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성문 가까이 있던 세 연못은 안타깝게도 일제의 도심 근대화 개발 정책으로 모두 사라져갔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의 실록(實錄)을 통칭하는 편년체 사서. 태조에서 철종까지 472년간에 걸친 25대 임금들의 실록 28종을 일컫는다. 국왕이 교체될 때마다 사관들이 다양한 자료들을 모아 편찬했다. 1,893권 888책. 필사본·영인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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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관 집필자 소개

《월간축구》, 《골든에이지》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조선의 군주와 역사에 관심이 많아 《월간중앙》과 《한경리쿠르트》 등에 조선 역사의 흥미로운 이야기와 조선 군주의 리더십에 관한 글을 연재한 바..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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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 저자김용관 | cp명인물과사상사 도서 소개

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시작으로 서울의 성곽, 마을, 강으로 이어지는 한양의 역사를 하나하나 탐색한다. 조선의 왕, 지식인,..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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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길 따라 마음 따라 1. 광나루 2. 잠실나루 3. 뚝섬과 두모포 4. 동작나루와 노들나루 5. 마포 6. 양화나루와 난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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