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한국사 인물
열전

장녹수

숙용 장씨, 張綠水

우리가 실록으로 목도하는 역사의 이면에는 다양한 표정이 있다. 앞뒤를 챙겨보면 뻔히 드러나는 사실에 대하여 입을 꾹 다물기도 하고,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곤란한 상황을 변명하기 위해 억지를 쓰기도 한다. 오늘날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요부 중에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장녹수에 관한 기사에서도 그런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중종반정을 일으킨 공신들은 명분 없는 자신들의 거사를 정당화하기 위해 연산군을 중국 하나라의 걸왕이나 은나라 주왕과 같은 희대의 폭군으로 묘사하면서 임금의 광태를 부추긴 여인으로 장녹수를 이용했던 것이다. 그들은 여러 후궁 중 하나에 불과했던 장녹수를 몸을 파는 유녀에 천한 창기 출신이라 조롱하고 그녀의 행세를 침소봉대하여 마치 매희와 달기 못지않은 악녀로 매도했다.

실록을 살펴보면 장녹수가 저지른 극악무도한 죄상이란 것이 당대의 권세가들이 누리던 그것과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 천민인 일가붙이를 면천시키고 관직에 오르게 했으며 사소한 잘못을 저지른 노비를 잔혹하게 벌하고 닥치는 대로 재물을 모았다는 것인데, 내가 하면 로맨스지만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전가의 보도가 그녀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었던 것이다.

그렇듯 비천한 신분으로 임금의 총애를 받은 후궁을 폭정의 조연으로 내세우는 방식은 훗날 벌어진 인조반정에서도 광해군김개시의 관계로 가감 없이 재현된다. 나라를 망친 폭군에게는 마땅히 음부요녀가 곁들여져야 하기 때문일까. 그리하여 오늘날에도 연산군 시대를 다룬 각종 문화상품에서 장녹수는 지독한 염정을 뿜어내며 임금을 걷잡을 수 없는 악행으로 치닫게 하는 팜므파탈로 그려지고 있다.

그녀는 양반의 자식이었다

장녹수(張綠水)는 1502년(연산군 8년) 11월 25일의 실록에 처음 이름이 거론된다. 임금이 장녹수의 부친의 내력을 묻자 승지 이자건이 “장한필은 문과 출신으로 신이 무신년에 경차관으로 충청도에 갔을 때 문의 현령이었습니다.”라고 아뢰었다는 대목이다.

〈국조문과방목〉에 따르면 장한필은 1469년(예종 1년)에 실시한 증광시에서 병과 4위로 합격했는데, 19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1488년(성종 19년)에 종5품의 문의 현령으로 재임했다. 그러므로 장녹수는 어엿한 양반의 핏줄을 이어받았지만 천민의 신분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철저한 신분제도가 시행되었으므로 ‘일천즉천(一賤則賤)’의 법령에 따라 부모 중 한쪽이 천민이면 그 자식 역시 천민이 된다. 그러므로 장녹수는 어머니의 신분을 이어받아 공노비가 되었음에 분명하다. 이는 그녀의 친언니 장복수가 내수사(內需司)의 여종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이런 정황을 종합해 보면 장녹수의 아버지 장한필이 문의 현령으로 재임할 때 관기와 관계하여 장녹수를 낳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장녹수처럼 양반과 천첩 사이에서 태어난 여식을 얼녀(孼女)라 한다. 유명한 기생 황진이가 얼녀였고, 월매의 딸 춘향이도 얼녀였다. 그러므로 장녹수는 어머니의 운명을 이어받아 어릴 적부터 기적에 들어 관기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애달픈 지방기의 나날

조선시대에 관기는 수령이나 벼슬아치들의 공식적인 성노리개였다. 그들은 동기 시절부터 가무음곡을 교육받아 각종 연회에 필수적으로 동원되었다. 기생이 이런 운명을 거역하면 결과는 비참했다. 태종대에 나주 판관 최직지는 관기 명화가 만경 현령 윤강에게 수청 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매질하여 죽인 일도 있었다. 장녹수는 바로 이런 환경에서 청춘을 짓밟혔을 것이다.

관기는 서울 기생인 경기(京妓)와 지방 기생인 지방기(地方妓)로 구분된다. 지방기 중에서 미모와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경기로 뽑아 올렸는데, 세종대에 경기의 정원은 125명이었다. 성종 대에 완성된 《경국대전》에는 3년마다 지방기 150명을 뽑아 올리라는 조항이 명문화되어 있다. 연산군이 여악을 강화하면서 지방기를 대거 모집한 것은 불법이 아니라 통치의 일환이었던 셈이다.

지방기는 관아에 예속된 세습 노예로서 50세가 되어야 은퇴할 수 있지만 대신 조카나 딸을 기적에 입적시켜야 했다. 경기는 궁중의 여악을 관장하는 장악원에 들어가 무용이나 춤을 체계적으로 교육받은 뒤 진찬, 진연 같은 궁중잔치에 동원되었다. 그렇다면 장녹수 역시 지방기로 활동하다가 경기로 선발되어 서울에 올라왔을 것이다.

지방기가 경기로 뽑히게 되면 인생 역전의 기회가 만발했다. 작게는 고관대작들의 소실이 되어 영화를 누릴 수 있고 크게는 임금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고 면천까지 될 수 있었다. 일례로 김해의 관기 칠점선은 태조의 총애를 받아 후궁 화의옹주 김씨로 거듭났다. 보천의 관기 가희아는 태종 이방원의 사랑을 받았다. 그 시절 초궁장은 정종의 총애를 받다가 양녕대군과 놀아난 죄로 신세를 망쳤다. 세조대의 옥부향, 자동선, 양대, 초요경은 4인조 기녀로 출중한 가무실력을 인정받아 왕명으로 면천되었다.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도 풍류를 좋아하여 수시로 궁중에서 연회를 열었고, 이때 활약한 영흥 기생 소춘풍이 기명을 떨쳤다.

이처럼 조선 전기에는 대궐에서 경기들이 참여할 수 있는 잔치가 자주 열렸다. 그런데 왜 연산군은 대궐이 아닌 제안대군의 집에서 장녹수를 만나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겉과 속이 다른 조선 양반들의 이중적인 행태를 근거로 들 수 있다.

성리학을 신봉하던 조선의 위정자들은 신성한 대궐이나 종묘제례에 천한 기생들이 출연하는 것을 부정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세종대에 김종서가 관기 제도 폐지를 주청하자 허조를 비롯한 대부분의 신료들이 사람의 본능은 인위적으로 금할 수 없는 것이므로 창기를 없앤다면 관리들이 여염집의 여자를 범해 많은 인재들을 잃게 될 것이라며 반대했다. 게다가 기생이 없다면 누가 중국 사신의 접대와 변방 군사의 뒷바라지를 하겠냐고 따지고 들었다.

이로 인해 조정에서 기생에 대한 논란이 종식되자 왕족과 고관들은 노골적으로 기생놀이를 즐겼다. 숙직하는 육조의 낭관들은 큰길에서 기생을 끼고 다녔으며, 유생들도 향교에 기생을 데려다 술판을 벌였다. 사대부들은 불법으로 관기를 첩으로 들여앉히기까지 했다.

그런 풍조 때문에 지방기들의 수효가 줄어들자 수령들은 여자 죄수나 유녀들을 기생으로 만들었다. 이런 세태를 통탄한 연산군 대의 시인 어무적은 기생은 사대부들의 잔치 때 노래하고 춤추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데 대간, 재상, 시종들이 비판하지 않는 것은 그들 자신이 여색에 빠져있기 때문이라며 여악을 폐지하자고 상소했다.

이런 경향은 성종의 치세에 도학적인 사림파의 등장으로 다소 진정되기는 했지만 조선시대 최대의 스캔들로 알려진 어을우동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정계에서 소외된 왕족들의 일탈은 여전했다. 특히 제안대군처럼 공인된 인물은 수많은 기생을 거느리고 풍류를 즐기며 세월을 흘려보냈다. 이런 상황에서 지방기였던 장녹수는 경기로 선발되어 서울에 올라온 뒤 제안대군의 집에 머물며 술시중을 들고 있었을 것이다.

천재일우의 행운을 만나다

연산군이 장녹수를 만난 것은 즉위 8년째인 1502년(연산군 8년) 제안대군의 저택이었다. 그 무렵 연산군은 무오사화를 통해 조정에서 사림을 일소한 뒤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여진족이 준동하는 평안도와 함경도 일대에 장성을 쌓게 하여 국방을 강화하고 음란한 남녀를 사형에 처한다는 법률을 제정했으며 원자 이황을 왕세자로 봉하여 정치적 안정을 도모했다.

재위 내내 자유롭고 낭만적인 성품으로 풍류를 즐겼던 연산군은 일찍이 아버지 성종에게 왕위를 빼앗겼던 예종의 둘째아들 제안대군의 집에 드나들었다. 제안대군은 왕위에 다가갔던 종실들의 최후를 직시한 듯 평생 한량으로 살면서 대궐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어머니 안순왕후 역시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보다 서열이 높았지만 인수대비의 성정이 드셌으므로 궐내에서 숨죽은 듯이 지냈다. 아들과 어머니가 궐내와 궐밖에서 잔뜩 웅크리고 살았던 것이다. 연산군은 이런 모자의 처지가 폐비 윤씨와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다고 느꼈던지 종종 미행을 나가 숙부와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그 과정에서 연산군은 빼어난 음률과 교태를 자랑하던 장녹수를 만났던 것이다.

그 무렵 장녹수의 나이는 서른 살 남짓으로 아들까지 하나 있었지만 외모가 방년 16세 처녀처럼 어려 보였고, 목소리가 맑고 청아했다. 그녀를 보자마자 한눈에 반한 연산군은 즉시 궁궐로 데려가 종4품 숙원(淑媛)에 봉했다. 따지고 보면 비천한 노기에 불과했던 장녹수가 하루아침에 왕의 후궁으로 변신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장녹수는 자신에게 다가온 행운을 십분 이용했다. 미색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특유의 교태를 발휘하여 연산군을 침실에 끌어들였고, 어린 시절부터 모성에 굶주렸던 연산군에게 여항의 어머니들처럼 대해줌으로써 마음의 빈칸을 채워주었다. 그 대가로 장녹수는 이듬해 종3품 숙용(淑容)으로 품계가 올랐고, 언니 장복수와 아들이 면천되는 기쁨을 맛보았다. 갑자기 출세한 처제 덕분에 형부 김효손은 함경도 전향 별감이라는 벼슬을 거쳐 7품 무관직인 사정(司正)에 이른다.

흥청망청의 진실

유교국가인 조선에서는 형정과 함께 예악을 바르게 하는 것이 국가기강을 세우는 중요한 수단 중에 하나였다. 그 때문에 일찍이 세종이 예법을 정리하고 박연을 등용하여 아악을 집대성했던 것이다. 당대에 사대부들의 이중성을 목도한 연산군은 그들이 겉으로만 금기시하고 있던 여악을 확대 개편함으로써 또 다른 형태의 왕권 신장을 노렸다.

1505년(연산군 11년) 9월, 연산군은 한성부 서부 여경방에 있던 장악원을 연방원으로 개칭한 다음 지방기를 대거 서울로 불러들였다. 재주 있는 지방기들이 들어오면서 장악원은 아연 활기를 띠게 되었다. 연산군은 수시로 대궐에서 연회를 벌임으로써 그녀들이 가진 능력을 한껏 펼칠 수 있게 했다.

아울러 연산군은 자식이 없는 궁인들을 제사지내는 법이 없어 매우 불쌍하니 예조가 선공감과 함께 빈 땅을 찾아 동서행각을 세워 죽은 궁인들의 신주를 안치하고 제사지내게 했다. 그리하여 나인의 무덤을 여원묘라 칭하고 그녀들의 신주를 모시는 효사묘를 영혜실로 고쳐 불렀다.

훗날 반정공신들은 이와 같은 여악의 확대를 연산군이 황음무도한 군주였다는 구실로 삼았다. 〈연산군일기〉에 의하면 당시 임금은 관기의 명칭을 운평(運平)이라 바꾸고 궁궐에 불러들인 기생을 흥청(興淸)이라 불렀다.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기생은 지과흥청(地科興淸), 왕의 승은을 입으면 천과흥청(天科興淸)이라 불렀다. 흥청의 보증인은 ‘꽃을 보호하고 봄을 보탠다’ 하여 호화첨춘(護花添春), 흥청이 입는 옷은 ‘상서로움을 맞이하는 옷’이란 뜻의 아상복(迓祥服), 흥청의 식량 창고는 ‘화려함을 지키는 창고’라 하여 호화고(護華庫)라고 하였다. 또 각도에 미인을 찾아내는 관리를 채홍사(採紅使), 어린 여인을 찾아내는 관리를 채청사(採靑使)라 했다.

설핏 보면 천하에 난봉꾼 같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궁중 의례를 담당하는 경기들의 명칭을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실록에는 1만 명에 이르는 흥청이 대궐에 출입했다고 하는데 이는 백제 의자왕의 삼천궁녀설 만큼이나 비현실적이다.

최근 소장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흥청은 태평성대를 기리기 위한 여성가무악대였다. 연산군은 호색한으로서 미녀를 탐했던 것이 아니라 낭만적인 절대군주로서 궁중의 여악을 강화했던 것이다. 그런데 후세에 흥청은 분수를 잃고 풍류에 빠져들었다는 뜻의 ‘흥청망청’이란 말로 변질되었다. 〈연산군일기〉에 기록되어 있는 흥청에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시 영응대군의 사위 구수영이 미녀를 구해 바쳐 팔도도관찰사가 되기까지 했다. 이때 후궁 가운데 장소용과 전숙원이 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출입할 때면 요란하기가 왕비의 행차와 같았다. 또 시녀 및 공·사천과 양가의 딸을 팔도에서 뽑아 들였는데 만 명에 이르렀다. 그들의 급사, 수종과 방비라고 일컫는 자도 그 수와 같았다. 연산군은 이들을 7원 3각에 거처하게 했는데 운평, 계평, 채홍, 속홍, 부화, 흡려 따위의 호칭이 있었다. 또 따로 흥청악을 뽑았는데 악에는 세 과가 있었다. 왕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지과(地科), 사랑을 받으면 천과(天科), 사랑을 받았으되 흡족하지 못하면 반천과(半天科)라 하고, 그중에서 가장 사랑을 받은 여인으로 숙화, 여원, 한아 등이 있었다. 왕이 그 속에 빠져 오직 날이 부족하게 여기며 흥청 등을 거느리고 금표 안에 달려 나가 사냥을 하거나 술을 마시며 가무하고 황망했다. 성질이 광조하여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내달려 동쪽에 있다 서쪽에 있다 하므로 비록 가까이 모시는 나인이라도 그 행방을 헤아리지 못했다.’

부각되는 그녀의 악행

연산군은 단종 이후 처음으로 궁궐에서 태어난 원자였다. 준비된 제왕으로서 학문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문학에 재능이 있었고 효성도 지극했다. 그는 즉위 초기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심을 바로잡고 과거를 열어 인재를 등용하는 등 뛰어난 정치력을 선보였다.

연산군 대의 대표적인 사화로 일컬어지는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는 강력한 왕권을 지향했던 연산군과 사림을 축출하려던 훈구세력, 앞의 두 세력을 견제하고 통제하려 했던 사림파의 오랜 갈등이 폭발한 사건이다.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를 통해 사림을 대거 숙청한 연산군은 그들의 근거지인 성균관을 폐쇄해버렸다.

갑자사화의 와중이었던 1504년(연산군 10) 4월 25일, 장녹수의 본가 담벼락에 한 여인이 익명서를 붙인 다음 노비 돌동에게 ‘이 글은 대궐과 관계있으니 떼어 가라’고 말했다. 당시 이극균, 이세좌, 윤필상 등을 불경죄로 치죄하던 연산군은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자신을 적대시하는 궁인들의 소행이라고 판단했다.

얼마 뒤 과연 궁인 전향과 수근비 등이 잡혀오자 연산군은 두 사람을 귀양 보냈다가 능지처참한 뒤 수급을 궁중에 효수했다. 이는 분명히 갑자사화에 관련된 사건인데 사관은 아름다운 두 여인을 시기한 장녹수의 참소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505년(연산군 11년)에는 12월 운평 옥지화가 장녹수의 치마를 밟았다는 이유로 군기시 앞에서 참형을 당했고, 그 머리를 취홍원과 뇌영원에 돌려 보인 다음 연방원에 효시했다. 운평을 우대하던 연산군이 이처럼 지독한 조치를 취한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사관으로서는 연산군의 광태를 부각시키면서 장녹수의 권력 남용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이때 장녹수는 관리들의 청탁을 들어주거나 나라의 선박을 이용해 평안도의 미곡을 무역하여 재물을 모았을 뿐이다. 연산군 말년에 정3품 당상관에 임명된 형부 외에는 쓸 만한 친척도 없어서 정사에는 관여하지도 않았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 폭군에게는 간사한 신하와 요사스런 여인이 필수적인데 연산군에게는 임사홍과 장녹수가 바로 그 역할이었다.

당시 연산군의 총애를 받은 후궁으로는 장녹수 외에도 후궁 전전비나 김귀비 등이 있었다. 그런데 사관은 오로지 장녹수만을 집중 공격하고 있다. 비천한 창기 출신의 후궁이 득세하는 꼴이 그들에게는 눈 뜨고 보지 못할 참사였기 때문일까.

인생은 풀잎 이슬과 같으니

두 차례의 사화를 통해 절대왕권을 확보한 연산군은 자신의 치세가 태평성대임을 확신하면서 혁신적인 통치를 시도했다. 북경에서 나귀를 사와 번식시키게 하는 한편, 민간에 사라능단 직조법을 널리 알리게 하여 민생의 안정을 도모했다. 아울러 사대부들의 장례식에 조상 기간을 하루로 한 달을 갈음하는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를 시행하고, 그 기간에는 육식을 허용하는 획기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는 성균관 유생과 사학의 유생을 규찰하여 성종 이래 사치와 방만을 일삼던 양반사회를 견제했다. 1504년(연산군 10년)에는 비어 있는 성균관에서 소혜왕후를 위한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는 유교의 성지를 더럽혔다는 빌미가 되었다. 1506년(연산군 12년) 8월에는 자신에게 정무를 보고할 때 영의정이라도 존칭을 빼게 했으며, 공자에게 올릴 작헌례를 시행할 때는 그의 직분이 신하라 하여 재배만 하게 했다.

그처럼 연산군은 유교의 복잡한 의례를 배격하고 간소하고 실질적인 의례를 권장했다. 한데 이런 정책은 유학을 신봉하던 사대부들에게 국가 정체성을 파괴하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그리하여 유림을 중심으로 반정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1505년(연산군 11년) 정초에는 그를 폭군으로 규정하며 정변을 선동하는 종루벽서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에 대하여 연산군은 유배 중이던 사림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고, 반정 두 달 전인 1506년(연산군 12년) 7월 17일 풍류와 색보다는 간신들이 나라를 망친다며 대신들이 자신의 정책에 적극 협력할 것을 강요했다. 당시 그는 귀양지에 있는 인사들만 의심했을 뿐 곁에서 아부를 일삼던 신료들의 변심을 알지 못했다.

그 무렵 딸 영수와 두 아들의 어머니였던 장녹수는 다른 후궁들과 함께 연산군의 곁을 지켜주었다. 그녀는 재위 내내 고독했던 연산군의 의중을 헤아리고 깊이 이해해 줌으로써 마음의 피난처 역할을 했던 영리한 여인이었다.

그해 8월 23일, 후원에서 풀피리를 불던 연산군은 문득 ‘인생은 풀잎 이슬과도 같아서, 우리 만날 날이 많지 않구나.’라고 탄식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장녹수와 전전비가 눈물을 머금었다. 이는 총애하는 여인들과 태평성대를 오래 누리지 못함을 애석해하는 제스처였지만 실록의 사관은 그가 곧 파국을 예감한 것처럼 그려놓았다.

운명의 9월 2일 드디어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반란의 핵심 세력은 두 차례의 사화로 원한을 품은 사림이 아니라 어제까지 충성을 다짐하던 조정 신료들이었다. 그들은 사림세력이 거사를 결행하면 제일 먼저 숙청될 인물들이었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연출되자 낙심한 연산군은 저항을 포기했다.

이윽고 대궐을 장악한 반군들은 연산군을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한 다음, 장녹수와 전전비, 김귀비 등을 군기시(軍器寺) 앞으로 끌고 가 참형에 처했다. 그들의 선동에 흥분한 백성들은 그녀의 시체에 돌멩이를 던졌다. 비천한 기생에서 정3품 소용(昭容)의 지위에까지 올랐던 장녹수의 성공신화는 그렇듯 비극적인 최후로 끝났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이상각 집필자 소개

1963년 충남 태안 출신. 시인, 작가. 대한민국항공회 자문위원, 복잡하고 난해한 고전과 역사기록을 알기 쉽게 해석함으로써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역사 교양서를 쓰고 있다. 아울러 조선시대 역..펼쳐보기

출처

한국사 인물 열전
한국사 인물 열전 저자이상각 | 출판사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인물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재미있는 한국사 이야기. 이순신, 장영실, 사도세자 등 널리 알려진 역사인물부터 새로운 조명이 필요한 인물들까지 그들의 업적과 역사적 가치를 .. 펼쳐보기

TOP으로 이동
다른 백과사전


[Daum백과] 장녹수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