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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이화의 인
물한국사

신재효

申在孝

판소리의 아버지

요약 테이블
출생 1812년
사망 1884년

고창에서 태어난 판소리의 대가

전라북도 고창군 모양성 앞에는 동리국악당(桐里國樂堂)이 세워져 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판소리 여섯 마당의 체계를 잡아 작품화하고 사재를 털어가며 많은 소리꾼을 교육한 신재효(申在孝, 1812~1884)를 기리기 위함이다. 고창에 가면 곳곳에 신재효의 전설과 유적이 남아 있다. 지금도 남아 있는 고창 모양성 안에는 그의 추모비가 서 있고 성문 입구에 있는 신재효의 생가를 지방문화재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으며, 그 집 안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돌비가 서 있다. 또 그의 묘소는 고창읍 내 성두리에 있다. 이처럼 고창에는 신재효의 유적이 널려 있어 ‘신재효 판소리’의 고장으로 알려졌다.

그의 생애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조선시대 천대받던 아전 출신인 데다가 ‘상놈’들이나 부르는 판소리에 평생 매달려 있었으니 시문집이나 연보 같은 기록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에 관한 단편적인 글과 전설을 종합해 그의 생애를 알아보자.

그의 신상을 알려주는 호적 단자(單子)가 전하는데 그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광흡(光洽)이요, 평산 신씨였다. 그리고 조상 대대로 경기도 고양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한양의 경주인(京主人) 노릇을 했다고 하니 중인이었던 셈이다. 경주인은 중앙과 지방의 연락사무를 맡기기 위해 수령이 서울에 보낸 아전 또는 향리였다. 그의 아버지는 경주인 노릇을 하면서 고창과 인연이 닿아 고창으로 내려와서 관에서 하는 약방을 맡아 보았다.

지금 그의 생가로 알려져 있는 고창읍성인 모양성 입구에 있는 집의 규모는 여염 농가보다 조금 크긴 하지만 부호의 거처였다고는 볼 수 없다. 그의 나이 일흔한 살 때의 호적 단자에도 주소가 고창 천남면 서문리로 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그는 이 집에서 태어나서 이 집에서 생애를 마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고창에서 자라면서 글을 배웠고, 자라서는 고창현감인 이익상 밑에서 구실아치인 이방 노릇을 하다가 호장이 되었다. 그가 몇 년 동안 이 자리를 맡아 일을 했는지도 확실히 전해지지 않는다. 아마 인정 많고 남 돕기를 잘했다는 그의 성품으로 보아 그 당시 일반화되어 있던 호장(戶長, 구실아치의 우두머리)의 위세는 별로 부리지 않았던 것 같다.

판소리 여섯 마당을 정리하다

비록 아전 벼슬을 지냈지만 젊을 때부터 학식이 뛰어나고 풍류를 즐긴 멋쟁이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런데 그가 호장 노릇을 할 때 관아에서 잔치를 자주 벌였다. 그는 잔치를 위해 원근 여기저기에서 소리꾼을 불러들였고, 그들의 소리를 들으면서 여러모로 고칠 내용이 많다고 여겼다. 그래서 중대 결심을 했다. 몇 살 때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호장을 그만둔 뒤부터 50대 중반 이후에 판소리 사설을 정리하고 소리꾼들을 가르친 것으로 확인된다.

신재효는 자신의 집을 ‘동리정사(桐里精舍)’라고 이름 붙이고 소리청을 만들었다. ‘동리’는 그의 아호이다. 그는 이 소리청에 소리꾼들을 불러들였다. 당시 소리꾼들은 대개 무식해 판소리 가사의 내용을 이해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한자의 음도 제멋대로 부르고 있었다. 그는 소리꾼들에게 문자를 가르치고 판소리의 정확한 발음과 뜻을 일러주었다. 물론 소리꾼들이 먹고 자는 일, 때로는 그들 가정의 생활비까지도 대주었다. 천석꾼이라 불렸으니 별로 모자람이 없었을 것이다.

신재효는 이들에게 소리를 가르치는 스승으로 동편제(東便制)의 명창 김세종을 초빙했다. 그와 김세종은 소리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동편제 소리는 장단에 충실하고 박자의 변화를 엄격하게 제한한 것에 반해, 서편제 소리는 잔가락이 많고 박자의 변화도 많아, 두 편의 소리가 달랐다. 이 차이를 종합하고 조화를 이루게 했다.

그리고 그는 판소리의 가사가 난잡하기도 하고 조리가 없기도 하다고 여겨 이에 체계를 세우고 정리하기도 했다. 곧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 〈변강쇠타령〉등의 가사를 정리하고 이를 제자들에게 해설하여 내용을 이해하게 한 것이다. 그 당시 유행하던 판소리 열두 마당 중에 위의 여섯 마당만 온전히 전해지고 있었다.

그는 소리청에서 명창들과 어울려 술과 벗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이들 제자가 뒷날 명창이 된 김세종, 정춘풍, 진채선, 허금 등이었고 이들 명창이 오늘날의 판소리를 전수했다.

정현석이라는 사람은 당시의 소리청 전경을 이렇게 전한다.

“멀고 가까움을 가릴 것 없이 배우러 몰려든 사람들이 매일 그의 집 문을 꽉 채울 정도였는데, 모두 재워주고 먹여주었다.”

정현석은 또 이경태라는 소리꾼에 대해서도 썼다.

“자음(子音)이 분명하고 소릿말에 조리가 있는 것으로 보아 물어보지 않아도 선생의 제자임을 알 수 있었다.”

이만큼 그의 교육은 철저했던 것이다.

그는 또 유달리 인정이 많아 가난한 사람을 잘 도와주었고 아무리 천한 사람이라도 깍듯이 대해주었다. 그 자신이 아전 출신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선비 대접을 받는 처지인데도 거들먹거리지 않는 이런 태도는 바로 그의 인품을 나타낸다.

어느 날, 신재효는 한 선비와 함께 길을 가다가 갓 만드는 상놈 출신 갓장이(笠工)를 만났다. 그는 이 갓장이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다정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러자 그 선비가 난처해하면서 나무랐다.

“체신머리 없이 상놈에게 그토록 다정하게 대하는가.”

그러자 신재효가 대꾸했다.

“양반은 통갓을 쓰고 뽐내며 깃을 귀하게 여기면서도 정작 갓 만드는 사람을 얕보는 버릇이 있네. 선비가 할 짓이 아니야.”

그는 판소리 여섯 마당을 정리했고, 〈도리화가〉, 〈성조가〉, 〈광대가〉, 〈오섬가〉, 〈어부사〉, 〈방아타령〉, 〈괘씸한 양국놈가〉 등 30여 편의 작품을 지어 남기기도 했다.(《신오위장본》, 서울대 도서관소장)

그런데 그는 여섯 마당을 정리할 때 야한 언어나 음담패설 등을 손질해 민중정서를 순화했고 나머지 것들은 아예 없애버렸다고 한다. 그 결과 판소리를 변질시켰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다시 말해 벼슬아치나 양반들의 비위를 맞추려 변경시켰다는 뜻이다.

경복궁에서 울린 신재효의 〈방아타령〉

그런데 그의 작품을 서울 경복궁에서 연주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동리정사와 경복궁. 그 거리는 너무도 까마득했다. 당시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위해 온 국력을 들여 경복궁의 중건을 마친 참이었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역사를 벌일 때 많은 노래를 지어 일꾼들에게 부르게 했다. 〈경복궁타령〉도 그중 하나로 오늘날까지 전한다. 이는 대원군이 노랫가락을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꾼들의 능률을 올리고 노동의 즐거움을 느끼게 만들려는 의도도 있었다.

이 경복궁 역사가 끝나자 경회루에서 축하잔치가 벌어졌는데 이때 신재효의 제자요 연인인 진채선이 이 자리에서 아리따운 몸짓을 하며 흥겨운 〈방아타령〉을 불렀다. 이 타령은 바로 신재효의 작품이었다. 누구보다도 지음(知音)에 밝은 흥선대원군에게 진채선이 금방 눈에 띄지 않을 리 없었다. 진채선은 단번에 흥선대원군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운현궁에서 ‘대령기생’이라 하여 두 명의 명창을 묶어두었는데 진채선을 여기에 끼게 했다. 진채선은 이렇게 하여 신재효에게 돌아올 수 없었다.

신재효는 그리운 정을 이기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는 정인을 향한 그리움을 담은 〈도리화가〉라는 노래를 엮어 진채선에게 보냈다. 그때 신재효의 나이 회갑을 앞둔 쉰아홉 살, 진채선의 나이 꽃다운 스물네 살이었다.

신재효의 명성은 진채선에 의해 흥선대원군에게 알려졌다. 그리하여 신재효에게 오위장(五衛將)이라는 무관직이 내려지게 되었다. 오위장은 중앙군인 오위의 최고 책임자인 종2품 장수였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와 오위를 혁파한 뒤 이 이름을 그대로 두고 실직이 아닌 명예직으로 삼았다. 명예직이라 해도 정3품의 당상관에 해당되고 때때로 궁궐에 입직했다. 당시 시골 호장 출신의 ‘판소리 선생’에게는 파격적인 대단한 영예였던 것이다. 단번에 중인 신분에서 양반 신분으로 상승한 것이다. 그가 이 벼슬을 받고 얼마나 감격했는지,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뒤 이 직함을 누리면서도 거들먹거리지 않았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판소리전집

판소리연구가인 강한영 선생이 신재효 판소리 여섯 마당을 정리해 해설을 붙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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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과 함께 한숨 짓고 눈물 흘리다

1876년 큰 흉년이 들었을 때 그는 재산을 풀어 빈민들을 잘 돌보아주었다고 하여 통정대부라는 품계를 받았다(죽을 때는 가선대부로 올려 받았다). 이리하여 신재효는 전국에서 유명한 인물이 되었고 향리에서는 명망가가 되어, 위세 높았던 고을 원들도 그의 앞에서 ‘노리(老吏, 늙은 아전 출신)’라고 깔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를 떠받드는 처지가 되었다. 이런 결과는 뒤에서 그를 뒷받침한 진채선의 수단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진채선은 일구월심 스승이요 정인인 신재효를 위해 정성을 다했던 것이다.

그 뒤 신재효와 진채선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그러나 신재효의 여성관은 판소리 사설 곳곳에서 드러난다. 신재효는 〈춘향전〉에서 월매의 입을 통해 이렇게 늘어놓고 있다.

재전일 생각하면 지금 것들 우습더구 우리 처녀시절에는 이십먹은 계집애도 서방생각 안하더니 요샛년들 우습더구 열다섯 안팎되면 젖통이가 똥도도름 장기궁짝 되어가고 궁둥이가 너부데레 소쿠리 엎어논듯 봉숭아꽃 벌어지면 머리글고 딴홰내고 ······ 뒷동산에 두견 울면 한숨 쉬고 잠 안자기 우리집 딸아기도 그네뛰는 핑계하고 바깥출입 팔짝팔짝 못듣던 사람소리 방 안에서 소근소근 정녕 무슨 탈이 났제······.
- 강한영 《판소리사설집》

당시 자유분방한 여속(女俗)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너무나도 사실적이다. 봉건제도의 질곡에서 신음하는 민중의 삶을 그는 사설 곳곳에서 날카롭게 깔아놓고 있는 것이다. 현실을 보는 그의 비판정신이 살아 꿈틀대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정리한 사설은 한문투가 지나치게 많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고 선비투를 낸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그는 우리의 사설문학을 정리 · 집대성했다 하여 ‘한국의 셰익스피어’라고까지 추앙받기도 한다. 그의 삶에 대해 당시 고창현감이었던 유청람은 이런 시를 써서 보냈다.

만 권의 책을 쌓고 한 몸 편안히 지내면서
남은 재물 남김없이 주린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네
······
그윽한 향기 감도는 꽃밭에 난초를 키우나니
태수(太守, 지은이 자신을 가리킴) 나날의 삶이
그대 배우기 어렵겠네

그는 찌든 현실을 이렇게 내면으로 승화시켰으며 강한 행동적 저항을 접어두고 노래 속에서 민중의 삶을 찾으려 했다. 오늘날 그를 기리는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 신재효는 고매한 예술가라기보다는 민중과 애환을 함께하며 한숨 짓고 눈물 흘린 인간이었다.

지금 그의 생가에 있는 연못물은 고여서 썩고 있다. 넘쳐 흐르게 되어 있는 연못물이 물길을 막은 탓에 원형을 잃고 만 것이다. 혹시라도 그의 공로가 이 물을 닮아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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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집필자 소개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와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우리 고전을 번역하고 편찬하는 일을 했으며, 서원대, 성심여대 등에서 역사학을 강의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역사잡지 <역사비평&..펼쳐보기

출처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 저자이이화 | cp명주니어김영사 도서 소개

역사를 이끈 왕과 신화들, 새 세상을 꿈꾼 개혁가와 의학 및 과학자들, 학문을 꽃피운 사상가와 예술가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와 개화기 지식인 등 고대부터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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