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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이화의 인
물한국사

백광현

白光炫

종기 치료의 미다스

요약 테이블
출생 미상
사망 1697년

마굿간에서 한 임상실험

비록 의원이 천대받던 시절에도 태의(太醫, 어의)가 되었다는 것은 여간한 출세가 아니다. 백광현(白光炫, ?~1697)도 태의가 되었으니 조선시대 사람으로서는 성공한 의원이었다. 그러나 그가 조정에 들어가기 전에는 어렵게 생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백광현은 인조 때 평민 집안의 서자로 태어났다. 이런 신분에 벼슬은 꿈도 못 꾸었을 것이다. 성품이 온후하고 조신했던 그는 아무런 불평없이 살아서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는 키가 크고 수염이 좋고 눈에는 빛을 발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잘생긴 사람이 가난 때문에 늘 삼베로 지은 옷에 다 떨어진 갓을 쓰고 다녔다. 또한 먹을 것이 없어 구걸하거나 돈을 빌리러 다녔기에 사람들은 그와 만나는 것을 싫어했다. 아이들도 길거리에서 그를 보면 발로 차거나 손가락질하며 비렁뱅이라고 욕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백광현은 성내는 빛 없이 이들을 고즈넉이 바라보며 웃기만 했다고 한다. 이런 그가 어떻게 의술을 배웠을까?

처음에 그는 말의 병 치료에 전념했다고 한다. 당시 말은 모든 교통수단의 기본이어서 말이 병들거나 상처가 나면 재산 한 귀퉁이를 잃는다고 해서 대단한 정성으로 간호했던 것이다.

그는 말의 병을 치료하면서 특별한 처방이나 약을 쓰지 않고 침으로만 고쳤다. 게다가 말의 병을 다스리는 옛 방서(方書)의 처방을 전혀 따르지 않았다. 그를 두고 글자도 모르는 무식쟁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아마 옛 의학서적을 읽을 문자지식도 없었던 것 같다.

그는 말병을 침으로 치료하면서 경험을 쌓아 치료법에 익숙했다. 그 치료법을 사람에게 적용했을 때 묘한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사람의 종기 치료에 나섰고 차츰 종기 치료 전문가가 되었다. 예전에는 종기로 죽는 일이 많았다. 정조 임금도 종기로 죽었다.

신의 경지에 이른 종기 치료

그는 종기 치료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마을을 돌아다니며 종기 치료에 전념한 결과, 종기에 대한 그의 경험과 지식은 더욱 해박해졌고, 침놓는 방법도 더욱 익숙해졌다. 이에 대해 이런 기록이 전한다.

옛 방서에는 독이 많고 뿌리가 있는 모든 부스럼에 대한 치료법이 제대로 없었지만, 백광현이 종기에 손대면 반드시 큰 침을 사용하여 종기를 째서 터뜨려 독을 뽑고 뿌리를 뽑아내어 죽을 사람을 살려 놓았다.
- 정내교 《완암집》 〈백태의전〉

그는 종기를 째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그는 바로 외과의 또는 집도의(執刀醫)였다. 이런 방법에도 처음에는 모험이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처음 그가 침으로 종기를 쨀 때 지나치게 맹렬해서 간혹 사람을 죽이는 수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이런 치료법으로 많은 사람을 살려내자, 병자들이 날마다 그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백광현은 더욱 많은 경험을 쌓으며 정진했다. 이런 탓에 그의 이름이 널리 퍼져 ‘신의(神醫)’라는 명성을 얻었다. 가난에 찌들어 비렁뱅이 짓을 하던 백광현이 끊임없는 노력으로 ‘신의’의 자리를 얻어 낸 것이다. 그가 언제 어의가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670년(현종 11)에 임금의 병을 잘 돌봐 품계를 높여 주는 상을 받았다고 《현종개수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신의라는 명성을 얻을 무렵 조정에 발탁된 것으로 보인다각주1) .

그는 어의가 되고 나서 많은 공을 세웠다. 의원으로서 최고의 영예인 수령이 내려진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숙종은 1684년(숙종 10)에 그에게 특별히 강령현감의 벼슬을 내리고 포천현감으로 자리를 옮겨 주었다. 그를 서울에 가까운 포천현감으로 삼은 것은 필요할 때마다 그를 불러올리려는 뜻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이때에도 조정의 여론은 들끓었다.

의관을 수령에 임명하는 조처가 여러 번 임금의 윤허(임금이 신하의 청을 허락함)에 나왔는데 조정 여론이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백광현의 경우에는 더욱 나빴다. 백광현은 천한 신분으로 조정에 나왔고, 또 문자도 모르는데 수령직을 제수하여 사람들이 더욱 해괴하게 여겼다. 이를 반대하는 사헌부의 논의가 거듭 일어났지만, 임금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 《숙종실록》 16권, 10년 5월조

이처럼 문관 위주의 관인사회에서는 끊임없이 의관의 공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누르려고 했던 것이다.

이와 달리 백광현은 신분의 높낮이나 친분 여부를 따지지 않고 병자만 있으면 어디든 달려가 온갖 정성을 기울여 치료했다. 그는 늙은 나이에도 주어진 천직을 다해 치료했다. 사람들은 수령이라는 귀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결코 치료를 중단하지 않는 그를 두고 ‘그의 천성’이라고 칭송했다. 앞 시기에 살았던 태의 양예수가 대갓집에서 부르면 다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맞선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여항시인으로 이름 높은 정내교(鄭來僑)는 중인이었는데, 그의 외삼촌이 입술에 종기가 나서 백광현에게 청해 치료를 부탁했다. 백광현은 입술의 종기를 살펴보고 말했다.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이틀 전에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급히 초상 치를 준비를 하십시오. 오늘 밤에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이 말처럼 과연 그날 밤에 정내교의 외삼촌은 죽었다. 이때 백광현은 나이가 아주 많았다. 그런데도 치료법과 병세를 보는 눈은 흐트러짐이 없었고 털끝만큼의 실수도 없었다. 그는 이 일로 신의라는 칭송을 들었고, 정내교는 그의 문집에 백광현의 약전을 써서 오늘날에 전해지고 있다.

이 무렵 병조판서를 지낸 명신(훌륭한 신하) 윤지완(尹趾完)이 다릿병으로 크게 고생을 겪고 있었다. 숙종은 남달리 윤지완을 아꼈기에 백광현에게 부탁해 그를 치료하게 해 주었고, 백광현은 윤지완의 병을 정성껏 돌보아 완치하게 했다. 이처럼 그는 종횡으로 활약했던 것이다.

백광현이 없어서 죽는구나

백광현은 늦은 나이로 많은 업적을 남기고 죽었다. 만년에는 여느 의원과 달리 고난도 겪지 않았다. 귀양살이를 한 적도 없고 치료를 잘못해서 감옥에 갇힌 적도 없었다. 비록 젊은 날에는 어려운 생활을 했지만 만년에는 행복한 삶을 누렸다. 이것은 그의 인품 탓이기도 했고 뛰어난 종기 치료술 탓이기도 했다.

그의 종기 치료법은 아들 흥령(興齡)과 제자인 박순(朴淳)이 전수받았다고도 한다. 그렇게 그가 죽고 난 뒤에 이들 두 사람이 종기 전문가로서 치료에 나섰다고 한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두 사람의 치료가 백광현에 미치지 못한다고 수군거렸다. 이런 까닭에 종기가 나서 죽게 되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백광현이 없으니 죽고야 마는구나.”

이처럼 그는 신화가 되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그가 문자를 모른 탓에 독창적인 ‘종기 치료법’을 책으로 펴내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허준이나 이제마와 다른 점이다. 그저 구술과 경험만을 제자에게 전해 주었기에 그의 정확한 치료법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조선왕조가 의원을 천시했기 때문이다. 나라에서는 흔히 선비들의 보잘것없는 시문집을 관가의 비용으로 간행하면서도 이런 의서의 간행을 외면했던 것이다. 다만 정조 때 피재길(皮載吉)이라는 의원이 나와 고약을 발명하면서 그의 종기 치료법은 진일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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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집필자 소개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와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우리 고전을 번역하고 편찬하는 일을 했으며, 서원대, 성심여대 등에서 역사학을 강의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역사잡지 <역사비평&..펼쳐보기

출처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 저자이이화 | cp명주니어김영사 도서 소개

역사를 이끈 왕과 신화들, 새 세상을 꿈꾼 개혁가와 의학 및 과학자들, 학문을 꽃피운 사상가와 예술가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와 개화기 지식인 등 고대부터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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