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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이화의 인
물한국사

소현세자

昭顯世子

부왕의 미움을 받은 진보주의자

요약 테이블
출생 1612년
사망 1645년

눈물을 뿌리며 청나라로 끌려가다

비운의 왕자로 흔히 호동왕자와 마의태자 그리고 소현세자와 사도세자를 꼽는다. 그들은 모두 정치의 희생양이었다. 1637년(인조 15) 2월 8일 아침이었다. 벽제로 가는 서오릉 길가에는 빽빽이 들어선 사람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산천을 울리고 천지를 진동시켰다. 26세의 세자는 영영 이별할지도 모르는 부왕에게 하직하는 길이었다. 부왕은 항복한 임금이요, 아들은 오랑캐에게 인질로 끌려가는 몸이었다.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45)는 승리에 도취하여 거들먹거리며 앞장선 적의 장수 구왕(청 태종의 아홉째 동생)을 뒤따랐고, 인조는 눈물을 삼키며 발길을 돌려야 했다. 소현세자는 아내와 동생과 계수 그리고 그 밖의 신하들을 합쳐 197명을 이끌고 삭막한 북쪽 땅으로 끌려갔다.

인조가 환궁하는 길가에는 오랑캐에게 끌려가는 수많은 백성들이 울부짖었다. 인조 때의 이 비극은 반정 때로부터 비롯되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쫓아낸 서인 조정은 철저한 존명배청(尊明排淸)의 정책을 폈다. 곧 명나라를 아버지와 임금으로 섬기고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깔보면서 함부로 대했던 것이다. 청나라가 요동을 차지한 뒤 쫓겨 온 명나라 장수 모문룡은 우리나라 철산의 가도에 들어와 진을 치고 청나라의 후방을 교란했다. 조정에서는 모문룡을 도와주기도 하고 명나라 군대에 배를 보내 돕기도 했다. 광해군이 맺은 청과의 약속을 깡그리 뒤엎은 것이다.

한편 이괄의 난이 진압된 뒤, 그 잔당들은 청나라로 도망가 친청파인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왕이 된 것은 부당하다고 꼬드겼다. 이에 청나라는 명나라에 대한 전면 공격을 잠시 중단하고 후방의 적인 조선을 먼저 치기로 했다. 1627년(인조 5) 1월 14일, 3만의 청나라 군대는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구실로 물밀듯이 내려와 11일 만에 황주에까지 이르렀다. 황급해진 조정은 강화도로 허겁지겁 피난 갔고, 소현세자는 16세의 나이로 전주에 가서 임시로 조정을 설치하고 의병을 모집했다.

강화도에 갇혀 있던 왕은 어쩔 수 없이 강화를 교섭할 수 밖에 없었다. 청나라는 오래 버티며 힘을 소모할 필요가 없었기에 이 강화를 받아들였다. 서로 형과 아우의 나라로 굳게 맹약했고, 아우가 된 대가로 조선은 청과 명나라에 어느 정도 중립을 지킨다는 허락을 받아 냈다. 나라가 이처럼 모욕을 당하면서도 명나라에 대한 은의가 이토록 철저했으니, 명나라에서 보면 조선이 천하에 다시없는 아들이요, 신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뒤로 약속이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청나라는 이것저것을 요구했으나 조정은 모두 거절하는 한편 명나라를 끊임없이 도왔다. 이럴 즈음, 청 태종이 황제의 존호를 선포하고, 그들의 사신 용골대 등을 조선에 보내어 조선에서도 청 태종을 천자로 받들라고 요구해 왔다.

조선의 척화주의자들은 이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것은 유가적 사대명분론에 결정적인 손상을 입히는 일로 역적이 하는 짓거리에 속한다고 보았다. 하늘에는 해가 둘이 없고 사람에게는 아버지가 둘이 없듯이 신하에게는 임금이 둘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조선 조정에서는 국서를 물리치고 청의 사신을 만나지 않았고, 척화주의자들은 용골대 일행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용골대 일행은 강한 반발에 밀려 허겁지겁 도망쳤다. 임금은 청에 대해 선전을 포고하고 방비령을 내렸다.

임금이 오랑캐에게 무릎 꿇다

청나라는 10만 군사를 동원하여 구왕을 우두머리 장수로 삼고 1636년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넌 지 6일만에 서울로 들이닥쳤다. 적이 서울로 쳐들어오기 하루 전에 적의 침입을 보고받은 왕은 강화도로 도망치려다가 그쪽 길이 이미 적군에 막힌 것을 알고 할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왕의 선전포고가 허세였음이 여실히 증명된 판세였다. 적들은 서울로 들어와 약탈 · 방화 · 강간을 일삼았고, 닭 · 개 · 거위 따위까지 쓸어 갔다.

남한산성의 사정은 어떠했는가? 먹을 것을 미리 준비하지 않아 임금은 닭다리 하나로 하루를 견뎠고, 임금이 앉는 자리에 거적을 깔아야 했다. 적은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성위에서 바라보기 좋은 지점을 골라 인가에 불을 지르기도 하고 여자들의 옷을 벗겨 죽이기도 했다. 성 안에서는 남쪽의 의병을 기다리며 버텼지만 감감 무소식이었다. 그런데도 척화파 김상헌 등과 주화파 최명길 등은 두 패로 갈라져 강화냐, 결전이냐를 놓고 입씨름을 벌이고 있었다.

1637년 정월, 설날 아침이 밝았으나 남한산성에 갇혀 있는 임금은 종묘에 제사를 지내기는커녕 아침 수라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었다. 적들은 이날, 뒤따라온 청 태종의 지시에 따라 탄천에 기세 좋게 밀어닥쳐 30만의 군대를 모아 진을 치고 남한산에 올라가 성 안을 살폈다. 조신들은 간담이 서늘해져서, 정초 예물로 소와 술을 겨우 마련해 적들에게 갖다 바쳤다. 그러면서 아울러 적의 형세를 알아오게 했다. 그러나 적은 본국에서 황제가 왔으니 물건을 함부로 받을 수 없다고 온갖 공갈을 늘어놓으며 쫓아 보냈다.

이때 주화론이 우세하자 김상헌은 결코 화의를 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최명길은 성을 내며 “국가를 보존한 뒤에야 와신상담의 계획을 도모할 수 있다”고 소리쳤다. 어쨌든 설이 지난 이튿날, 화의를 얻기 위해 홍서봉 · 이경직 등의 대신이 적진으로 갔는데, 적은 황제의 이름으로 이런 글을 보내 왔다.

정묘년 이후 10년간 너희 나라의 군신은 우리를 배반하여 도망한 무리를 받아들여 명나라에 바치고 명나라 장수가 들어가자 군사를 일으켜 주기도 하고 편안히 살게도 했다. 우리의 원병이 가도에 이르렀을 때에 너희 군사가 대적했는데 이것이 군사를 동원하게 한 단서를 너희 나라가 또한 일으킨 셈이다. 명나라가 배를 수색하여 우리를 침범할 때에 너희 나라가 달라붙었고, 짐이 배를 수색하여 명나라를 치고자 할 때에는 곧바로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유달리 명나라를 돕고 우리를 해치려 한 짓이다.

또 우리의 사신을 너희 왕은 만나지 않았고 우리의 국서를 끝내 열어보지 않았다. 짐의 사신이 우연히 너희 나라 왕이 평안도 관찰사에게 보낸 밀서를 얻었는데, 거기에 “정묘의 변란 때에는 임시방편에 따라 복속을 허락했지만 이제는 정의로써 결단하여 관문을 잘 지키고 수비를 철저히 할 것을 각 고을에 잘 타이르노니 충의의 군사는 각각 지시를 잘 따르라”고 했다.

그 밖의 말들을 모두 들기가 어렵도다. 짐이 이 때문에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너희들이 도탄에 빠진 것은 실로 내가 원한 것이 아니라 너희 나라 군신이 너희 나라 백성에게 재앙을 만나게 한 것이다. 너희들이 생업에 종사하며 편안히 살고자 한다면 망령되이 도망가서 우리에게 창끝을 대려고 하지 말라.

만약 거역하는 자는 도륙할 것이요, 따르는 자는 품을 것이며 도망하는 자는 잡을 것이나, 어디 있거나 귀순하는 자는 추호도 범하지 않고 반드시 두터이 길러 줄 것이다. 너희 무리에게 잘 타일러 모두 들어 알게 하노라.
- 《인조실록》 권34, 15년 정월 임인조

이것은 강화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항복을 명령하는 글이다. 겉보기는 이쪽의 배반을 나무랐으나 극도의 모욕을 주는 언사였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쥐새끼처럼 성 안에 갇힌 채 백성들이 성 밖에서 적들에게 연일 겁탈을 당하고 도륙을 당해도 손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척화로 맞서 버텼다. 그리고 화의의 국서를 보내면서도 상투적인 대명(對明) 의리를 늘어놓으며 명분을 세워 달라고만 애원했다. 이에 청나라에서는 또 이런 글을 보냈다.

기미년에 까닭 없이 우리를 침노했을 때에 짐은 너희 나라가 싸울 줄을 아는가 하고 생각했고, 이제 또 싸움의 실마리를 열기에 너희 군사가 다시 정예하게 단련된 줄 알았지, 누가 아직도 군사가 제대로 단련되지 못했을 줄을 알았겠는가? 너희 나라의 환란을 구할 자는 명나라뿐이니 천하 모든 나라의 군사가 어찌 모두 이럴 것인가? 곤궁하게 산성을 지키며 운명이 조석에 달려 있으면서도 오히려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고 이런 빈말을 하니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 《연려실기술》 〈인조조 고사본말〉

어쩌면 우리 사정에 대해 핵심을 찔러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끝내 1월 30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벼슬아치 500명을 이끌고 송파의 삼전도로 나아가 항복했다.

청 태종은 북쪽의 높은 단상에서,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초라한 조선의 임금을 바라보았다. 이제 명나라와의 군신관계가 청나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인조는 여기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뒤의 효종) 내외, 척화파의 주동자들, 대신의 딸들을 인질로 보냈으며, 막대한 공물을 바치고 명나라 정벌에 적극적인 지원을 하겠다는 구절을 항복문서에 써야만 했다. 이때 인질 · 포로로 끌려간 우리 백성의 수는 헤아릴 수 없었는데, 뒤에 속(贖)을 바치고 풀려난 수만 해도 63만 명이었다.

이리하여 소현세자는 8년이라는 긴 인질생활이 시작되었고, 이것은 조선에 또 다른 비극을 불러오는 꼬투리가 되었다.

북경에서 아담 샬을 만나다

심양(오늘날의 요녕성 선양으로 청의 도읍지였음)에는 소현세자 일행이 머물 관소(館所)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 관소에서 세자는 세자빈 강씨, 동생 봉림대군과 그 부인 및 수행원 300여 명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처음에는 감시를 엄중히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인질에 걸맞지 않은 극진한 대우를 해서, 세자는 그곳 왕족과 어울리며 황제와 함께 사냥을 다니기도 했다. 그러면서 청은 조선에게 명나라 정벌에 군사를 내라고 위협과 공갈을 일삼기도 했다. 곧 회유와 공갈의 양면수단을 쓴 것이다.

소현세자는 청의 동정을 낱낱이 의주부윤 임경업 등을 통해 조정에 보고했고, 때로는 비밀리에 정보를 보내기도 했다. 그는 여러 가지 일로 바빴다. 곧 임경업이 거느린 군사가 출병하여 명을 치는 데 돕기도 하고, 김상헌 등의 척화파를 잡아 심양에 가두기도 했다. 또한 포로의 송환문제에도 개입했고, 우리의 부녀자들이 그곳 시장에서 매매되는 꼴도 보아야 했다. 이런 일은 세자의 수완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는 하루도 편할 날 없이 시달리면서 이런 일들을 처리해 나갔다. 심양의 관소는 조선의 대사관이었고, 세자는 조선의 대사였던 셈이다.

세자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나오지 못하다가 1640년 3월, 왕의 병이 깊다고 하여 고국에 다녀오라는 허락을 받았다. 4년 만에 아버지를 만난 세자는 말문이 막혀 하염없이 울었고 부왕도 엎드려 우는 세자의 등을 어루만지며 울었다(《인조실록》 권40, 18년 3월 정해조). 부자는 만난 지 보름 만인 4월 2일 또다시 헤어져야 했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부자가 남다른 정을 보이고 있었다.

1644년 세자가 세자빈 강씨와 함께 잠시 귀국 허락을 받고 환국했는데 이때는 이미 인조의 마음이 세자를 떠난 것 같았다. 당시 세자빈의 아버지 강석기가 죽고 난 뒤였는데도 세자빈이 아버지의 빈소에 가는 것을 법도가 아니라며 허락하지 않았다. 또 세자빈이 심양에서 재물을 모은 일, 세자가 조정에 올리는 장계를 세자빈이 옆에서 고친 일 따위가 왕의 비위를 거슬렀고 이런 세자빈을 타이르지 않고 내버려 두는 세자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1644년 4월, 청나라는 군사를 거느리고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명나라로 쳐들어갔다. 별다른 저항없이 북경을 들이친 청군은 명나라를 멸망시켰다. 끝내 묵은 천자의 나라는 망하고 말았다.

세자가 처음 우리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북경 함락에 참여했을 때에는 22일 동안 머물렀고, 다시 심양에 돌아왔다가 청의 세조가 같은 해 9월에 북경으로 새 도읍을 정할 때에 따라가 70여 일을 머물렀다. 이때 세자는 북경 시내를 자유로이 왕래하면서 북경에 와 있던 서양의 천주교 선교사들을 만났다. 선교사들 중에는 그 유명한 아담 샬도 있었다.

세자는 아담 샬과 교류하면서 서양의 천주교를 알았고, 서양의 과학문명에 눈을 떴다. 아담 샬로부터 천주상(天主像)과 서양의 역서 및 과학책을 선물로 받은 세자는 그것들을 면밀히 검토했고 또 심취했다. 세자는 특히 역법에 심취했는데, 동양과 서양의 역법이 크게 다른 점을 발견하고 우리의 천문학이 초보단계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런 편지를 아담 샬에게 보냈다.

어제 천만 뜻밖에도 보내 주신 귀중한 구세주 천주님의 성화(聖畵)를 비롯하여 각종 양학(洋學) 서류 등의 선물을 배수하옵고 제가 얼마나 기뻐하오며 감사하옵는지 귀하는 상상조차 못하실 것입니다. 만강의 사의를 으레 전달치 못함을 황공히 여기나이다.

그 몇 가지를 우선 급히 읽었사온 바, 거기엔 정신수양과 덕성함양에 적합한 도리가 탁월 명확하게 구비돼 있음을 즉각 깨닫겠나이다. 저희 나라는 학문에 대한 광명이 결핍된 나라이온지라 오늘까지 이러한 진리를 모르고 살아왔나이다. 천주님 성화의 그 존엄한 모습은 그를 앙모하는 자에게 심오한 인상과 감회를 자극하옵는데, 이것을 벽상에 걸어 모시고 우러러 바라보오니 앙견자(仰見者)의 마음이 평온해질 뿐 아니라 실로 속세의 때와 먼지를 청정케 하옵나이다.

그리고 천구의(天球儀)와 천문 서류들은 천하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이 온데, 이제 이것이 저의 수중에 들어오게 된 것은 그 얼마나 다행이오며 행복이온지 저로서는 형언할 수 없사옵니다. 저희 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종류의 기구가 없는 바는 아니오나 솔직히 자복하옵는 바는, 그것들은 이미 진부한 것들로서 정밀한 표준에서 어긋난 점이 많사오므로 분명 위물(僞物)이옵는데, 지금 보내 주신 진품을 향우하게 되오매 어찌 기쁨에 넘치지 않을 수 있사오리까?

제가 귀국하오면 다만 궁중보물로 간직할 뿐만 아니라 재인(再印)해서 뜻있는 사자(士子)들에게 분포하겠나이다. 이렇게 되오면 저희 나라도 무지의 황야에서 학문의 전당으로 변모될 것이며, 이 영복이 서양학자들의 덕택임에 놀라 기꺼이 여기는 동시에 이 복지가 오로지 서구인들의 학식의 혜택임을 깨닫고 오래 두고 감사하게 될 것이옵나이다.

이것은 장래의 문제입니다마는, 지금 귀하와 저로 말 하오면 서로 천애지각(天涯地角)의 동서로 격한 이역에서 따로 생장한 자로서, 피차 남의 땅에서 이렇게 상봉하게 된 기연을 통하여 이처럼 사랑함이 혈연자(血緣者)와 같은 교분을 맺게 된 것은 이 어찌 된 일이옵나이까?

저로선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한 개의 수수께끼로서, 이는 반드시 무슨 불가사의한 숨은 힘이 우리 피차를 이렇게 상오(相晤, 서로 좋은 만남)케 해 준 줄로 믿어 의심치 않나이다.

우리 인간은 비록 먼 거리에 서로 분거되어 있을지라도 진리를 추구하는 정성으로서는 그 마음이 서로 상합하게 되어 동지즉상구(同志則相求, 동지는 서로 찾게 된다는 뜻)케 되는 것임을 저는 강력히 자인자복하나이다.

저는 이제 이러한 서적과 천주상을 고국에 가져갈 수 있기를 갈망하옵니다마는 저희 나라는 아직 천주 숭배의 도를 일찍이 듣지 못했으므로 도리어 그 존엄성을 모독할까 염려하올 제 매우 두려운 걱정이 가슴에 사무치나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귀하가 만일 허락하신다면 이 천주상만은 돌려드리는 것이 저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믿으며 황공히 삼가 말씀드립니다.
- 유홍렬 《한국천주교회사》 〈뮈텔문서〉

위의 편지를 보면 소현세자의 서양문물에 대한 경탄과 함께 태도를 신중히 가지려는 면모도 나타나 있다.

그 뒤 아담 샬은 영세를 받은 중국인을 동반하고 그를 찾아가 다시 귀국하라고 권고했다. 이에 세자가 요청했다.

“저와 저의 인민을 가르칠 수 있는 당신의 동료 가운데 한 사람이 저와 가게 된다면 매우 반갑겠습니다.”

그러나 아담 샬은 서양인 선교사가 조선에 가는 것은 위험 부담이 있다며 영세 받은 명나라의 환관 · 궁녀 몇 명을 세자에게 딸려 보내 줄 것을 약속했다.

병사인가 독살인가

명을 멸망시킨 청나라는 세자 일행을 오랜 인질생활에서 풀어 주었다. 세자는 1645년 2월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세자의 귀국은 인조에게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인조는 청나라로부터 철저하게 반청파로 지목되었을 뿐만 아니라 늘 잔병을 앓으며 시달림을 받는 처지였다. 또 조정은 비록 주화파가 일부 있기는 하나 척화파로 꽉 채워져 있었다.

척화파는 인조의 대청정책을 오히려 미온적이라며 들쑤셔 댔다. 심지어 강원도를 중심으로 한 이인거는 정묘호란 뒤에 인조를 몰아내려는 반역을 도모했다. 1644년 3월에는 심기원 일당의 모반이 사전에 발각되기도 했다. 인조는 만약 세자가 귀국하면 청나라로부터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라는 요구가 있을까 걱정하고 있었기에, 세자의 귀국 소식을 반가워하기보다는 대신들에게 이별의 정이 없었느냐고 묻기도 했다.

이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도 상당히 서로 다른 현실관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현세자는 대청외교를 직접 담당하면서 청나라의 힘을 알았기에 청과의 타협을 추구했고, 청의 문화나 서양의 문화를 수용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반해 봉림대군은 부왕의 뜻을 충실히 받아들여 반청의 감정을 더욱 다졌고, 전통에 따라 서양의 문물을 거부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소현세자가 봉림대군을 남겨 두고 먼저 귀국했다. 1645년 2월 18일, 소현세자는 그리던 서울에 돌아와 부왕을 만났지만, 의외로 부왕은 쌀쌀한 태도로 대했다. 벼슬아치들은 세자로 하여금 임금에게 귀국 인사를 못하게 했다.

세자는 환국하면서 북경에서 많은 물건을 가져왔다. 그 화려한 물건들을 보고 벼슬아치들이 입방아를 찧기도 했는데, 세자는 가져온 물건 중에 비단 40필과 황금 19냥을 호조에 보내기도 했다(《인조실록》 권46, 23년 3월조).

《인조실록》을 보면 소현세자가 귀국한 뒤의 동정이 국가 중대사인데도 겨우 서너 건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오히려 이때의 사정을 야사가 더 실감나게 보여 주고 있다. 이에 따르면,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사정과 서양의 문물을 두루 이야기하자 인조가 매우 언짢아했으며, 서양의 책과 기계를 보여 주자 인조가 벼루를 들어 소현세자의 얼굴에 내리쳤다는 것이다.

소현세자는 귀국한 지 석 달 만에 병이 들었다. 세자는 평소에 몸이 건강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야사에서 보는 것처럼 이때 부왕으로부터 벼루로 얻어맞고 나서 생긴 마음병인지, 부왕으로부터 냉담한 대접을 받고 나서 일어난 울화병인지 모르지만, 어의인 박군은 학질이라고 진단을 내렸다. 임금에게 매일 침을 놓던 이형익이 세자의 열을 내린다고 세 차례 침을 놓았는데, 세자가 병이 든 지 사흘 만에 갑자기 창경궁 환경당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죽음에 대해 당시의 학자인 택당 이식은 소현세자의 묘지문에 이렇게 적었다.

“환궁 이후 연달아 한증과 열기가 있었는데 의원의 시술이 잘못되어 끝내 죽음에 이르렀다.”(《인조실록》 권46, 23년 6월 신유조)

그런데 《인조실록》의 사관은 이렇게 적었다.

세자가 심양에 있을 적에 집을 지어 단청을 하고 포로로 잡혀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모아 밭을 일구어 곡식을 쌓아 놓고 진기한 물건들을 사들여서 세자가 머무는 관소가 저자와 같았다. 임금이 이를 듣고 좋아하지 않았다. 임금이 총애하는 궁녀 조소용이 예전부터 평소에 세자와 세자빈을 미워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임금 앞에서, 세자빈이 임금을 저주했다거나 몹쓸 말을 했다는 따위로 헐뜯었다. 세자는 환국한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을 얻은 지 며칠 만에 죽었다. 시체는 온몸이 새까맣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 검은 천으로 얼굴의 반을 덮어서 옆에서 모시던 사람도 알아보지 못했다. 낯빛은 중독된 사람과 같았는데 외부의 사람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임금도 이를 알지 못했다. 다만 그때 종실인 진원군 이세완이 그의 아내가 인조의 앞 왕비인 인열왕후의 동생인 관계로 내척(內戚)으로 염습에 참여해 그 광경을 보고 나와서 남들에게 말한 것이다.
- 《인조실록》 권46, 23년 6월 무인조

이로 보면 소현세자의 독살은 거의 틀림없을 것이다. 더욱이 묘지문에도 “잘못되었다”고 했고, 가장 정확한 내용을 적어야 하는 사관이 이 사실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인조실록

조선 효종 4년(1653)에 이경여 등이 기록한 인조 재위 27년 동안의 실록이다. 50권 50책의 활자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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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빈 강씨, 한을 품고 사약을 마시다

소현세자가 죽은 뒤 그의 장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푸대접을 받았다. 명정을 쓸 때에는 평인과 같이 영구(靈柩)라는 말을 쓰게 내버려 두었고각주1) , 기일을 단축시켜 초상을 치르게 했다. 입관할 때에도 참관 인원을 관례에 따르지 않고 제한했으며 무덤의 터를 홍제동으로 하자는 논의에 반대해 멀리 고양의 효릉 뒤에 쓰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다.

더욱이 왕이나 왕자에게 의술을 잘못 쓰게 되면 의관이 문책을 당하는 것이 관례인데 이 논의마저 인조가 물리쳤다. 대사헌 김광현 등이, 이형익이 세자에게 연일 침을 놓은 잘못을 따져야 한다고 하자, 인조는 이형익을 옹호하면서 김광현을 몹시 미워했다. 김광현은 세자빈 강씨의 조카사위여서 세자빈의 말을 듣고 이런 짓을 벌인다며 뒤에 좌천시키기도 했다.

이와는 달리, 이해 5월에 봉림대군이 귀국할 때에는 융숭한 대우를 했다. 봉림대군이 왕에게 공경의 뜻으로 절을 할 때에 궁녀들이 이런 낌새를 알고 다투어 그 얼굴을 보려고 했다.

이해 윤6월에 인조는 갑자기 대신들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자신은 병이 깊으니 새 세자를 정해야 한다고 분부했다. 신하들은 원손(元孫, 소현세자의 첫째 아들)으로 대를 잇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으나, 인조는 왕실의 관례를 어기고 열 살의 세손은 마땅하지 않다고 주장하여 끝내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았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소현세자의 남은 세력을 하나하나 제거해 버렸다. 곧 세자빈의 친정오라비인 강문성 · 강문명 등을 무식하다는 꼬투리를 잡아 멀리 귀양 보내 버린 것이다.

이제 남은 일은 세자빈 강씨를 없애 버리는 것이었다. 궁중의 모든 비밀을 다 알고 있는 강씨, 임금의 술수와 음모를 꿰뚫어보는 강씨야말로 인조에게는 눈엣가시였다. 이즈음 임금의 수라상에 오른 전복 회에 독약이 들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우연찮게도 사람이 먹기 전에 발견되었다. 인조는 혐의를 며느리에게 두었고, 며느리를 받드는 나인 다섯 명을 잡아들여 족쳤다. 그러나 나인들은 결코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불복하고 죽었다.

세자빈은 온갖 수모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조소용의 끊임없는 질투와 모략 속에 임금이 보낸 궁인의 감시를 받았고, 자신의 아들이 왕위를 시동생에게 빼앗기고 있는데도 말 한마디 못했다.

그 와중에 궁중에서 임금과 새로운 세자를 저주하는 사건이 잇달아 일어났는데 인조는 그 혐의를 모두 강씨에게 두었다. 이 일에 얽혀 강씨의 나인 둘이 또다시 잡혀서 옥에서 목숨을 잃었다. 강씨로서는 사방에서 옥죄어 오는 사슬을 피할 길이 없었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여자의 한은 쌓이고 쌓여 갔다.

강씨는 죽음을 각오했던지, 그 한을 풀길이 없었던지, 임금의 침실 근처에 가서 통곡하기도 하고, 왕실의 법도에 따라 임금에게 드리는 조석의 문안도 폐해 버렸다. 죽음을 자청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결국 강씨는 후원 별장에 유폐되었다. 그렇게 유폐 생활을 할 때에 독약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니 강씨가 독약을 넣었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인조는 귀양 가 있는 강씨의 친정오라비들이 이 독약사건을 모를 리 없다고 하여 매를 쳐서 죽였다.

1646년 봄에 접어들어 인조는 마침내 며느리를 없애는 음모를 진행시켰다. 강씨를 세자빈에서 폐출하고 죽이라는 조처를 내린 것이다. 벼슬아치들이 강씨의 세 아들을 위해서라도 이 일을 거두라고 하자, 이들을 몰아내기도 하고 귀양 보내기도 했다. 많은 벼슬아치들이 이 일은 지나치게 부당하다며 벼슬을 내놓고 돌아가자 “가고 싶은 자는 가라, 나는 말리지 않으리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강씨를 세자빈으로 책봉할 때에 내렸던 교명(敎命) 등을 빼앗아 불태우게 했고 강씨를 본가에 내쳤다가 사약을 내렸다.

아들과 며느리를 죽이고 나서 인조는 남은 한 가지 일을 매듭지으려고 했다. 곧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어떻게 조치하느냐는 것이었다. 이들을 남겨 두면 후환이 생길 것으로 여긴 것이다. 인조는 강씨가 죽을 때에 세 아들에게 피로 쓴 유서에서 “원수를 갚아 달라”고 쓴 내용을 들춰냈다.

인조는 강씨에게 많은 동정이 쏠리는 것을 알고 강씨와 친하던 비구니 혜영에게 “강씨가 갓난아기를 싸 주며 양주 큰 다리에 버렸다”고 고백하게 했다. 이를테면 간통으로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음모를 꾸며 강씨에 대한 일반의 동정심을 막으려 했고, 강씨의 칠순 노모와 어린 친정조카들까지 얽어 죽여 버렸다.

마지막으로 인조는 세 손자를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이보다 앞서 청나라에서 소현세자와 강씨의 죽음을 전해 듣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의 안부를 묻고 데리고 가겠다는 뜻을 전해 왔었다. 이때에도 조정에서는 이들이 살아 있음에도 “두 아이가 이미 죽었다”고 거짓으로 답했다.

제주도에 귀양 간 세 아들 중 두 아들은 위의 거짓말과 같이 실제로 곧 풍토병에 걸려 죽었다. 이들이 죽자, 인조는 왕에게 쏠리는 세상의 비난을 피하고자, 이들을 돌보던 나인을 잡아들여 소홀히 돌보았다는 죄목을 씌워 죽이기도 했다. 몇 년 동안 피의 숙청을 거듭한 인조는 1649년 숨을 거두었으며 왕위를 봉림대군(뒷날의 효종)에게 물려주었다.

이렇게 하여 소현세자는 물론 그의 세력은 거의 씨가 말랐고, 마지막 남은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경안군은 효종이 즉위한 뒤 제주도에서 남해로, 다시 강화도로 유배지를 옮기며 살았다. 경안군의 후손은 뒤에 강화도와 황해도에 흩어져 살았는데, 18~19세기 민중봉기가 이곳에서 일어날 때에 민중들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그리하여 또다시 온갖 핍박을 받으며 목숨을 잃기도 하고 도망치기도 하는 꼴을 보였다(《추안급국안》;《포도청등록》). 이 후손들이 변혁세력과 손을 잡게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아버지의 명분과 아들의 실리가 충돌하다

인조는 정치적 방향을 사대모화(事大慕華)에 두었다. 결국 광해군을 몰아낸 명분의 하나도 여기에 있었던 것이요, 병자호란을 자초한 것도 여기에서 비롯한다. 그는 청나라의 힘에 눌려 세자를 볼모로 보내는 치욕을 겪으면서 세자가 끝까지 오랑캐에 저항하여 끝까지 절개를 지키길 바랐다.

그러나 인조의 뜻과는 달리 소현세자는 청나라와 타협했다. 이런 소현세자의 행동은 인조의 정치적 기반을 흔드는 것이요, 조선조의 대명(對明) 사대 질서에 반기를 든 꼴이었다. 게다가 소현세자는 서양의 기술과 학문에 심취하여 돌아왔고, 이것을 우리나라에 전파 · 보급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정통적인 유교 정신에도 위배되는 것이었다. 곧 이단 · 사설을 배격하고 유교의 정학(正學)을 높이는 나라의 근본 이념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셈이었다.

인조는 이렇게 정치적 · 이념적인 궤를 달리하면서 그의 통치기반을 약화시키는 세자를 그대로 두기엔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완고했다. 또 늘 병에 시달리면서 청나라에서 소현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라고 강요할까 봐 두려워했다.

인조의 성품은 냉혹하고 잔학했으며 음모와 술수에 능했다. 그는 왕위에 오른 뒤 무수한 살육을 저지르며 공포정치를 펴 나갔다.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는 뚜렷한 혐의도 없이 영의정 기자헌 등 40여 명을 몰살했고, 그 뒤 크고 작은 옥사가 일어날 때마다 정확한 조사없이 사람들을 마구 죽였다. 끝내 그는 이런저런 이유로 아들과 며느리도 죽였고, 이들과 연관된 세력가들을 모조리 얽어 씨를 말렸다. 그 수법이 냉혹하고 잔인했고 그 과정에서 음모와 술수 또한 비상했다. 그러면서 그는 백성이 어떤 환경에 놓여 있는지 어떤 고통을 받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인조의 대외정책도 그랬다. 청나라가 나라의 원수라면 명나라를 향한 명분인 이소사대(以小事大)를 청나라에 적용시킬 수는 없었을까? 실리를 위해 기존의 사대질서를 개편할 수도 있고, 백성을 위해 청나라와 타협할 수도 있을 텐데 인조는 철저히 명분에만 치우쳤다. 물론 명분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는 척화파의 기개를 가상히 여길 만하다. 그러나 인조가 벌인 일은 이런 명분에 기댄 채 정치 기반을 이용한 폭군의 행태였을 뿐이다. 그 결과 조선조 후기를 폐쇄 사회로 치닫게 했고, 철저히 유교적 교조 사회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이런 인조의 뜻과 조정의 분위기, 세자의 동정을 환히 꿰뚫어보던 효종은 철저하게 대세에 영합해 왕위를 따냈고, 왕위에 오른 뒤에는 가차 없이 사대모화의 정책을 단행했다. 효종은 철저한 유교 교조주의자 송시열과 함께 북벌론을 내세워 명분과 사대만을 먹고 살았는데 이는 정치적 기반을 확립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소현세자와 효종을 구차하게나마 대비하자면 실리파와 명분파, 개방과 폐쇄, 진보와 보수로 구분 지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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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집필자 소개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와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우리 고전을 번역하고 편찬하는 일을 했으며, 서원대, 성심여대 등에서 역사학을 강의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역사잡지 <역사비평&..펼쳐보기

출처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 저자이이화 | cp명주니어김영사 도서 소개

역사를 이끈 왕과 신화들, 새 세상을 꿈꾼 개혁가와 의학 및 과학자들, 학문을 꽃피운 사상가와 예술가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와 개화기 지식인 등 고대부터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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