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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런던 미술관
산책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회색과 녹색의 조화〉

Harmony in Grey and Green: Miss Cicely Alexander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회색과 녹색의 조화〉

1872-1874, 캔버스에 유채, 190.2×97.8cm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1834-1903)의 소녀들은 몹시 아련하다. 그의 화폭 속에 담긴 여인들은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하고, 아예 현실이 아닌 꿈속에 존재하는 환상이나 기억 같기도 하다. 휘슬러의 초상화는 19세기 말, 초상화가로 가장 큰 인기를 모았던 사전트를 연상시키지만, 사전트보다는 휘슬러의 그림 속 소녀들이 더 문학적이라는 생각이 든다(사전트와 휘슬러는 둘 다 미국인이지만 주로 영국에서 활동했다). 사전트가 그린 초상화 속의 여인네들은 은근히 관능적인 느낌을 주는 데 비해, 휘슬러의 여인들은 좀 더 창백하고도 예민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활약한 당대에는 휘슬러보다 사전트가 더 인기 있는 초상화가였다고 한다. 사전트가 휘슬러보다 더 화려한 화풍을 자랑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휘슬러는 초상화 한 장을 완성하는 데 시간이 너무나 많이 걸려 모델을 진 빠지게 만들곤 했기 때문이다.

테이트 브리튼이 소장한 휘슬러의 초상화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은 열 살쯤 된 소녀를 그린 〈회색과 녹색의 조화〉다(휘슬러는 자신의 작품 제목을 늘 이렇게 추상적으로 붙였다). 정말이지 몹시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이 작품은 런던의 부유한 은행가였던 알렉산더가 여덟 살 난 딸 시슬리(Cicely)의 초상화를 휘슬러에게 청탁해서 그려졌다. 소녀를 둘러싼 배경은 단출하고도 고급스럽다. 19세기 초부터 런던은 세계 금융의 중심지였고 런던에는 은행업으로 큰 돈을 번 신흥 중산층 가구가 많았다. 지금도 런던의 부촌인 리치몬드, 윔블던, 첼시 등에는 시티 지역(런던 금융가)의 은행이나 금융회사에 다니는 아버지를 둔 가족이 적지 않은데, 이런 은행가 집 자녀들은 대부분 초등학교부터 1년 학비가 수천만 원이 넘는 사립학교에 다닌다.

그런데 정작 초상화의 주인공인 시슬리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휘슬러는 이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일흔두 번이나 시슬리에게 포즈를 취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한 번 모델을 서면 두세 시간은 걸렸을 터인데, 한두 번, 아니 이삼십 번도 아니고 일흔 번 이상 꼼짝 않고 캔버스 앞에 서 있는 것은 어린 소녀에게 너무나 힘든 일이었던 것이다. 결국 시슬리는 몇 번이나 울면서 도망을 쳤고, 휘슬러와 시슬리의 부모는 울며불며 보채는 아이를 간신히 달래며 그림을 완성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 표정을 이렇게 울상으로 만들어 놓을 것은 또 뭔가. 휘슬러가 굉장히 융통성 없는 화가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그림을 감싸고 있는 우아한 기품은 사실 색감에서 오는 것이다. 화가는 그림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회색과 녹색 톤을 유지하기 위해 캔버스 오른편의 꽃을 회색으로 그리고 서명도 글자 대신 회색 나비로 대체하는 기지를 발휘했다(화면의 왼편 중간쯤에 그려진 나비가 휘슬러의 서명이다). 소녀가 입은 흰 모슬린 드레스도 금세 바람에 하늘대며 날아갈 듯싶다. 결정적으로 이 그림을 가장 사랑스럽게 만드는 요소는 그림 왼편에서 날아오르고 있는 나비들이다. 마치 물보라에서 태어난 비너스처럼, 이 나비들은 시슬리의 드레스에서 막 태어난 것 같다. 이 그림에 대한 평단의 반응은 ‘불만에 찬 소녀를 그린 불만스러운 그림’이라는 것이었지만, 당시 평론가들은 이 차분한 초상화 속에 가득한 사랑스러움은 미처 알아채지 못한 듯싶다. 검은 톤을 대담하게 사용한 배경이 언뜻 에두아르 마네를 연상시키는 점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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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경 집필자 소개

언제부터인가 삶의 방향이 자꾸 영국 쪽으로 향하고 있음을 느끼는 작가다. 연세 대학교와 런던 시티 대학교 대학원(예술경영 및 예술비평 전공)을 졸업하고 월간 『객석』 및 『주간동아』의 문화팀 기..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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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미술관 산책
런던 미술관 산책 | 저자전원경 | cp명시공아트 도서 소개

내셔널 갤러리, 코톨드 개럴리, 국립 초상화 미술관, 테이트 브리튼, 테이트 모던 등 영국 런던에 자리한 미술관으로 우리를 이끄는 런던 미술관 산책기다. 미술 작품들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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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회색과 녹색의 조화〉런던 미술관 산책, 전원경, 시공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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