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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폴 고갱
〈건초 더미〉
Haymaking1889년은 고흐가 고갱과의 불화 끝에 귀를 자르고 광기의 파국 속으로 빠져들어 가던 해다. 이 해 1월에 고흐는 생 레미 정신병원에서 〈귀를 자른 자화상〉을 그렸다. 공교롭게도 코톨드 갤러리에는 같은 해에 그려진 고갱의 작품 〈건초 더미〉가 소장되어 있다. 두 화가의 작품을 비교해 보면, 이들로 하여금 그토록 맹렬한 다툼을 벌이게 했던 예술관의 차이가 무엇이었는지 어렴풋이나마 짐작이 간다.
고갱은 브르타뉴에서 건초를 말리는 아낙네들을 보고 이 풍경화를 그렸다. 이곳은 유난히 전통적인 생활 방식이 많이 남아 있는 지역이었다. 전통 의상을 입고 농사일을 하는 이 지방 여인들의 모습은 당시 《살롱전》에 단골로 출품되던 소재이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주제를 바라보는 고갱의 시선은 완전히 다르다. 그는 빽빽한 붓질로 노란 밀밭과 건초를 쌓아올리는 여인들, 그리고 두 마리의 황소를 그려 넣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완전히 비현실적이다. 화가는 여인들의 모습을 극단적으로 단순하게 그렸고 원근법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고갱이 ‘브르타뉴의 여인들과 건초 작업’을 통해 본 것은 19세기 프랑스의 전통적인 농민이 아니라 자신의 상상 속에 들어 있는 원시 세계였다. 신화처럼 단순하고 평면적인, 그리고 강렬한 원색으로 빛나는 형이상학적인 세계 말이다. 평면적이고 단순한 형태와 강렬한 색채, 원시 세계에 대한 동경. 인상파에서 출발하고 피사로와 세잔의 영향을 받았던 고갱은 이제 인상파를 넘어서서 독자적인 표현주의로 향하고 있었다. 고갱의 관점에서 보면, 인상파에 머물러 있는 고흐의 그림들은 ‘철 지난 유행’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흐와 고갱은 비슷한 방식으로 세상과 결별했다. 고흐가 광기 끝에 자살로 내몰리는 동안, 고갱은 또 다른 바깥 세상인 원시의 타히티로 흘러갔으니 말이다. 1891년, 그는 진짜 원시 세계에서 새롭고 독창적인 그림을 그려 파리 화단에 금의환향하겠다는 야심을 안고 타히티로 떠났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타히티행은 말 그대로 문명 세계에서의 완전한 ‘추방’이었다. 그는 다시 파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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