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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런던 미술관
산책
조지프 라이트

〈진공 펌프 실험〉

An Experiment on a Bird in the Air Pump
조지프 라이트 〈진공 펌프 실험〉

1768, 캔버스에 유채, 183×244cm

흔히 ‘더비의 라이트’로 불리는 조지프 라이트(Joseph Wright of Derby, 1734-1797)는 영국에서 막 산업혁명이 태동하던 시기의 화가다. 그의 고향인 더비는 당시 영국에서 가장 큰 공장이 지어지던 지역이었다. 이 같은 환경은 라이트를 자연스럽게 ‘과학 기술의 전도사’로 만들었다.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진공 펌프 실험〉은 두 가지의 상반된 요소, 즉 산업혁명과 카라바조가 극적으로 어우러진 작품이다.

이 그림은 더비의 한 중상류층 가정에서 열린 조금 특별한 장면을 담고 있다. 그림 왼편에 서 있는 붉은 옷을 입은 남자는 떠돌이 과학자다. 18세기에 과학자의 신분은 광대나 연금술사와 비슷하거나 조금 나은 정도였다. 말하자면 18세기는 과학이 마법에서 벗어나 막 학문의 영역으로 들어오던 시기였다. 과학자들은 영국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과학 실험을 보여 주고 약간의 사례를 받곤 했는데, 라이트가 그린 장면은 이러한 ‘과학 실험 쇼’를 보여 준다. 이 떠돌이 과학자는 ‘진공 펌프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큰 유리병 속에 새를 넣고 마개를 막은 후 펌프로 병 속의 산소를 빼내어 진공 상태로 만들면, 새는 결국 산소 부족으로 죽게 될 것이다. 실제 실험에서는 흔히 구할 수 있는 참새 종류를 썼지만, 라이트는 극적 효과를 강조하기 위해 유리병 안에 하얀 앵무새를 그려 넣었다.

진공 펌프는 라이트가 활동하던 18세기에 이미 널리 알려진 과학 상식이었다. 1654년 독일 마그데부르크(Magdeburg)의 시장이었던 오토 폰 게리케(Otto von Guericke)는 도시의 광장에서 유명한 ‘마그데부르크의 반구’ 실험을 했다. 반구 두 개를 꼭 맞물린 뒤 진공 펌프를 사용해 반구 안의 공기를 모두 빼냈다. 그랬더니 반구 안은 진공 상태가 되었고, 결국 두 반구를 떼어 내기 위해서는 열여섯 마리의 말을 동원해야 했다. 이 마그데부르크의 반구 역시 테이블에 보일 듯 말 듯하게 그려져 있다.

과학자를 둘러싼 시골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그림 중앙에 있는 두 소녀 중 어린아이는 아직 이 실험의 의미를 몰라 어리벙벙해하고 있다. 반면, 나이 든 소녀는 새가 죽는 광경을 차마 보지 못해 고개를 돌린 채다. 소녀는 새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림 맨 오른편에 있는 소년의 생각은 좀 다르다. ‘설마 저렇게 비싼 새를 죽일 리가 있겠어?’라고 확신하고 있는 소년은 새를 넣기 위해 창문 옆에 걸려 있는 새장을 끌어내리는 중이다.

주위를 둘러싼 남자들은 과연 새가 어떻게 될지 반신반의하며 흥미진진하게 실험 광경을 바라본다. 하지만 그림 맨 왼편의 연인은 상대방에게 사랑을 속삭이기에 바빠서 새의 운명 따위는 관심도 없다. 이 두 사람은 실제 연인이었던 토머스 콜트먼(Thomas Coltman)과 메리 발로(Mary Barlow)를 모델로 그린 것이다. 이들은 이 그림이 그려진 다음 해인 1769년에 결혼했고, 라이트는 이들의 결혼 기념 초상화도 그려 주었다. ‘토머스 콜트먼 부부’라고 이름 붙인 초상화 역시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실험이 진행 중인 거실이 너무 어둡다. 이 어둠은 보는 사람에게 무언가 마법적인, 음산한 기운을 느끼게끔 한다. 탁자 한가운데에는 촛불이 놓여 있는데, 이 촛불을 큰 유리잔이 가리고 있어서 그림에서는 촛불이 보이지 않는다. 그림 한가운데에서 강렬하게 빛나는 광원은 그림의 극적 효과를 더더욱 높여 준다. 17세기 초에 카라바조가 즐겨 사용했던 키아로스쿠로 기법이 150년 뒤의 영국에서 다시금 응용된 셈이다. 그러나 카라바조의 그림이 살인이나 예수 최후의 만찬, 마리아의 임종 등 극적인 장면을 주로 담고 있는 데 비해, 이 〈진공 펌프 실험〉은 그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주제로 한 그림이다. 150년 동안 미술은 선택받은 자들의 특별한 사치에서 보통 사람들의 일상으로 한 발자국 더 접근한 셈이다.

자세히 보면 광원을 가리고 있는 유리잔에는 해골이 들어 있다. 이 해골은 보는 이에게 일종의 도덕적 질문을 던진다. ‘과학 실험을 위해서 새의 생명을 희생시켜도 좋은가?’라는 질문 말이다. 그림 맨 오른편에 앉은 남자, 어둠에 몸이 거의 가려진 남자는 아마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듯싶다.

‘산업혁명을 회화에 끌어들인 최초의 화가’로 평가받는 라이트는 잠시 런던과 바스, 이탈리아에 거주한 것을 제외하면 육십 평생을 더비에서만 살았다. 그래서 라이트의 그림은 현재 더비 시청에 많이 소장되어 있다. 그를 굳이 ‘더비의 라이트’라고 부르는 것은, 그와 동시대에 활동하던 화가 중에 ‘리처드 라이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동을 피하기 위해 런던의 『가제트』지의 기자가 “더비의 라이트가 런던에서 전시회를 열었다”는 식으로 보도했고, 이후부터 라이트는 본명인 조지프 라이트보다 ‘더비의 라이트’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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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경 집필자 소개

언제부터인가 삶의 방향이 자꾸 영국 쪽으로 향하고 있음을 느끼는 작가다. 연세 대학교와 런던 시티 대학교 대학원(예술경영 및 예술비평 전공)을 졸업하고 월간 『객석』 및 『주간동아』의 문화팀 기..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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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미술관 산책
런던 미술관 산책 | 저자전원경 | cp명시공아트 도서 소개

내셔널 갤러리, 코톨드 개럴리, 국립 초상화 미술관, 테이트 브리튼, 테이트 모던 등 영국 런던에 자리한 미술관으로 우리를 이끄는 런던 미술관 산책기다. 미술 작품들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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