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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런던 미술관
산책
토머스 게인즈버러

〈앤드루스 부부〉

Mr and Mrs Andrews
토머스 게인즈버러 〈앤드루스 부부〉

약 1750, 캔버스에 유채, 69.8×119.4cm

내셔널 갤러리의 ‘유명한 그림들’ 중에는 의외로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작품들이 많다. 토머스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 1727-1788)의 유명한 초상화인 〈앤드루스 부부〉 역시 마찬가지다. 이 그림은 세로 69.8센티미터, 가로 119.4센티미터의 아담한 초상화다. 이 작품이 더더욱 작게 보이는 이유는 ‘초상화’로 그려진 그림에서 정작 부부의 초상화는 왼편에 치우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부부는 자신들 초상화의 반 이상을 풍경에 할애하도록 허락한 것일까? 초상화 청탁을 받고도 굳이 풍경을 그려 넣은 게인즈버러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게인즈버러는 원래 풍경을 그리길 좋아했던 화가였다. 런던에서 그림 공부를 하던 그는 시골 풍경을 그리기 위해 1748년 일부러 서퍽으로 낙향했다. 그러나 그가 활동하던 18세기 당시에 풍경화를 청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고객인 영주나 귀족들은 모두가 초상화를 원했을 뿐이다. 게인즈버러는 조지프 라이트, 조지 스터브스 등과 함께 기품 있는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래서 현재 남아 있는 게인즈버러 작품의 절대 다수는 여인의 초상화다.

앤드루스 부부 역시 마찬가지 이유로 초상화를 청탁했을 것이다. 그림의 남자 주인공인 서퍽의 젠트리(Gentry, 소지주) 로버트 앤드루스는 스물두 살이던 1748년에 여섯 살 아래 처녀인 프랜시스 카터와 결혼했다. 어린 시절에 가문끼리 맺은 혼약이었다. 그리고 부부는 막 서퍽에 온 게인즈버러에게 결혼 기념 초상화 제작을 의뢰한다. 로버트 앤드루스는 서퍽에 제법 넓은 영지를 물려받아 경작하고 있었다. 아마도 게인즈버러는 이 젊은 영주를 설득했을 것이다. 초상화에 본인의 영지도 그려 넣으면 일석이조이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말이다. 앤드루스가 이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써, 드물게 초상화와 풍경을 같이 그려 넣은 작품이 탄생한다.

그림의 맨 왼편에 서 있는 로버트 앤드루스는 리넨 프록코트의 단추를 반쯤 푼 채, 한쪽 다리를 세우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가 쓴 삼각형 모자는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최신 스타일이다. 팔에 끼우고 있는 장총은 이 젊은 영주가 ‘부자’임을 의미한다. 당시에 총과 화약은 100파운드 이상의 고가품이어서 웬만큼 넓은 땅을 소유한 영주가 아니면 가질 수 없었다. 250년 전 그림이지만 입을 꾹 다문 채, 조금은 어색해하는 앤드루스의 표정은 런던 스트랜드나 시티 구역을 오가는 요즈음 남자들의 인상과 놀라울 정도로 똑같다. 남편 옆에서 다소곳이 앉은 채 포즈를 취한 앤드루스 부인 역시 남편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 작은 초상화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 중 하나는 그림 속 부부의 표정과 포즈가 250년 전임에도 불구하고 영국적 느낌을 생생하게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 속의 부부는 과묵하면서 건실하고 조금은 수줍어하는 인상인데, 이는 지금도 변치 않는 영국인의 전형적 특성이다. 이 그림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영국에서 그려진 그림 중 ‘진짜 영국인’의 모습을 담은 최초의 작품이라는 점 말이다.

화폭의 반 이상을 영지 풍경으로 채우긴 했지만, 게인즈버러가 두 부부를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 포즈를 취하게 한 것은 아니었다. 게인즈버러는 이 그림을 실내에서 그렸다. 앤드루스 부인이 신고 있는 연분홍빛 슬리퍼가 그 증거다. 이 비단 슬리퍼는 바깥이 아니라 실내에서 신는 신발이다. 만약 앤드루스 부인이 이 신발을 그림 속에서처럼 바깥에 신고 나갔다면, 몇 걸음 못 가서 슬리퍼가 온통 진흙 범벅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그림의 풍경 묘사가 부정확한 것은 아니다. 앤드루스 부인이 앉아 있는 벤치 뒤편의 참나무가 서퍽의 오버리스(Auberies)에 아직도 남아 있을 정도니 말이다. 추수가 끝난 후의 밭은 깨끗하고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고 멀리 뒤편으로 울타리에 갇힌 양들이 보인다. 이는 로버트 앤드루스가 ‘인클로저(enclosure) 농법’, 즉 가축을 무작정 방목하지 않고 자신의 경지에 울타리를 친 후 그 안에 방목하는 최신 농법을 도입한 영주임을 말해 준다.

이 그림이 그려진 18세기 중반의 영국 농촌은 ‘농업혁명’으로도 불렸던 2차 인클로저 농법을 통해 지주의 토지사유제가 확산되던 시기였다. 이를 통해 아무나 토지를 경작하던 중세 시대의 농촌 풍경이 사라지고 지주-소작농의 구조가 고착된다. 영주들의 삶이 부유해짐과 동시에 농민은 몰락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몰락한 농민은 막 산업혁명이 태동하던 도시로 몰려들게 된다. 1800년대 초의 런던이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로 부상하게 된 데에는 농민의 몰락과 인클로저 운동이라는 배경이 있었다. 아무튼 옷차림에서나 농지 경영에서나 앤드루스는 세련된 영주였던 게 분명하다.

이들이 사치스럽지 않고 건실하게 생활을 꾸려 가는 부부라는 것은 앤드루스 부인의 옷차림에서도 알 수 있다. 그녀의 푸른 드레스는 세련되긴 했지만 그리 화려하진 않다. 오히려 영주 부인의 드레스치고는 소박해 보인다. 부인이 머리에 쓴 둥근 스타일의 모자는 당시 양치기 소녀들이 쓰던 모자와 비슷하다. 그렇다고 해서 부인이 직접 목장에서 우유를 짜거나 풀베기를 했을 리는 없다. 그녀의 작은 손과 발에는 험한 일을 한 흔적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부인 역시 남편처럼 발을 한편으로 꼬고 있는데, 화가는 부인의 발을 실제보다 더 작게 그렸다. 당시에는 여자의 발을 작게 그리는 것이 화가들의 에티켓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웬일인지 부인의 손 부분이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부인의 손 밑으로 네모난 공간이 비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설에 따르면 화가는 남편이 사냥한 꿩을 부인이 들고 있는 것으로 설정하고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런데 왜 꿩을 끝까지 그리지 않았을까? 그림을 그릴 때 꿩 실물이 없었던 것일까? 화가가 ‘나중에 꿩을 따로 구해서 그려 넣어야지’ 하고 마음먹었다가 그만 잊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앤드루스 부부는 18세기부터 막 생겨나기 시작한 영국의 신흥계급, 즉 귀족과 노동계급 사이에 위치한 부르주아들이다. 부부의 옷차림과 태도에서는, 결코 사치하지 않지만 재산을 모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부르주아 특유의 당당함이 느껴진다. 초상화의 절반 이상을 영지 풍경으로 채운 점만 보아도 이 젊은 부부가 자신들의 재산에 대해 어떠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중세 시대의 그림들이 종교를, 절대왕정 시대의 그림들이 권력을 이상적으로 그렸다면 게인즈버러의 이 초상화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그들이 가진 새로운 가치관을 이상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요컨대 앤드루스 부부는 이 작은 초상화에서 ‘근검절약하고 세련된 지주 부부’의 이미지를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솜씨 있는 화가 게인즈버러는 그런 청탁자의 요구를 만족시킴과 동시에, 화면 오른편 가득 영지를 배치해서 풍경을 그리고 싶은 화가 자신의 소망도 풀었던 것이다. 작지만 기품 있고 사랑스러운, 그리고 작은 화폭 안에 많은 사연과 역사적 배경까지 담아낸 이 그림은 그래서 보면 볼수록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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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경 집필자 소개

언제부터인가 삶의 방향이 자꾸 영국 쪽으로 향하고 있음을 느끼는 작가다. 연세 대학교와 런던 시티 대학교 대학원(예술경영 및 예술비평 전공)을 졸업하고 월간 『객석』 및 『주간동아』의 문화팀 기..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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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미술관 산책
런던 미술관 산책 | 저자전원경 | cp명시공아트 도서 소개

내셔널 갤러리, 코톨드 개럴리, 국립 초상화 미술관, 테이트 브리튼, 테이트 모던 등 영국 런던에 자리한 미술관으로 우리를 이끄는 런던 미술관 산책기다. 미술 작품들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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