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이야기를 따
라가는 한옥
여행

운조루

국가민속문화재 제8호, 雲鳥樓

조선 선비의 로망을 만나다

요약 테이블
소재지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103(운조루길 59)
이용 시간 8:00~17:00
운조루

ⓒ 시공아트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전통 한옥 중 몇몇은 풍수만으로도 이름이 높다. 운조루도 여기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그러나 독창적인 공간 구조를 가진 운조루는 전통 한옥만으로도 이름을 얻을 만하다. 지역적으로 영호남의 경계에 위치하여 영호남 건축의 장점이 모두 살아 있고, 집 안 곳곳 운조루를 지은 이의 건축가로서의 재능도 돋보인다. 봄기운이 가득한 사랑마당을 거닐며 남도의 고택을 감상해 보자. 노고단의 일몰, 섬진강의 풍광, 화개장터의 왁자지껄함. 구례는 여행지가 가져야 할 진수를 모두 가지고 있다.

조상에 대한 자부심, 솟을대문의 호랑이 뼈

한발 앞서 봄을 맞은 남녘 들판.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오봉산과 어우러진 들녘에 봄기운이 완연하다. 봄기운에 취해 생명을 키운 들판에는 간간이 여인들이 모여 앉아 자연이 키워 낸 봄나물을 훔치고 있다. 지난 세월 저 들판은 끊임없이 곡식을 내서 마을을 길러 왔을 것이다. 풍수가들이 이곳을 생리(生利)의 명당으로 꼽는 까닭이다. '생리'는 경제적인 이로움을 뜻한다. 사람들은 이 땅이 그들을 부유하게 할 것이라 믿으며 살아왔다. 『택리지(擇里志)』를 쓴 이중환(李重煥, 1690~1752)도 이곳을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살기 좋은 곳으로 꼽아 마을 사람들에게 믿음을 더해 주었다. 운조루(雲鳥樓)의 집터를 '금가락지가 떨어진 모양'으로 보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들판에서 발을 빼 운조루로 가는 걸음이 가볍다.

운조루 배치도

ⓒ 시공아트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다 안기라도 할 듯 팔을 벌린 운조루

긴 행랑채에는 여민동락의 전통이 숨어 있다. 연못 때문에 고택은 더 풍요로워 보인다.

ⓒ 시공아트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기차 몇 량은 족히 되어 보이는 긴 행랑채는 운조루가 한때 거대한 장원의 중심지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집 앞을 차지한 연못이 운조루의 분위기를 활달하고 풍요롭게 만들어 행랑채와 연못 사이로 난 고샅을 걸어 솟을대문으로 향하는 기분도 유쾌하다. 운조루 솟을대문에는 호랑이 뼈가 걸려 있다. 이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운조루를 지은 유이주(柳爾胄, 1726~1797)는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을 정도로 힘이 넘치는 무신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집 솟을대문에 그가 잡은 호랑이 뼈를 줄줄이 걸어 놓았다. 그런데 호랑이 뼈가 워낙 귀하다 보니 누군가 하나둘 집어 가고 이제는 엉뚱한 짐승의 뼈를 대신 걸어 두었다. 이 부분에서 호랑이 뼈다 아니다라며 종부인 할머니와 그 아들의 이야기가 엇갈린다. 하지만 그 뼈가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랴? 그것이 조상의 용맹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후손들이 바친 훈장인 바에야. 호랑이 뼈의 주인공 유이주가 바로 이곳의 문화 유씨 입향조다. 그는 경상북도 출신이지만, 구례에 인접한 낙안에 수령으로 왔다가 아예 운조루를 지어 눌러앉았다. 이때가 1776년이다. 운조루는 처음 100여 칸 정도의 규모였으나, 현재는 63칸 정도가 남아 있다. 넓은 대지에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여 개방적으로 짓는 전라도 한옥과 높이를 강조한 경상도 한옥이 잘 조화를 이룬 건축이다. 영남 사람으로 호남에 뿌리내린 유이주의 삶이 녹아 있는 셈이다.

고택의 그윽함이 느껴진다. 거북이를 뜻하는 한자 때문일까? 솟을대문 안으로 보이는 사랑채의 창호 때문일까?

ⓒ 시공아트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솟을대문에 걸린 짐승의 뼈

운조루가 무관의 집임을 알 수 있다.

ⓒ 시공아트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 사랑채가 나타난다. 하지만 잠깐 만에 집을 받친 기단이 보기보다 매우 높다는 것을 눈치채고 만다. 그렇다면 사랑채가 꽤 높은 건물인데, 사람을 압도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마당의 넉넉함에 기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윽박지르지 않는 사랑채의 관대함은 일정 부분 넓은 기단의 공으로 돌려도 좋을 것 같다. 기단 위에 늘어선 키 작은 나무들이 사랑채가 주는 수직적인 긴장감을 누그러뜨려 마당과 건물의 조화를 이끌어 낸다. 바로 이 지점이 높이를 강조하는 영남 한옥과 개방감을 강조하는 호남 한옥이 운조루에서 만나는 부분이다. 기단에 꽃과 나무를 심은 아이디어가 기발하다. 건축을 모른다면 생각하기 어려운 구상이다. 여기에서 이 집을 경영한 유이주가 풍부한 건축 경험을 가진 건축가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실제로 남한산성 같은 성곽이나 공공건물의 정원 공사에 참여한 이력이 있다. 기단 위에 만든 화단의 회양목, 밥티꽃, 싸리꽃, 동백꽃, 자목련으로 사랑마당을 풍요롭게 만든 건축적 접근이 가능했던 배경이다. 이곳으로 출발할 때 품었던 궁금증 하나를 털어 낸 셈이다. 출발 전 운조루에 전해 내려온 그림인 <전라구례오미동가도(全羅求禮五美洞家圖)>를 살펴보며 생긴 궁금증이다.

사랑채 가운데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에 어둠이 들어차 있다. 안채를 벗어날 수 없던 여인들의 까맣게 탄 가슴을 보는 듯하다.

ⓒ 시공아트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궁궐의 월대처럼 높고 넓은 사랑채의 기단

높은 기단임에도 사람을 압도하지 않는다. 사랑채의 화단에 봄이 왔다.

ⓒ 시공아트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조선 사대부의 로망이 담긴 누마루

<전라구례오미동가도>, 1800년대 (추정)

ⓒ 시공아트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전라구례오미동가도>는 1800년 전후의 운조루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원색으로 사랑마당 가득 그려 놓은 화초의 화려함 때문에 사랑마당에 통째로 정원을 들인 것은 아닐까 하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마당 없는 정원이 한옥에서는 매우 이례적이기 때문이다. 사랑마당에 그린 화초는 자연을 집 안으로 들인 과장된 표현으로 보인다. 누마루에 오르면 이 그림에 나타나는 정취를 직접 느낄 수 있다. 실제로 누마루에서는 마당에서 느꼈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정서에 빠져들게 된다. 누마루라는 건축의 틀을 통해서 평범하게 지나온 주변 경치가 빼어난 경관으로 바뀌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누마루는 높은 기단 덕분에 풍경을 들일 수 있고, 집에 들어서는 이는 넓은 기단 덕에 자칫 사랑채가 주는 긴장감을 해소할 수 있다. 사랑채 건축에서 기단이 차지하는 비중은 작지 않다. 누마루의 난간에는 연꽃을 새겨 넣어 은유를 더했다. 송나라 주돈이(周敦頤, 1017~1073)가 연꽃을 군자에 비유한 이후, 유학자에게 연꽃은 군자를 상징한다. 세한삼우(歲寒三友)인 소나무, 대나무, 매화를 주변에 가꾸어 그 의미가 누마루의 연꽃에서 하나 되게 하였다. 그는 이곳에 앉아 세한삼우를 바라보며 지조 굳은 군자의 삶을 꿈꾸었을 것이다. 누마루는 건축적으로 운조루 전체 건축의 중심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군자라는 완성체로 우주의 중심이 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한옥이 가지는 철학적인 확장성을 느껴 볼 수 있다. 사랑채 뒤쪽으로 두 칸의 건물이 이어져 있다. 하나는 글방이고 하나는 책을 보관하는 서고다. 이곳은 안채의 부엌과 바로 연결되어 생활의 동선 속에 완전히 흡수된다. 같은 사랑채 건물이지만, 사랑채의 앞쪽과 정서적으로 전혀 다른 공간이 된다. 정원 꾸미기를 좋아한 성품은 이곳에도 이어져 꽃나무와 괴석으로 오밀조밀한 분위기를 연출해 작은 기쁨을 더해 준다. 담장을 대신하는 대나무 숲은 남도 특유의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사랑채 누마루 난간의 연꽃

ⓒ 시공아트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사랑마당에 핀 매화

이곳에서는 세한삼우로 불리는 소나무와 대나무, 매화를 모두 만날 수 있다.

ⓒ 시공아트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운조루의 누마루에서 바라본 풍경

자연을 끌어들여 정원으로 삼은 한옥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 시공아트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운조루 사랑채에서 감지되는 풍성한 선비의 세계는 당시 조선 유학자들의 공통된 로망이기도 했다. 박지원은 그가 쓴 「하풍죽로당기(荷風竹露堂記)」에서 당시 유학자의 거처를 운조루와 비슷하게 묘사하고 있다. 하풍은 바람에 실려 오는 연꽃 향기고, 죽로는 대나무에 맺힌 이슬이다. 그가 묘사한 사대부의 거처는 다음과 같다.

"새벽이면 촘촘히 숲을 이룬 대나무에 이슬이 구슬이 되어 점점이 맺히고, 아침이 되어 난간에 기대면 맑은 바람이 불어 셀 수 없는 연꽃의 향기를 실어 온다. (중략) 저녁이 되면 아름다운 손님과 함께 누마루에 올라 달빛 아래 깨끗함을 다투는 나무를 살핀다. 이제 한밤중이다. 주인은 휘장을 드리우고 매화와 함께 야위어 간다."

「하풍죽로당기」의 묘사가 어쩌면 운조루의 모습과 그리도 유사한지 무릎을 치게 한다. 누마루에 앉아 있자니 조선 선비라도 된 듯하다. 하지만 진정한 선비라면 이 풍요를 백성과 함께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군자에게 풍류가 다 무슨 의미겠는가? 운조루에 숨은 여민동락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을 차례다.

탁 터진 시야로 들어오는 자연과 함께 풍류를 즐기던 사랑채지만, 바로 뒤는 생활로 분주한 모습이다.

ⓒ 시공아트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풍경에 걸려 흔들리는 보자기만 한 하늘

건축적으로 사랑채의 누마루가 운조루의 중심이라면, 생활에서는 안채, 특히 '큰 부엌'이 운조루의 중심이 된다. 운조루에서 풍수는 매우 중요한 건축 요소다. 때문에 이 집의 부엌에도 풍수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유이주가 집을 짓기 위해서 땅을 파다 보니 지금의 부엌 자리에서 거북 모양의 돌이 나왔다고 하는데, 그 돌이 최근까지 전해 내려오다 누군가의 손을 타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수명을 뜻하는 거북이 나온 자리에 부엌을 들인 것도 매우 의미심장하다. 부엌은 사람 생명을 건사하는 중심으로 집의 어느 곳과도 끊어지지 않아야 한다. 실제로 큰 부엌은 다른 공간으로의 접근성이 뛰어나 생명의 중심점 구실을 충실히 해낸다. 여러 개의 마당과 연결되어, 사랑채는 물론이고 작은 부엌을 통해 사당으로도 연결된다. 이런 접근성은 외부에 여인을 노출시킬 수밖에 없는데, 이를 막기 위해 부엌 주위에 T자 모양으로 아담하게 담장을 쌓았다. 당시 여인들은 그렇게 바깥 세계와 격리된 채 집의 생명을 키워 내야 하는 운명을 짊어지고 있었다.

마당에는 돌을 파서 만든 물확(가운데가 움푹 팬 물건으로 돌절구 등 생활에 쓰이기도 했고, 물을 가두어 두기도 했다)이 여러 개 있다. 작은 공간에 답답하게 갇혀 있던 여인들에게 물확은 단순한 물건 이상이었을 것이다. 때로는 생활에 이용되기도 했지만, 물을 담아 물고기를 풀어 놓으면 훌륭한 어항이 되기도 했다. 이곳에는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물확이 하나 있다. 대청 앞에 놓인 물확은 안주인이 세수를 하거나 손을 씻을 때 쓰던 것이다. 그 정도 호사를 누리기는 했지만 안주인이라고 해서 여인의 삶이 그리 녹록한 것은 아니었다.

집의 모든 곳으로 통하는 부엌은 외부인에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외부인의 시선을 차단하려는 다양한 아이디어가 동원되었다. T자 담장이 눈길을 잡는다.

ⓒ 시공아트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둥근 두리기둥에서 안방마님의 권위가 느껴진다. 작은 부엌이지만 보기와는 달리 집 안 어디로든 통하는 생활의 중심이다.

ⓒ 시공아트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운조루에는 크기가 다양한 물확이 있어 운치를 더한다. 안채 대청 앞에는 주인이 손을 닦는 데 쓰던 물확도 있다.

ⓒ 시공아트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사랑채의 누마루에서 그랬던 것처럼 안채의 대청에 잠깐 앉아 본다. 지붕 선 위로 보자기처럼 조각난 하늘이 한 귀퉁이에 풍경을 달고 흔들거린다. 안채에서 보이는 것은 보자기만 한 하늘이 전부지만 그리 답답하지 않다. 행여 이런 생각이 평생을 이 안에 갇혀 살아야 했던 조선 여인의 부아를 돋우는 일이 되지는 않을까 조심스럽다. 요즘에야 갖은 이유로 수시로 이사를 다니지만, 조선 시대에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집에 사는 경우가 많았다. 한 아이가 태어나 이유기가 지나면 어머니 품을 떠나 할머니에게 간다. 아이가 조금 자라면 작은사랑으로, 그리고 다시 큰사랑으로 옮겨 가 생을 마감한다. 결혼한 여자라면 시댁의 안채 건넌방에서 생활을 시작한다. 아들이 장성하여 결혼하면 시어머니가 되어 안방을 차지했다가 다시 할머니 방으로 옮겨 생을 마감한다. 생을 마감한 이들은 다시 자리를 옮겨 초빈으로 간다. 초빈은 사람이 죽었을 때 시신을 모시던 곳인데, 운조루에는 초빈이 잘 보존돼 있다. 안채에는 시어머니가 있던 안방, 며느리가 있던 건넌방, 할머니가 있던 모퉁이방 등이 그대로 있다. 그렇게 한 시대를 살다 간 이들을 추억하며 방의 위치를 가늠하다 보면 분할된 벽면의 아름다움을 만나게 된다. 수직선과 수평선만으로 만들어진 사각형이 반복되며 독특한 아름다움을 이루어 낸다. 반복되는 듯하지만, 다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 단조롭지 않다. 돌아갈 시간이 주머니 속 동전처럼 잘랑거리지만 않는다면, 조선 여인네가 물끄러미 바라보며 세월을 견딘 벽면의 분할을 느긋하게 감상하는 것도 한옥을 감상하는 기쁨을 더해 줄 것이다. 운조루에는 다른 한옥에서 구경하기 힘든 것들이 여럿 있다. 굴뚝을 따로 만들지 않고, 기단에 구멍을 내서 연기를 빼내는 장치를 가렛굴(또는 기단굴뚝)이라고 하는데, 운조루에는 이런 굴뚝이 여럿 있다. 아궁이를 쓰는 방법이 추운 북쪽 지방과 달라서 생긴 차이다. 안채와 사랑채 기단을 유심히 보면 가렛굴을 찾을 수 있다. 사랑채의 쪽마루를 받친 돌기둥이나 누마루 추녀를 받친 활주도 민가에서는 보기 드문 것인데, 집을 지은 이가 사랑채에 쏟은 정성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활주는 추녀가 처지지 않도록 댄 가느다란 기둥이다. 누마루 아래 마차는 덤으로 보는 이색적인 물건이다.

건축을 통해 나를 돌아보다

마지막으로 이 집의 정신적 풍요를 상징하는 것이 뒤주다. 과거에는 행랑채 쪽에 있어서 가난한 이라면 누구나 쌀을 퍼 갈 수 있도록 했다고 하나, 현재는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채의 봉당(건물 내의 작은 마당)에 보관되어 있다. 박지원의 「하풍죽로당기」 역시 백성과 함께하는 즐거움이 진정한 사대부의 로망임을 강조하며 끝을 맺고 있으니, 운조루야말로 조선 사대부의 로망이 어린 곳이다.

안채의 좌우 채를 2층으로 나눈 모습에서 영남 한옥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 시공아트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안채의 벽면은 단순한 듯하지만 가만히 보면 미묘하게 움직인다. 안채의 벽면은 정중동의 은근한 우리 문화를 담고 있다.

ⓒ 시공아트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 시공아트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기단에 구멍을 내어 연기를 빼내는 가렛굴은 굴뚝 역할을 하는데, 뒤쪽의 창호와 잘 어우러진다.

ⓒ 시공아트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 시공아트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추녀를 받친 활주와 쪽마루를 받친 돌기둥에서 집을 짓기 위해 쏟은 정성을 엿볼 수 있다.

ⓒ 시공아트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집안의 내력과 유구함을 알려 주는 마차 바퀴가 이채롭다.

ⓒ 시공아트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유씨 집안의 인심을 보여 주는 나무로 된 쌀독

아래쪽 마개에 쓰인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귀는 '누구나 뒤주를 열 수 있다'는 뜻이다.

ⓒ 시공아트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운조루를 떠나기 전 바깥사랑의 누마루에 다시 오른다. 누마루로 들어온 풍경을 좀 더 보고 싶어서다. 곧 해가 스러질 시간, 무심히 먼산바라기를 하고 있으니 시인이라도 된 기분이다. '운조루'라는 당호 역시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왔다. 관직을 집어던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의 기쁨을 생생하게 그린 시다. 「귀거래사」에서 당호가 등장하는 부분을 옮긴다. 시구의 첫 자를 합한 것이 이 집의 당호다.

雲無心以出岫(운무심이출수)
구름은 무심히 산봉우리를 돌아 나오고
鳥倦飛而知還(조권비이지환)
날다 지친 새들은 집으로 돌아올 줄 아는구나

유이주는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당호까지 가져왔지만, 관직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낙안 군수 시절인 1773년, 낙안의 세곡선이 한양으로 가다 침몰하여 그 책임을 지고 함경도 삼수 땅으로 유배까지 다녀왔지만, 구례에 와서도 다시 관직에 나갈 기회를 잡자 집 짓는 일을 아들에게 맡기고 출사했다고 한다. 자연과 하나 되고 싶은 마음 하나, 세상에 나가 출세하고 싶은 마음 하나. 우리는 늘 그렇게 두 가지 마음의 경계선 위에 머물다 가는 것은 아닌지.

ⓒ 시공아트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1박 2일 추천 코스

섬진강은 꽃과 함께 흐른다

섬진강을 끼고 도는 남도의 봄은 그만큼 화려하다. 운조루로 방향을 잡았다면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광양 매화마을에서 시작하자. 섬진강을 건너가는 배도 축제가 벌어질 때는 거저 탈 수 있다. 이웃한 악양면 느림보마을도 점점 이름이 알려지고 있다.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이곳에는 드라마 <토지>의 세트장까지 그대로 남아 있어 『토지』를 사랑한 독자들을 감상에 빠져들게 한다. 전라도와 경상도가 만나는 화개장터에서 시골 장터 분위기를 느끼며 오감을 만족시킬 수 있다. 이튿날 운조루에 들렀다가 화엄사로 이어지는 건축 기행도 권하고 싶다. 국보 제67호로 지정된 각황전이 화엄사에 자리 잡고 있다. 각황전을 짓는 일을 맡았던 계파대사는 비용 마련에 고심하다 잠이 들었는데, 밖에 나가서 첫 번째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청하라는 꿈을 꾸었다. 이튿날 기대를 걸고 밖을 나선 대사가 만난 사람은 절에서 밥을 얻어먹는 노파였다. 시주를 하라는 말에 황당해하던 노파에게 스님이 계속 시주를 요구하자, '왕궁에 태어나 불사를 이루겠다'고 서원을 하고 옆에 있는 늪에 몸을 던졌다. 이후 계파대사가 한양 나들이에 나섰다 한 여자아이를 만나는데, 여자아이는 숙종의 딸인 공주였다. 물론 노파가 윤회를 통해 태어난 것이다. 숙종은 이 이야기를 듣고 감동하여 각황전을 지었다고 한다. 3~4월이라면, 산동으로 가서 산수유 축제를 즐기자. 꽃으로 시작한 여행길을 꽃으로 마무리할 수 있다.

광양 매화마을 → (30분) → 하동 악양면 느림보마을 → (23분) → 화개장터 → (20분) → 운조루 → (17분) → 화엄사 → (24분) → 산동(산수유 축제)

운조루 인근 지도

ⓒ 시공아트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이상현 집필자 소개

서울시립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토지주택공사에 들어가면서 '집'이라는 공간에 빠져들었다. 현재 한옥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고, 다양한 활동으로 한옥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있다.

출처

이야기를 따라가는 한옥 여행
이야기를 따라가는 한옥 여행 | 저자이상현 | cp명시공아트 도서 소개

저마다 고유한 색깔을 가지고 있는 살림집 한옥 17곳과 성당, 절집, 서원 등 24곳의 개성 넘치는 전통 건축물들을 소개한다.

전체목차
TOP으로 이동

호남지방 여행지

추천항목


[Daum백과] 운조루이야기를 따라가는 한옥 여행, 이상현, 시공아트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