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우리 나무의
세계 1

돌배나무

다른 표기 언어 Sand Pear , 山梨 , ヤマナシ山梨
요약 테이블
분류 장미과
학명 Pyrus pyrifolia

봄이 무르익어 갈수록 산속의 나무들은 저마다 치열한 눈치작전을 편다. 계획을 잘못 세우면 ‘썩은 나무’란 이름을 달고 숲속에서 영원히 퇴출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새잎을 내고 꽃을 피우는 시기, 자람의 속도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신경을 써야 한다.

돌배나무는 다른 나무들보다 조금 늦게 새하얀 꽃으로 한 해를 출발한다. 그것도 한두 개의 꽃이 아니라 커다란 나무를 온통 뒤덮을 만큼 수많은 꽃을 피운다. 돌배나무는 잎이 난 뒤에 꽃을 피우는 일반적인 순서를 따르지 않는다. 우선 자손을 퍼뜨리는 일을 최우선 순위에 둔다. 적어도 한 해의 자식농사만큼은 망치지 않겠다는 종족보존의 강한 집념을 그대로 보인다.

배꽃은 진분홍 복사꽃, 연분홍 벚꽃과 같은 경쟁나무에서 보이는 것처럼 도발적인 화려함이나 요염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흰빛이 갖는 고고함에 덧붙여 다소곳하면서도 마치 소복에 숨겨진 청상과부의 어깨선 마냥 배꽃은 애처로움이 배어 있고, 때로는 아쉬움이 묻어 있는 그런 느낌이다. 그래서 과일나무이면서도 꽃으로 뭇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지도 모른다. 조선 명종 때의 부안 기생 매창은 한 번 떠난 후 소식이 끊긴 애인 유희경을 두고 이런 시 한 수를 남긴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을 생각하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노매

돌배나무는 산속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다. 자람 터를 별로 가리지 않아서다. 돌배나무의 조상은 산짐승들이 먹을 수 있는 과육을 만들어 먹이고, 대신에 씨앗은 멀리 옮겨 달라는 유전자 설계를 해두었다. 덕분에 산짐승이 쉬어 간 고갯마루나 물 먹으러 왔다가 잠시 실례한 개울가 등 그들이 지나간 곳이면 어디에서나 터를 잡고 자란다.

환경 적응력이 높은 탓에 배나무에는 유난히 종류가 많다. 우리가 흔히 먹는 개량종 참배나무 외에 돌배나무, 산돌배나무를 비롯하여 청실배나무, 문배주로 이름이 알려진 문배나무까지 한참을 헤아려 보아야 한다. 여기에다 팥배나무, 콩배나무, 아그배나무 등 사이비 배나무까지 합치면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그러나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배가 열리는 나무는 대체로 돌배나무 아니면 산돌배나무다. 돌배나무는 주로 중부 이남에서 자라고 꽃받침 잎이 뾰족하며 열매는 다갈색이다. 반면 산돌배나무는 중부 이북에서 주로 자라고 꽃받침 잎이 둥글며 열매는 황색으로 익는다. 그러나 둘의 구별은 알쏭달쏭하기 마련이다. 그냥 쉽게 친숙한 이름인 ‘돌배나무’라고 불러도 산돌배나무가 크게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남쪽이라고 배나무 종류가 자라는데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본래 고향은 북쪽의 추운 지방이다. 그래서 옛날 배의 명산지는 봉산, 함흥, 안변, 금화, 평양 등 대부분 북한 지방이었다.

산에다 두고 따먹기만 하던 돌배는 멀리 삼한시대부터 집 주위에 한두 포기씩 심으면서 과수로 자리매김을 해나갔다. 자연히 사람들은 돌배나무 중 굵은 열매가 열리고 맛이 좋은 돌배를 골라다 심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청실배, 백운배, 문배, 황실배, 함흥배 등 이름을 날리는 품종이 생겨났다. 특히 청실배는 맛이 좋아 옛사람들도 흔히 키우던 배나무 종류다. 《화암수록》의 〈화목구등품〉에 보면 “배는 품종이 많으나 정선 청리(靑梨)의 큰 것은 과일접시 한 그릇에 가득 찬다”라고 했다. 서울 중랑천 넘어 태릉 일대가 아파트단지로 변해버리기 전까지 ‘먹골배’란 이름으로 우리의 미각을 자극하던 추억의 배도 대부분 청실배였다.

오늘날 개량종이란 이름으로 일본 배, 중국 배, 서양 배가 우리 돌배를 제치고 나라의 배 밭을 모두 점령해버렸다. 옛 맛을 아는 이라면 넘쳐흐르는 과즙과 너무 진한 단맛이 오히려 돌배에 대한 아쉬움을 불러일으킨다.

산속에서 아름드리로 자란 돌배나무는 또 다른 쓰임새가 있다. 속살이 너무 곱고 치밀하여 글자를 새기는 목판(木板) 재료로 그만이다. 멀리 고려 때 팔만대장경을 만드는 장인들의 눈에도 돌배나무는 일찌감치 각인되었다. 돌배나무는 베어져 부처님의 말씀 하나하나를 새길 수 있도록 기꺼이 ‘육신공양’을 했다. 산벚나무와 함께 팔만대장경 판으로 만들어져 760년이 지난 지금도 민족의 위대한 문자 문화재로 정성스런 보살핌을 받으면서 해인사에 고이 누워 있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박상진 집필자 소개

평생 나무를 연구한 학자, 서울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일본 교토대학 대학원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북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무령왕릉 나무 관 등 나무로 만든 문화..펼쳐보기

출처

우리 나무의 세계 1
우리 나무의 세계 1 | 저자박상진 | cp명김영사 도서 소개

나무의 생태학적인 접근을 넘어 인문학적인 관점으로 재조명한다. 우리 민족의 삶이 담긴 역사서 속에서 나무 문화재 대한 향기로운 이야기와 비밀을 알아본다.

전체목차
전체목차
TOP으로 이동


[Daum백과] 돌배나무우리 나무의 세계 1, 박상진, 김영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