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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본 「웨이 백(Way back)」이라는 영화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시베리아에 있는 포로수용소를 탈출해 티베트의 수도 라싸까지 온 사람들이 인도로 가고 싶다고 하니 라싸 현지인이 시킴(Sikkim)으로 가면 된다고 하는 대목이 나왔다. 히말라야 산맥을 두고 마주보고 있는 인도와 티베트의 통로가 시킴이다. 다르질링은 이 시킴 바로 남쪽에 경계를 이루면서 오늘날 웨스트벵골(서벵골) 주 북쪽 끝에 위치한다. 양쪽으로는 네팔과 부탄이 면해 있다.
다르질링이 1830년대 당시는 시킴 왕국의 영토였지만, 휴양지와 전략적 요충지로서 이곳의 가능성을 본 영국이 양도받았다.각주1)
다르질링이란 이름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로는 몇 가지가 전한다. 하나는 ‘도르자 링(dorja ling)’에서 유래했다는 것인데, 신성한 숭배의 대상인 ‘도르자(dorja)’의 땅이라는 뜻이다. 또한 한때 언덕 위에 세워졌던 불교 사원의 이름이었다는 설도 있다. 현재의 다르질링 타운이 이곳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고 한다. 다르질링은 또한 티베트의 기원도 가지고 있는데, 천둥과 비를 관장하는 인드라 신의 천둥이 휴식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다양한 유래가 있는 다르질링인지라 이 좁은 지역에서 생산되는 홍차 또한 그렇게 다양한 맛과 향을 뿜어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830년대 중반 이곳의 책임자로 온 영국인 캠벨 박사는 영국 군인들을 위한 휴양지를 건설함과 동시에, 차나무를 시험 재배하는 데도 성공했다. 당시는 아삼에서의 차 재배 가능성을 보고 인도 각지에서 차가 자랄 수 있는 곳을 탐색하던 중이었다. 중국에서 가져온 중국종과 아삼에서 가져온 아삼종이 모두 이 고지대의 시원하고 밀도 낮은 공기, 많은 강우량, 황금빛 태양에 잘 적응한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1856년경 실험적 다원에서 성공을 거둔 뒤 다원 개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1866년경 다르질링의 다원 숫자는 39개로 늘어났으며 생산량이 21톤에 이르렀다. 오늘날까지도 유명한 다원[암부샤(Ambootia), 바담탐(Badamtam), 마카이바리(Makaibari), 싱겔(Singell) 등] 중 많은 것이 이때 세워졌다. 1839년경 100여 명에 불과하던 인구는 1881년경에는 9만5000여 명으로 불었고 다원은 100개를 넘어섰다.
다르질링에서 첫날 묵었던 쿠르세옹 지역의 호텔은 아주 오래된 양식의 건축물이었는데, 벽면 곳곳에 다르질링 개척 당시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고산지대를 깎아서 길을 내고 경사 급한 산허리를 계단으로 층층이 개간해 차를 심는 모습들이 사진에 담겨 있었다.
아삼에서의 다원 개척 시 그 비참함이란 오늘날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었는데, 다르질링도 150여 년 전 아삼 못지않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많은 사람의 피와 눈물로 만들어진 곳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오늘날까지도 생산 과정을 냉철한 눈으로 보면 우리가 마시는 홍차의 아름다운 맛과 향에 어울리지 않는 슬픈 배경을 지니고 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이에 관한 책도 쓰고 싶다. 어쨌거나 이렇게 하여 홍차의 샴페인이라고 알려지는 다르질링 홍차의 역사가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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