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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산화수소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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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져보니 40여 년이나 되었나 보다. 귀국 전 미국에서 지내던 시절 가끔 안사람과 말도 되지 않는 시트콤을 TV에서 보면서 웃음을 참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I Dream of Jeannie〉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주인이 병을 쓰다듬으면 아름다운 그녀가 하얀 연기를 타고 나와서는 여러 가지 믿지 못할 일을 벌이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어떻게 우리들을 속이면서 제니가 나타나는지, 또 그 흰 연기는 무엇이고 어떻게 발생했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요즈음 과학 아니 좁게 말해 화학을 지나치게 마술적 연출과 연결시킨다는 비판을 종종 듣고 있다. 과학을 흥미 위주로 몰고 있는 문제점의 지적이 어느 정도 정당성을 지니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겠으나 그렇다고 과학을 지나치게 재미없게 다루어도 교육 효과 면에서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쯤에서 제니 얘기로 다시 돌아가자.

제니가 흰 연기 속에서 선녀처럼 나타나는 장면은 특히 어린이들에게는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으리라 믿는다. 그 신비로운 장면을 소독약으로 쓰이고 있는 옥시풀(과산화수소를 약 3% 포함한 수용액)의 주성분인 과산화수소의 화학 반응으로 연출했다고 한다면 누가 믿겠는가. 과산화수소(H2O2)는 불안정하여 쉽게 분해되며 물과 산소를 만든다. 이 반응은 발열량이 꽤 크다. 그러나 분해 반응은 비교적 느리기 때문에 가정에서 옥시풀을 장시간 보관하면서 사용하고 있다.

이 분해 반응을 빠르게 할 수 있는 방법을 화학자들은 잘 알고 있다. 예컨대 빛에 노출시킨다든가 또는 이산화망간 같은 촉매를 사용하면 된다. 빛이 반응을 촉진하기 때문에 과산화수소 병은 갈색이든지, 빛이 통하지 않는 용기를 사용한다. 이산화망간은 배터리 속에서 볼 수 있는 검은 가루다. 이산화망간 소량을 과산화수소에 넣어주면 흰 연기가 거의 순간적으로 생긴다. 흰 연기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아주 작은 물방울들이 빛을 산란시키기 때문에 그렇게 보인다. 과산화수소가 촉매 때문에 빠르게 분해되면서 발생하는 열 때문에 물이 기화된 후 응축해 마치 흰 연기가 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더라도 그 흰 연기 속에서 어떻게 제니가 나타나는지 궁금해진다. 이는 완전히 멋진 속임수다. 카메라 한 대는 과산화수소 분해병에 초점을 맞추고 또 한 대는 제니에게 맞추어 시간상 연속적인 것처럼 카메라들을 움직여준 덕분이다. 제니는 흰 연기를 보지도 못했다는 일화도 있다.

우리 인체 내 대사 중에도 과산화수소가 생긴다. 그러나 과산화수소가 몸에 많이 축적되지 못하도록 간에 있는 카탈라제라는 효소가 분해시킨다. 과산화수소는 인체 내에서 히드록시 라디칼(HO•)을 만들며 이 활성 화학종은 암을 유발하고 또 노화를 촉진하는 원인으로 간주된다. 글루타치온 퍼옥시다제라는 효소도 과산화수소를 물과 산소로 분해시킨다. 산소를 우리 몸 구석구석에 공급해주는 피 속의 헤모글로빈도 퍼옥시다제와 같은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헤모글로빈이 과산화수소를 물과 산소로 분해시키는 능력을 지녔다는 얘기다. 이 능력은 범죄 수사에서도 발견된다.

범인이 혈흔을 다 없앴다고 생각하겠지만 헤모글로빈이 방바닥에 조금만 묻어 있어도 (비록 육안으로는 알아볼 수 없다 하더라도) 이를 찾아낼 수 있다. 현장에 도착한 수사관은 과산화수소와 루미놀이라 부르는 형광물질을 섞은 용액을 살포한다. 헤모글로빈(피)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과산화수소를 분해시켜 산소를 발생시키며, 산소는 바로 루미놀과 반응해 짙은 녹색의 발광을 보여준다. 이 방법으로 하와이와 시카고에서 있었던 살인사건의 증거를 찾아낼 수 있었다.(범죄 현장에서 만나는 화학 항목 참조)

과산화수소가 관여하는 반응을 이용해 우리는 햄이나 소시지 등이 박테리아로 오염되어 있는지 쉽게 판별한다. 박테리아도 인간들처럼 과산화물을 만들며, 이들이 육류에 들어 있는 붉은색의 미오글로빈을 공격한다. 그때 미오글로빈은 산화분해되어 눈으로 보아도 먹고 싶다는 생각을 잃게 하는 녹색 화합물들을 만든다.

과산화수소가 전쟁에 사용된 이야기는 더 유명하다. 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독일의 V-2 로켓의 추진 연료로 과산화수소와 이산화망간 혼합물이 쓰였기 때문이다. 독일은 코메트(Komet)라는 비밀 비행기도 개발했는데 히드라진과 메탄올 혼합물 연료를 과산화수소로 산화시켜 생기는 뜨거운 증기를 비행기의 추진력으로 사용했다.

소독약이라고 한 병쯤 집에 두고 있을 과산화수소가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균들이나 산화시켜 살균시키는 게 전부라 믿고 있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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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일 집필자 소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화학과 학사 및 석사 과정을 마치고 1969년 미국 뉴욕시립대학교에서 고분자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5년간 미국 스타우퍼케미컬사 연구소에서 연구생활을 한 후 1974년부터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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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밖 화학 이야기
교실밖 화학 이야기 | 저자진정일 | cp명궁리 도서 소개

일상 속 화학 이야기와 친해지는 시간! 방사선 처리 식품의 안전, 현대인의 생활을 점령한 카페인, 페트병으로 만든 등산용 재킷 등 일상생활 속에 화학이 얼마나 깊이 자..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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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과산화수소의 비밀교실밖 화학 이야기, 진정일, 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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