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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에서 꼭
봐야 ...
서명의 방
서명의 방은 원래 율리오 2세가 개인 서재 혹은 개인 도서관으로 사용하다가, 1530년경 《예술가 열전》의 저자이자 미술가인 바사리가 방문할 즈음 교황이 이곳을 중요한 문서들을 읽고 서명하는 방으로 용도 변경한 것을 보고, ‘서명의 방’이라고 이름 붙이게 되었다. 라파엘로가 도나토 브라만테의 추천으로 로마에 도착하기 이전, 이 방은 온갖 기행으로 ‘소도마(Sodoma, 동성애자)’라는 별명을 얻은 조반니 안토니오 바치(Giovanni Antonio Bazzi, 1477~1549)가 장식을 전담해 전체적인 구성과 도안을 끝낸 상태였다. 그러나 흥청망청 사느라 차일피일 일을 미루는 그의 더딘 작업 방식을 견디다 못한 율리오 2세는 라파엘로를 불러 소도마와 함께 작업하도록 했다. 이윽고 서명의 방 장식이 끝날 무렵, 율리오 2세는 라파엘로를 제외한 나머지 화가들이 로마를 떠나건 말건, 일절 미련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라파엘로를 아끼게 되었다. 라파엘로 덕분에 로마를 떠나야 했던 화가들 중에는 함께 작업하던 소도마를 비롯해 스승인 페루지노도 있었다.
율리오 2세는 직접 군대를 끌고 전투에 참여할 만큼 과격한 성정으로 인해 전사 교황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그는 상당한 양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었고, 이를 일목요연하게 꽂아둘 서재가 필요했다. 당시 이탈리아 실세들의 서재는 학식과 교양을 갖춘 지도자의 이미지를 선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교황의 서재는 우르비노 공국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Federico da Montefeltro, 1422~1482) 공작의 도서관 분류를 참고해 꾸몄다. 당대 최고 수준이었던 그의 도서관 장서들은 신학, 철학, 법학, 의학의 네 주제로 분류되었는데, 율리오 2세는 이를 참조하되 시와 문학에 더 관심이 깊은 취향을 반영해 ‘의학’의 자리를 ‘문학’이 대신하도록 했다.
라파엘로는 네 개의 벽면에 각각 대형 그림인 〈아테네 학당〉, 〈성체 논쟁〉, 〈파르나소스〉, 〈정의〉를 그려 넣었고, 그 내용과 연결되는 네 개의 원형 그림을 천장에 연결해놓았다. 천장 정중앙에는 교황의 문장이 새겨져 있고, 원형 그림들은 다시 성서의 내용을 담은 네 개의 사각형 그림과 그 내용이 연결된다.
도서관 겸 서재, 그리고 교황청의 고위 성직자와 각국의 사절들이 드나들었을 이 공간은 기독교 최고 권위자의 공간임에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와 기독교에서 배척하던 이교의 신들로 가득하다. 이는 고대 그리스와 그 전통을 고스란히 계승하는 로마 인문주의의 부활이라는 르네상스의 분위기가 교황청에서도 전폭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몇몇 교황들은 이교도적이고 세속적이어서 위험한 인문주의에 심각한 거부감을 보이기도 했으나, 율리오 2세는 과거의 영광을 상기시켜 현재 로마와 기독교 세계를 부흥하기 위해 기꺼이 이를 수용함으로써 로마를 명실 공히 르네상스 최고의 지성소로 탈바꿈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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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시국에는 피나코테카를 비롯해 키아라몬티와 브라치오누오보 미술관, 에트루리아와 이집트 미술관 등 총 24개의 미술관과 기념관이 있다. 바티칸 미술관에서 놓치지 말..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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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서명의 방 – 바티칸 미술관에서 꼭 봐야 할 그림, 김영숙,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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