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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과학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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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나노 삼형제

그래핀, 탄소나노튜브, 풀러렌

요약 테이블
분야 신소재

지구에는 100여 종의 원소가 있지만 탄소처럼 특이한 원소도 없는 것 같다. 연필심의 주성분인 시커먼 흑연이 다름 아닌 탄소인 반면 콩알만 한 크기에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다이아몬드도 탄소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원소로 이뤄져 있지만 그 배열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물성을 띠는 대표적인 사례인 흑연과 다이아몬드는 물질의 신비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1985년 풀러렌(fullerene)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탄소 물질이 등장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뒤이어 1991년 탄소나노튜브(carbon nanotube)와 2004년 그래핀(graphene)이 잇달아 발견되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이 세 가지 물질들은 형제라고도 볼 수 있다. 모두 나노미터 수준에서 독특한 특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나노는 10억분의 1을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들 세 물질은 ‘탄소나노 삼형제’라고 부를만하다. 이들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면 첫째인 풀러렌을 발견한 과학자들은 1996년 노벨화학상을 받았고, 셋째인 그래핀을 발견한 물리학자들은 불과 6년 뒤인 2010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지난 20여 년 동안 ‘나노과학’ 또는 ‘나노기술(NT)’의 아이콘이었던 탄소나노튜브만 빠진 게 아쉬운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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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를 바꾸는 신소재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의 글을 보면 ‘유리창’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이를 토대로 사람들은 유리창의 역사가 적어도 2000년은 됐다고 추정한다. 유리창이 없던 시절 사람들은 창문을 열지 않고서는 바깥을 볼 수 없었다. 봄, 여름, 가을에는 문제가 없지만 겨울에는 환기할 때를 빼면 창문을 열지 않게 된다. 또 비바람이 거세도 창문을 닫아야 한다.

따라서 실내는 어두컴컴해 촛불을 켜지 않으면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우리조상들은 빛이 상당량 통과하는 창호지를 만들어 실내조명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했지만 밖이 안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유리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고 넓은 유리판을 만드는 기술이 확립되자 유리창은 보편화됐고 지금 우리는 이를 당연한 걸로 여기며 살고 있다. 20세기 초반에 나타난 플라스틱과 중반에 등장한 반도체 역시 우리의 생활양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처럼 신소재의 등장은 인류의 삶뿐 아니라 지구의 모습까지도 바꿔놓는 힘이 있다.

사람들이 현재의 물건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나은 걸 추구할 때 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기존의 소재를 개선하거나 새로운 소재를 만드는 일이다. 인류의 역사는 이 가운데 후자가 근본적인 해결책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사람들이 찾는 건 무엇일까.

먼저 환경과 에너지 측면이 획기적으로 개선된 소재다. 사람들은 환경에 해롭지 않은 원료로 쉽게 만들 수 있으면서도 더 가볍고 튼튼한 소재를 찾고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 무게를 1% 줄이면 연료가 0.6% 줄어든다고 한다. 따라서 강철만큼 강한 플라스틱을 만들어 차체로 쓸 수 있다면 환경과 에너지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셈이 된다.

다음으로 사람들은 좀 더 편리하고 기능이 뛰어난 물건을 상상한다. 둘둘 말아 가방에 넣고 다니다가 꺼내 펼쳐서 벽에 걸어놓고 볼 수 있는 디스플레이가 대표적인 예다. 이런 ‘꿈’이 현실이 되려면 돌가루(실리콘산화물)로 만든 반도체 대신 ‘유연한’ 소재가 필요하다.

그래핀은 육각형으로 결합한 탄소가 벌집 또는 그물처럼 연결된 구조로 신축성과 유연성이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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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요구를 충족해줄 수 있는 신소재가 등장했다. 탄소나노 삼형제인 풀러렌, 탄소나노튜브, 그래핀이 그들이다. 이 가운데 첫째인 풀러렌은 1985년 미국 라이스대학교 화학과 리처드 스몰리 교수팀이 발견한 분자로 탄소 60개로 이뤄진 축구공처럼 생긴 분자다. 그 뒤 탄소 70개짜리를 비롯해 다양한 풀러렌 분자가 발견되거나 만들어졌다.

둘째인 탄소나노튜브는 일본 NTT의 수미오 이지마 박사가 1991년 발견했다. 탄소원자가 죽부인처럼 배열된 탄소나노튜브는 풀러렌을 양쪽 방향으로 늘린 모양새다. 그리고 셋째가 2004년 영국 맨체스터대학교 물리학과의 안드레 가임 교수팀이 발견한 그래핀이다. 연구자들은 흑연에 스카치테이프를 붙였다 떼는 ‘간단한’ 방법으로 탄소원자 한 층으로 이뤄진 그래핀을 얻었다.

그렇다면 탄소나노 삼형제가 어떤 특징을 지녔기에 가장 촉망받는 미래의 신소재로 여겨지며 노벨상을 두 개나 받았을까.

흑연 덩어리에서 그래핀을 분리하는 모습을 전자현미경으로 찍었다. 얇은 판처럼 보이지만, 두께가 10nm로 그래핀이 약 30장 겹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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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노 세계에서 변신하는 탄소

풀러렌을 발견한 스몰리 교수는 안타깝게 지난 2005년 아직 한창일 62세에 지병인 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풀러렌을 발견한 뒤 나노과학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다녀 ‘나노과학의 창시자’로 불렸다. 풀러렌이 바로 대표적인 나노입자다. 축구공처럼 생긴 풀러렌 분자의 지름은 1.1나노미터에 불과하다. 나노는 10억분의 1이므로 풀러렌 분자를 일렬로 세워 진짜 축구공 지름(22cm) 길이를 만들려면 무려 2억 개가 필요하다.

탄소원자 60개가 오각형과 육각형을 이루어 축구공 모양을 하고 있는 풀러렌 분자의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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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나노튜브 역시 탄소로 이뤄진 지름 수나노미터의 관(합성 조건에 따라 관의 지름을 달리할 수 있다)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그래핀의 경우 아예 탄소원자 한 층으로 된 그물망(축구골대에 걸려있는 육각형 모양의 그물망을 생각하면 된다)으로 두께는 0.4나노미터에 불과하다. 아래 예를 보면 이게 어느 정도인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2010년 성균관대학교 화학과 홍병희 교수팀은 대각선 길이가 30인치(76cm)인 그래핀 필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를 종이(보통 두께가 0.1mm)로 생각하면 무려 200km에 해당한다. 경기도와 충청도를 다 덮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넓이다.

그래핀으로 만든 가로세로 2cm의 투명전극

성균관대학교 홍병희 교수팀이 개발해 《네이처》에 발표한 것으로 그래핀으로 휘어지는 디스플레이를 만들 수 있음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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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종이 한 장의 두께는 직접 재보지 않아도 쉽게 추정할 수 있다. 200쪽(100장) 분량의 책 두께가 1cm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래핀 필름 25만장을 포개야 종이 한 장 두께가 된다. 탄소원자 한 층의 두께는 이 정도로 얇다.

그런데 탄소로 이렇게 작고 얇은 소재를 만들 수 있다는 게 학술적으로는 대단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실생활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 놀랍게도 탄소원자가 나노분자를 이루면 흑연같이 엄청난 숫자가 모여 커다란 덩어리로 있을 때에는 없었던 새로운 특징들이 나타난다.

즉 탄소나노분자는 같은 무게의 어떤 물질보다도 강하면서도 열과 전기를 잘 통과시킨다. 예를 들어 탄소나노튜브는 강철보다 훨씬 가벼우면서도 더 단단하다. 여러 겹으로 된 탄소나노튜브를 양쪽에서 잡아당겼을 때 버틸 수 있는 인장강도는 63기가파스칼(GPa)이나 된다. 이게 어느 정도냐 하면 단면적이 연필심 굵기(1mm2)인 케이블이 성인 100명에 해당하는 6400kg을 매달고도 버티는 것에 해당한다. 강철의 300배가 넘는 강도다.

그러면서도 탄성이 커 늘어나거나 휘어졌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온다. 탄소나노튜브는 길이방향으로 16%까지 늘어날 수 있다. 탄소-탄소 원자 사이의 화학결합이 무척 강하면서도 융통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핀은 탄소나노튜브를 세로축 방향으로 가위로 잘라 펼친 형태이므로 탄소나노튜브의 특성을 그대로 갖고 있다. 그래핀의 탄소 그물망이 얼마나 강력한가 하면 그래핀 1m2로 그물침대를 만들 경우 몸무게 4kg인 고양이가 낮잠을 즐길 수 있다. 투명해 맨눈에 거의 보이지 않는 그래핀 그물침대의 무게는 고작 0.77mg으로 고양이 수염 하나보다도 가볍다. 또 그래핀 그물망이 축구 그물망처럼 출렁거린다. 얼핏 생각하면 단점 같지만 이런 유연성이야말로 많은 산업계에서 필요로 하는 특성이다.

변신의 귀재 그래핀

흑연에서 처음 분리해 낸 그래핀은 2차원 평면으로, 공처럼 모으면 풀러렌이 되고 말면 탄소나노튜브가 된다. 차곡차곡 쌓으면 다시 흑연을 만들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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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스쿠스 탄소나노 삼형제

다른 많은 신소재와는 달리 탄소나노 삼형제는 최근 ‘발견’된 것이지 ‘발명’된 것은 아니다. 이들 물질은 이미 자연계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지난해 과학학술지 《사이언스》에는 저 멀리 우주 속에 풀러렌 분자들이 떠다니고 있음을 입증한 논문이 실렸다. 즉 별 내부 핵융합으로 탄소가 만들어진 뒤 별이 폭발해 잔해가 우주로 흩어졌을 때 뜨거운 탄소원자가 식으면서 풀러렌 분자를 만들었을 거라는 얘기다. 풀러렌은 지구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던 셈이다.

탄소나노튜브에 얽힌 이야기도 흥미롭다. 지난 2006년 과학학술지 《네이처》에는 신비의 보검으로 유명한 ‘다마스쿠스 검’을 전자현미경으로 자세히 살펴봤더니 탄소나노튜브가 들어있더라는 논문이 실렸다. 다마스쿠스 검은 중세 이슬람인들이 사용한 무기로 단단하면서도 탄성이 높아 잘 부러지지 않는 명검이다.

11세기 말 유럽인들이 십자군원정을 갔을 때 이슬람인들이 자신들이 쓰는 검보다 훨씬 우수한 검을 쓰는 걸 보고 이런 이름을 지었다. 아쉽게도 다마스쿠스 검의 제조비법은 18세기 무렵 사라졌다고 한다. 보통 강철은 탄소함량에 따라 강도와 탄성이 바뀐다. 즉 탄소가 적게 들어 있으면 탄성은 좋지만 강도가 약한 반면 많이 들어있으면 강하지만 잘 부서진다.

그런데 다마스쿠스 검은 탄소의 상당 부분이 탄소나노튜브 형태로 들어있어 강하면서도 잘 부러지지 않았던 것. 연구자들은 당시 강(鋼)을 제조할 때 탄소나노튜브의 형성을 촉진하는 과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래핀은 위의 두 가지보다도 더 흔하게 우리 주변에 있던 물질이다. 다만 무수한 층을 이룬 흑연이란 형태로 존재했을 뿐이다. 연필심에 손가락을 쓱 갖다 대면 우리 눈에는 안 보이지만 그래핀이 비록 한 층짜리는 아니더라도 묻어나게 된다.

아무튼 탄소나노 삼형제의 실체를 알게 되고 여러 측면에서 놀라운 특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상용화 실적이 미미하다. 애초에 응용 쪽은 큰 기대를 하지 않은 풀러렌은 그렇다고 쳐도 나노과학의 아이콘인 탄소나노튜브 역시 아직은 폭넓게 쓰이지 못하고 있다.

20년 전 탄소나노튜브가 발견됐을 때만해도 이지마 박사가 노벨상을 타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지만 지난해 탄소나노튜브는 건너뛰고 그래핀 연구자들이 수상자가 된 배경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금세 세상을 바꿀 줄 알았던 탄소나노 소재의 상용화가 왜 이렇게 부진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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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나노튜브 수백~수천 가닥을 일정하게 꼬면 탄소나노튜브 섬유가 만들어진다. 이때 빼곡한 부챗살 형태를 이룬 탄소나노튜브 층 위에 특정 물질을 첨가하면 탄소나노튜브와 첨가물의 특성을 함께 가진 기능성 섬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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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나노튜브를 보자. 현재 반도체 소자는 선폭이 30나노미터까지 줄어들어 사실상 한계에 다다랐다. 그런데 탄소나노튜브는 지름이 수나노미터에 불과하므로 탄소나노튜브로 칩을 만들면 집적도를 훨씬 높일 수 있다. 실제로 탄소나노튜브로 만든 트랜지스터를 소개한 논문이 《네이처》에 실린 게 1998년이다. 2007년에는 탄소나노튜브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성공이 곧 탄소나노튜브 반도체 시대가 임박했다는 뜻은 아니다. 아직까지 탄소나노튜브를 일정한 크기로 만들 수도 없고 제조비용도 비싸기 때문이다. 게다가 설사 싼 값에 균일한 탄소나노튜브를 만드는 데 성공하더라도 나노수준의 정교한 패턴대로 칩에 배치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기존 실리콘 반도체의 경우 리소그래피(식각) 방식으로 회로의 패턴을 만드는데 그 과정이 자동화돼 있어 대량생산이 가능하다. 손톱만 한 면적에 트랜지스터 수십억 개가 배치돼 있는데 탄소나노튜브를 이렇게 조작할 방법이 없다. 한마디로 탄소나노튜브로 트랜지스터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데 의미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탄소나노튜브는 실용적인 면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는 걸까? 공학에서 반도체칩처럼 정교한 구조가 개입되는 분야를 ‘하이테크(high tech)’라고 부르는 반면 단순히 강도를 높이거나 전기를 잘 통하는 데 주안점을 둔 분야를 ‘로테크(low tech)’라고 부른다. 탄소나노튜브의 경우 하이테크 쪽은 요원하지만 로테크 쪽은 이미 상용화가 진행되고 있다.

즉 자동차나 항공기 부품에 탄소나노튜브를 섞은 소재를 씀으로써 강도를 높이고 전기적 안전성을 높일 수 있다. 예를 들어 고급차인 아우디 A4 신형에 쓰이는 연료 필터는 탄소나노튜브를 함유한 플라스틱 재질이다. 일반 플라스틱의 경우 정전기 때문에 스파크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지만 탄소나노튜브를 섞을 경우 플라스틱의 전기전도도가 커져 이런 염려가 없다. 리튬 이온 배터리의 전극에도 탄소나노튜브를 넣어 물성을 개선하기도 한다.

미국의 이스톤-벨스포츠라는 스포츠용품제조회사는 탄소나노튜브를 포함한 재질로 가볍고 강한 자전거 부속품을 만들어 공급하고 있다. 또 터치스크린처럼 투명하면서도 전기가 통해야 하는 얇은 필름을 탄소나노튜브로 만드는 연구도 상업화에 임박해 있다. 그 결과 현재 연간 수백 톤 규모로 탄소나노튜브를 생산하고 있다.

탄소들이 튜브 모양을 하고 있는 탄소나노튜브는 1990년대 이후 가장 주목받는 나노기술의 키워드로 자리 잡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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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그래핀이 주목받는 이유는 탄소나노튜브가 적용되는 로테크 영역에서 대부분 그래핀도 적용될 수 있는데다가 탄소나노튜브에 비해 만들거나 다루기가 훨씬 쉽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터치스크린으로 쓸 수 있는 그래핀 필름을 대량으로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최근 1~2년 사이에 놀라운 발전을 이뤘다.

지난해 성균관대학교 홍병희 교수팀이 개발한 그래핀 필름 제조 기술은 ‘롤-투-롤(roll-to-roll) 과정’으로 명명한 획기적인 방법이다. 연구자들은 구리 호일에 탄소증기를 증착시킨 뒤 접착성 고분자 필름을 대고 롤에 넣어 둘을 붙였다. 그 뒤 구리 포일을 산화시켜 이온으로 녹여내면(구리 이온은 다시 환원시켜 구리 포일로 만드는 재활용이 가능하다) 그래핀 필름이 붙은 고분자 필름이 나온다. 이를 그대로 쓰거나 또는 원하는 필름에 비슷한 과정으로 그래핀 필름을 옮길 수 있다. 롤-투-롤이라는 이름을 쓴 이유다.

삼성전자는 연구자들이 만든 그래핀 필름으로 만든 터치스크린 시제품을 만드는 데도 성공했다. 홍 교수는 2013년쯤이면 그래핀 터치스크린이 상용화될 것으로 전망했다. 현재 주로 쓰이는 인듐주석산화물(ITO)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문제도 많기 때문이다. 즉 딱딱한 무기산화물이다 보니 변형에 약하고 깨지기 쉽다. 무엇보다도 주성분인 희토류 원소 인듐이 갈수록 구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따라서 ITO로 코팅한 터치스크린의 가격은 가파르게 오를 전망이다.

실리콘 반도체 vs 탄소나노 삼형제

지난 수년 간 탄소나노 삼형제, 특히 탄소나노튜브와 그래핀에 관한 과학뉴스는 하루가 멀다 하고 나왔다. 최근에는 포스텍 김광수 교수팀이 그래핀을 이용한 획기적인 DNA염기서열분석법을 개발했다고 해서 화제다. 이 기술이 상용화되면 60억 개 염기로 이뤄진 한 사람의 게놈을 불과 1시간에 해독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탄소나노 삼형제가 당장 우리 삶에 큰 변화는 주지 않을 것이다. 사실 탄소나노 삼형제뿐 아니라 어떤 새로운 소재가 개발된다고 해도 사람들의 삶이 순식간에 달라지는 일은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여기서 과학과 기술의 차이가 난다. 과학은 새로운 현상이나 이론을 밝힌 것 자체가 완성이지만 기술은 실생활에 접목되는 긴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플라스틱만 하더라도 20세기 후반 들어 광범위한 제품에 널리 쓰이고 있지만 플라스틱이 처음 발명된 게 1907년이었다.

게다가 뛰어난 신소재가 상용화됐다고 해서 기존의 소재를 완전히 대체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플라스틱이 가볍고 잘 깨지지 않고 싸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목재나 유리를 즐겨 사용하고 있다. 사물의 가치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서는 탄소나노튜브나 그래핀이 플라스틱이나 실리콘 반도체 정도로 인류의 삶에 영향을 미칠지는 불확실하다. 사실 탄소나노 삼형제를 비롯한 여러 나노소재들이 매스컴에는 인기 아이템으로 자주 등장하지만 아직까지는 이들 소재의 용도를 찾기가 만만치 않다. 현재 쓰이고 있는 소재들 역시 나름의 장점이 있는데다 물성을 계속 개선해 나가기 때문이다.

연구진이 합성한 지름 10cm 크기의 그래핀

성균관대학교 홍병희 교수팀과 삼성전자종합기술원 최재영 박사팀이 반도체를 만들 때 필요한 새 기술을 개발했다. 이 기술은 그래핀 합성기술과 패터닝 기술로 연구결과는 영국과학저널 《네이처 온라인》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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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런 실용적은 측면과는 별도로 탄소나노 삼형제의 등장은 인류의 과학기술 지식의 지평을 넓히는 데 밑거름이 됐다. 매년 전 세계에서 논문이 수천 편씩 쏟아지고 있다. 2010년 자료를 보면 풀러렌을 다룬 논문이 2000편, 탄소나노튜브는 8000편, 등장한 지 불과 6년 된 그래핀은 가파르게 상승해 3000편에 이르고 있다. 아마 그래핀을 다룬 논문은 수년 내 탄소나노튜브를 제칠 것이다.

이들 물질을 연구하면서 과학자들은 ‘나노’라는 미시세계에서 벌어지는, 전에는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현상들을 하나둘 알아가고 있다. 탄소나노 삼형제라는 연구할 ‘대상’이 없었다면 이런 발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 역시 매스컴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탄소나노 삼형제 덕분에 나노가 10억분의 1을 뜻한다는 것쯤은 이제 상식이 됐다. 또 죽부인처럼 생긴 탄소나노튜브나 골대 그물처럼 생긴 그래핀의 분자구조 역시 익숙할 것이다. 수년 뒤 그래핀 필름이 코팅된 터치스크린이 장착된 휴대폰이나 태블릿PC를 쓰게 되면 우리는 매일 그래핀과 ‘접촉’하며 살 것이다.

탄소나노튜브 상용화가 지지부진한 것 같지만 지난 수년 동안 중요한 진전이 많이 이뤄졌다. 탄소나노튜브는 탄소가 풍부한 증기를 적당한 촉매를 써서 반응시켜 튜브 형태로 만드는데 그 길이나 굵기가 제각각이다. 따라서 균일한 물성을 띠게 하려면 탄소나노튜브를 최대한 비슷한 굵기와 길이에 맞게 분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기술이 지난 2005년 개발됐다. 따라서 현재는 어느 정도 균일한 탄소나노튜브 소재를 얻을 수 있다.

사실 상용화의 가장 큰 걸림돌은 가격이다. 현재 탄소나노튜브의 가격은 킬로그램당 100달러(약 11만원) 수준으로 철이나 알루미늄, 플라스틱보다 훨씬 비싸다. 획기적인 제조법이 등장하지 않는 한 10년 뒤에도 50달러 수준으로 떨어지는 게 고작일 거라는 추측이다. 아무리 물성이 좋아도 이렇게 가격이 비싸서는 범용 소재로 쓰이기는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탄소나노튜브보다 그래핀에 더 주목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가격이다. 지금은 생산비가 비슷하지만 그래핀은 새로운 대량생산기술이 속속 개발되고 있기 때문에 머지않아 킬로그램당 10달러 미만에 공급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렇다고 그래핀이 쉽게 범용 소재로 쓰일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성균관대학교 화학과 이효영 교수팀이 새로운 환원제로 그래핀을 합성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오른쪽 아래의 ‘그래핀 옥사이드’가 환원돼 그래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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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나노 삼형제가 꿈꾸는 세상

생명과학분야에서는 탄소나노 삼형제의 역할이 기대된다. 지난 2008년 미국 리버사이드 소재 캘리포니아대의 로버트 해든(Haddon) 교수팀은 탄소나노튜브를 주형으로 삼아 부러지거나 깨진 뼈가 다시 자라나게 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뼈는 유기성분인 콜라겐(섬유단백질)과 무기성분인 칼슘결정(히드록시아파타이트)으로 이뤄져 있다. 콜라겐이 모양을 잡으면 칼슘결정이 달라붙어 뼈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탄소나노튜브가 콜라겐의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였다. 원래 탄소나노튜브는 콜라겐보다 훨씬 강한 섬유이지만 그 표면에서 칼슘결정이 잘 자라지 못한다. 연구자들이 탄소나노튜브의 물성을 변화시켜 칼슘결정이 잘 달라붙게 만들었다.

또한 암치료에 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하기도 한다. 미국 캔지우스(Kanzius)암연구재단은 나노입자를 이용한 암치료법을 개발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탄소나노튜브를 암세포에 투입하고 라디오파를 조사하는 방법이다. 라디오파의 에너지를 받은 탄소나노튜브가 진동하면서 열을 내 주위의 암세포를 죽인다는 것.

물론 아직까지는 인체에 나노입자를 적용하는 건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다수다. 나노입자의 안전성이 충분히 검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탄소나노 삼형제 역시 지금까지 생체독성에 대한 연구가 다수 있었지만 아직 결론을 내릴 단계는 아니다. 최악의 경우 풀러렌이나 탄소나노튜브 같은 나노입자는 석면 같은 처지에 놓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편 많은 탄소나노소재 연구자들이 궁극의 목표로 삼고 있는 하이테크 분야도 언젠가는 탄소나노 소재가 진출할 것이다. 집적도의 면에서는 현재 실리콘반도체 소자와 경쟁하기 어렵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플렉서블(flexible)’ 제품을 구현하는 데 탄소나노튜브나 그래핀이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많은 연구자들이 믿고 있다.

그래핀은 전자종이 즉, 휘는 디스플레이 재료로 활용 가치가 뛰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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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플렉서블 소자는 플라스틱 필름 같은 유연한 기판에 ‘프린팅’이 돼야 하는데 실리콘 반도체 소자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래핀은 성균관대학교 홍병희 교수팀이 개발한 롤-투-롤 방법처럼 쉽게 프린팅이 가능하다. 문제는 그래핀으로 회로를 얼마나 쉽게 만들고 어느 수준까지 집적도를 이룰 수 있느냐는 것.

그런데 반도체의 리소그래피를 모방해 그래핀 필름에 회로 패턴을 만드는 일이 가능하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고 있다. 최근 ‘미국화학회저널(JACS)’에 실린 중국 북경대 연구자들의 논문을 보면 이산화티타늄 소재 포토마스크(패턴)를 그래핀 위에 얹고 자외선을 쪼여주면 포토마스크가 덮인 자리의 탄소결합이 끊긴다. 즉 포토마스크가 덮이지 않은 부분의 그래핀만 남게 된다는 말이다.

이런 성과들은 머지않아 그래핀으로 만든 전자회로가 상용화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적어도 10여 년 전부터 들어왔을 플렉서블 디스플레이가 진짜 실용화될 날도 머지않았다. 게다가 그래핀은 사실상 투명하기 때문에(기판인 플라스틱도 투명하다) 투명한 창에서 인터넷 ‘창’이 뜨는 일이 현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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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기 집필자 소개

서울대학교에서 화학을, 동 대학원에서 분자생물학을 공부했다.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과학기자로 일했다. 지금은 프리랜서 작가로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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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알아야 할 과학이슈 1
꼭 알아야 할 과학이슈 1 | 저자이충환 외 | cp명과학동아북스 도서 소개

우리나라 대표 과학 매체의 편집장들과 과학전문 기자, 과학칼럼니스트, 연구자들이 모여 2010년부터 이슈가 됐고 앞으로 우리 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할 과학기술 10가지..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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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그래핀, 탄소나노튜브, 풀러렌꼭 알아야 할 과학이슈 1, 이충환 외, 과학동아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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