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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시기 | 198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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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 | $48,843,750(512억 4000만 원)각주1) |
작가 | 장-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1960~1988) |
“나는 평생 길거리 부랑아로 살 거라고 생각했어요.”
-장-미셸 바스키아
국제 미술 시장 분석 기관인 아트프라이스닷컴(artprice.com)은 매년 ‘한 해 동안 전 세계에서 낙찰 총액이 가장 높았던 작가’ 리스트를 발표한다. 장-미셸 바스키아는 2012년 발표한 리스트에서 11위에 올랐다.
바스키아는 1980년대에 10년도 채 안 되는 짧은 기간 작품 활동을 했고 스물여덟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지만, 피카소, 모네, 워홀 같은 역사적 대가들에 버금가는 인기를 얻고 있다는 뜻이다. 아트프라이스닷컴 발표 다음 해인 2013년 5월에 열린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급기야 회화 한 점이 4884만 달러(512억 4000만 원)에 낙찰되는 기록을 세우며 바스키아 작품 가운데 최고 경매가 기록을 세웠다.
작품을 팔 때는 시기가 중요하다. 2013년 5월은 바스키아의 주가가 한창 올라가던 때였다. 마침 세계 최고 갤러리라 할 수 있는 개고시언 갤러리가 그해 초 뉴욕에서 바스키아 회고전을 열어 수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가는 등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덕분에 경매 직전 바스키아에 대한 관심이 크게 올라갔다. 경매 직후에는 개고시언 갤러리 홍콩 지사에서 바스키아 개인전이 열릴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개고시언 같은 세계적 갤러리가 이렇게 대규모 전시회를 열어 화제를 만들면 사람들의 관심이 그 작가에게 쏠리고, 미술 시장에서도 자연스럽게 그 작가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다.
‘낙서 같은 이 그림이 수백억 원이라고?’
바스키아의 그림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황당해서 잠시 말을 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휘갈긴 듯한 그림을 남긴 바스키아는 놀랍게도 현대 미술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가 시대정신을 잘 표현한 작가였기 때문이다.
좋은 작가가 되는 여러 조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나는 ‘시대성’을 꼽겠다. 자신이 속한 그 시대를 잘 읽어 내고 반영하는 작가는 길이 남는다. 인상파 화가들, 피카소, 워홀도 결국 그런 작가였다. 바스키아는 1980년대 미국 사회를 그대로 반영한 작가다. 그래서 이토록 중요한 작가가 된 것이다.
1980년대 뉴욕은 화이트칼라 중산층 인구가 점차 증가하면서 겉으로는 발전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당시 이 도시에 살고 있던 이민족과 저소득층은 변두리 슬럼가나 싸구려 거주 지역, 길거리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젊은이들의 정신적 공황이 심해져 마약과 범죄가 판치는 도시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젊은이들의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재즈와 힙합 문화로 도시의 열기가 터질 듯했다.
바스키아는 아이티 출신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 시기 뉴욕의 전형적인 저소득층 이민자 가정에서 나고 자란 그는 시대에 반항하는 젊은이였다.
열다섯 살에 가출해 길거리를 나돌며 친구와 함께 ‘세이모(SAMO)’라는 이름으로 거리의 벽에 스프레이로 그림과 메시지를 그렸다. SAMO는 ‘Same Old Shit’, 즉 늘 똑같은 것, 반복되는 것이라는 뜻의 줄임말로, 그들이 늘 피우던 마리화나를 의미한다. 그러나 SAMO 프로젝트는 함께하던 친구와 관계가 틀어지면서 1979년에 그만두었다.
이어 바스키아는 스물한 살이던 1981년부터 캔버스와 종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거리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이어 붙여 콜라주도 했다. 바스키아의 그림에서 인종 문제, 범죄, 마약 등 당시 뉴욕이 겪었을 사회적 불안이 느껴지는 것은 작가가 바로 그런 사회적 문제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에게는 ‘시대성’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는데, 어떤 시기에 어떤 형태의 작품을 만들었는지도 중요하다. 바스키아가 폭발하는 감정을 숨김없이 표현한 1980년대 초는 마침 미술계에서 표현주의적인 그림에 대한 갈증이 있던 때였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까지 유행한 미니멀리즘 미술은 표현 방법과 재료를 최소한으로 줄여 ‘작가의 손’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니 1980년대에 이르러 사람들이 다시 ‘작가의 손’이 많이 들어가고 표현이 풍부한 미술을 원할 만도 했다. 바스키아는 주제 면에서는 불안한 시대의 정신을 담으면서 작품의 외형은 사람들이 원하는 짙은 표현주의적인 형태를 띠었으니 198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가 될 모든 조건을 갖춘 셈이다.
특히 바스키아와 같은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살던 뉴욕 동남부의 ‘이스트 빌리지(East Village)’는 1981년부터 1987년 사이에 예술로 폭발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사이에 이스트 빌리지에서만 갤러리가 백 군데 이상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이런 조건들이 뒷받침되면서 바스키아는 1980년 화가로 정식 데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잘 팔리는 작가’가 되었다. 1985년에는 《뉴욕 타임스 매거진》의 표지에 국제 시장에서 가장 잘 팔리는 새로운 작가로 소개되기도 했다.
바스키아는 1980년에 워홀을 만나 자신의 작품 몇 점을 보여 주었다. 이때 워홀은 그의 천재성에 탄복했고 이후 공동 작업을 하는 등 죽을 때까지 약 7년간 바스키아와 아주 가까이 지냈다.
1987년 자신의 적극적 후원자이자 정신적 지주로 여기던 워홀이 담낭 수술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바스키아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러다 이듬해 스물여덟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1980년대를 불꽃처럼 살다 간 그의 인생은 오히려 신화로 남았다. 그의 역사적 중요성 때문에 세계 주요 미술관에서 그의 회고전이 꾸준히 열리고, 미술 시장에서 수요가 많아 값도 천정부지로 올랐다.
거침없는 표현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바스키아의 특징을 한눈에 보여 준다. 그는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초상화를 즐겨 그렸다. 이 작품은 바스키아의 전형적 특징인 해골 같은 얼굴 두 개가 등장하고, 온갖 원초적 색깔과 흑백색이 아낌없이 발현되었으며, 두꺼운 질감의 표현도 넘쳐 난다. 이 그림은 1996년 토니 샤프라지 갤러리에서 열린 바스키아 회고전에 나왔는데, 당시 미국의 권위 있는 미술 월간지인 《아트 뉴스》에서 이 전시를 리뷰 하며 이 작품을 직접 예로 들어, 바스키아의 원초적 표현력이 한껏 드러나는 작품이라고 언급했다. 어떤 작품이 판매될 때는 이런 기록이 작품 가격에 큰 영향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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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 원화 환산 환율은 외환은행에서 제공하는 2014년 1월 1일~6월 30일의 평균환율(고시 회차 최종, 매매 기준 환율)을 따랐습니다.
참고문헌
- ・ Dan Cameron, ‘It Takes A Village’, East Village USA, New Museum of Contemporary Art, New York, 2005, p.42
- ・ E. Hayt, ‘Jean-Michel Basquiat’, Artnews, 1997년 1월, p.114
글
출처
미술품 거래 역사상 가장 비싼 그림들을 정리하고 각 작품의 예술사적 가치와 비싸게 거래된 이유들을 소개한다. 등장하는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 세계를 소개한 내용과 각 작..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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