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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계사를 움
직인 100
서유럽의 기반을 닦다

샤를마뉴 대제

Charlemagne
요약 테이블
출생 742년
사망 814년
국적 로마제국

카롤링거 왕조의 왕. 프랑크 왕국의 두 번째 왕으로 로마 제국 이후 분열되어 있던 서유럽 지역 대부분을 통일하고 유럽의 기틀을 잡았다. 롬바르드 왕국, 사라센과의 장기간에 걸친 전쟁을 끝낸 후 유럽 동쪽에 사는 민족 중 특히 작센족을 굴복시켜 가톨릭으로 개종시킨 후 자신의 영토로 이주시켜 훗날 오토 왕조가 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사를마뉴의 황제관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샤를 1세, 카를 1세, 혹은 카롤루스라고도 알려져 있는 샤를마뉴 대제는 로마 제국 이후 처음으로 서유럽의 그리스도교 지역 대부분을 통일했다. 그의 제국은 약 한 세대 후에 소멸했지만, 이후 프랑스 및 독일 중세 왕국의 시초가 되었다. 이 때문에 각국에서 자국어로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어서 이렇게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재위 기간 동안 그는 이탈리아를 정복하여 교황 레오 3세에게 신성로마 제국 황제로 인정받았으며, 황제가 된 후 교회를 통해 예술, 종교, 문화를 크게 발전시켜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일으켰다.

샤를마뉴는 742년경 4월 2일 단신왕 피핀 3세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피핀 3세는 형제들과의 전투를 통해 권력을 차지했고, 751년 교황 자카리아스의 승인을 받아 힐데리히 3세를 폐위하고 프랑크 회의에 의해 왕이 되었다. 753년 교황인 스테파누스 2세가 롬바르드 족의 침략전쟁에 대항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하러 왔을 때, 당시 12세였던 샤를마뉴는 왕국의 장자로서 교황을 영접했다. 교황은 피핀 3세와 두 아들 샤를마뉴와 카를(Carloman)에게 왕의 칭호를 수여했고, 피핀 3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롬바드르 족을 로마에서 몰아낼 것을 약속했다.

768년 피핀 3세가 죽고, 프랑크 왕국의 관습에 따라 왕국은 아들인 샤를마뉴와 카를로망에게 분할되었다. 770년 샤를마뉴는 롬바르드 공주와 혼인을 하며 동맹을 맺게 되었지만, 일 년도 지나지 않아 공주를 내치고 슈바벤의 힐데가르트와 재혼했다. 이에 분개한 롬바르드 왕국이 카를로망과 동맹을 맺고 샤를마뉴를 공격했으나 771년 12월 전쟁이 제대로 벌어지기도 전에 카를로망이 사망하고 말았다. 그 후 샤를마뉴는 교황의 뜻에 따라 롬바르드 족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내고 이탈리아 전 지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사를마뉴의 대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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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탈리아에는 아직도 불안이 남아 있었다. 776년 프리울리와 스폴레토 공작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샤를마뉴는 이를 즉각 진압하여 북부 이탈리아를 확고하게 손에 넣었다. 787년에는 아직 독립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베네벤토로 눈을 돌렸지만 베네벤토는 792년 반란을 일으켜 샤를마뉴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라인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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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평화기였던 780년에서 782년 사이에 샤를마뉴는 로마를 방문해 교황이 두 아들 피핀과 루트비히에게 각각 롬바르드와 아키텐의 왕관을 씌워주게 했다. 샤를마뉴는 두 아들을 각자의 영지로 보내 자라게 하고 그들의 입지를 다져주었으나 진짜 권력은 그의 손에 있었다. 그는 아들이라도 자신에게 불복종하는 것은 용서하지 않았고, 792년 장자인 곱사등이 피핀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수도원으로 보냈다.

799년 5월 교황 레오 3세가 로마 인들의 습격을 받았다. 레오 3세는 샤를마뉴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는 800년 11월 로마로 향했다. 성 베드로 성당의 성탄절 미사에서 교황은 그를 '로마의 황제(Imperator Romanorum)'라고 명명하고 카롤루스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샤를마뉴는 제국 내에서 많은 개혁을 단행했다. 수도원, 행정체제, 군대, 문화적, 종교적 개혁을 단행한 그의 시대는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도 일컬어진다. 그는 여러 차례의 정복전쟁을 통해 다양한 전술을 개발했다. 또한 샤를마뉴 시대에는 전투에 말이 많이 이용되었는데, 훨씬 더 빠른 속력으로 멀리까지 갈 수 있기 때문에 그가 거대한 제국을 만드는 데 주요한 동력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또한 샤를마뉴는 금화에 기반을 둔 화폐제도를 없애고 은화를 화폐로 두고, '리브르(Livre)'라는 새로운 기준을 만들었다. 그리고 유대 인들의 고리대금업을 엄격하게 금하고 물가를 안정시키는 등 소소한 경제개혁을 했다.

샤를마뉴(좌)와 첫째 아들 곱사등이 피핀

피핀은 샤를마뉴의 장남이었으나 적자 직위를 얻지 못하고 왕위계승에서 밀려났고, 이름마저 둘째 동생에게 빼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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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이자 행정가였던 샤를마뉴는 학문과 문화를 사랑하기도 했다. 그의 통치기에 학술, 문학, 예술, 건축 등은 절정을 이루었고, 스페인이나 영국, 이탈리아 등지에서 문화를 들여오고 학자들을 초청하는 일도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수도원 학교 및 필사 전문원도 여기저기 생겼다. 또한 그는 교회 신부들의 저술과 고대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하기 위해 왕실도서관을 설립했으며, 프랑크 왕국의 젊은 기사들을 가르치기 위해 궁정 학교를 창설했다. 그를 위해 일했던 수많은 학자들 중에는 요크 출신의 앨퀸과 셉티마니아 출신의 테오둘프 같은 사람도 있었다.

카롤링거 시대에 만들어진 책의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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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샤를마뉴가 풀다의 애봇 바우걸프(Abbot Baugulf)와 주고받았던 편지로 알려져 있는 《샤를마뉴 서한집(Epistula de litteris colendis)》은 784년부터 785년에 걸쳐 앨퀸이 책으로 엮어 카롤링거 르네상스에서 가장 주요한 교재로 사용했다. 이 책의 핵심은 "올바른 신념이 왜곡되지 않으려면 적절한 형식과 언어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수도원 학교와 성당 학교에는 라틴 어와 라틴 문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샤를마뉴 통치하에 제국은 주변 어떤 나라보다도 문화적으로 융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궁정에 대한 문화적, 지적 자부심은 790년 샤를마뉴의 명령으로 쓰여진 네 권짜리 책 《샤를마뉴의 책(Libri Carolini)》에도 뚜렷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 책은 비잔틴에서 벌어진 제2차 니케아 공의회(787년)의 결론을 논박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었다. 책에는 성상숭배에 대한 니케아 공의회의 결론에 대한 120가지 반박조항이 담겨 있으며 '시대에 뒤떨어진 이교에 대한 오해', '말도 안 되는 논리', '조롱의 대상밖에 되지 않는 허튼 소리' 등으로 공의회의 결론을 비판하고 있다.

샤를마뉴는 그가 지배하는 다양한 민족과 부족의 전통적 권리를 존중했고, 법령집을 만들어 각 부족들의 법률을 기록할 뿐만 아니라 모자라는 것을 보충할 만한 추가 법령을 만들어 넣었다.

806년에 샤를마뉴는 아들들에게 제국을 분할해주고자 했으나, 맏아들과 둘째 아들이 죽자 813년 아헨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후계자 아키텐의 루이(경건왕 루트비히)를 궁정으로 불렀다. 그는 아들을 공동 황제로 만들고 아키텐으로 돌려보냈다. 다음 해인 814년 1월 28일 그는 늑막염으로 아헨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헨을 건설하는 샤를마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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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마뉴의 제국은 2대 황제인 루트비히 1세가 죽은 후 전통에 따라 루트비히의 아들들에게 다시 분할되며 막을 내렸다. 그러나 샤를마뉴는 로마 제국 멸망 이후 갈기갈기 찢어졌던 나라를 통합하여 그 후 몇 세기 동안 이어질 서유럽의 공통된 지적, 종교적, 정치적 유산을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오늘날까지 '유럽의 아버지 왕(Rex pater Europae)'이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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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엽 집필자 소개

단국대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서 사학과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는 <이야기 그리스로마사>, <로마제국과 곡물문제>, 논문으로는 「초기 프린키파투스 체제하에서 기사신분..

김지원 집필자 소개

서울대학교 및 동 대학원에서 화학생물공학을 전공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언어교육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번역서로는 『렘브란트의 유산』 『나폴레옹의 영광』 『손 안에 ..

출처

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 저자김상엽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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