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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의 치

당태종 이세민

李世民
요약 테이블
출생 598년
사망 649년
국적 중국
대표작 《남북조사(南北朝史)》

당의 2대 황제. 618년 태원 유수였던 아버지 이연(李淵)으로 하여금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당(唐)을 건국하게 했다.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형인 황태자 건성(建成)과 아우인 원길(元吉)을 주살했다. 아버지인 당고조가 물러나고 당의 2대 황제인 당태종에 즉위했다. 정관의 치(治)라고 일컬어질 만큼 태평성대를 일군 현군이다.

이세민은 한족과 선비족의 혼혈인 귀족 가문의 자손으로, 수나라 태원 유수(太原留守)인 이연(李淵)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연의 이모가 바로 수문제 양견의 아내인 독고황후이므로 이연은 수양제 양광의 이종사촌이 되는 셈이다. 즉, 수나라 황실과 당나라 황실은 한 핏줄이라고 할 수 있다.

수나라가 일대 혼란에 빠져들면서 이연이 수의 뒤를 이어 천하를 차지하게 되었다. 태원의 유수였던 그는 채 20세도 되지 않았던 둘째 아들 이세민의 강력한 권유로 봉기하여 618년에 수의 마지막 왕이었던 양유에게 선양을 받아 새로운 왕조인 당을 건국, 당고조(高祖)로 등극했다.

하지만 새로운 나라가 건국되었다고 해서 대륙 전체가 안정된 것은 아니었다. 각 지방의 유력한 무장들이 저마다 독립하여 천하를 장악하려고 서로 들고 일어나 싸웠다. 남부 지방은 이전의 남조를 계승한다는 취지하에 독립했고, 돌궐족은 중국으로 쳐들어와 변경에 괴뢰왕조를 세우고 본격적인 대규모 침공을 노리고 있었다. 고조는 장남인 건성을 황태자로 책봉하고 차남인 이세민을 진왕(秦王)에, 셋째 아들인 원길을 제왕(齊王)으로 봉한 후 이세민에게 반란 세력을 처단하라는 임무를 내렸다.

당태종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618년에서 624년에 이르기까지 이세민은 돌궐족을 만리장성 밖으로 몰아내고 남부 지방을 정복했으며 설거(薛擧), 왕세충(王世充) 등 다른 모든 반란 세력을 물리쳤다. 그는 뛰어난 전술과 함께 수많은 인재들을 수중에 끌어모아 남은 잔당들을 일거에 물리쳐나갔다. 지는 법이 없었던 그에게 고조는 천책상장(天策上將), 즉 '하늘의 지략을 지닌 장군'이라는 별호를 내렸다. 당나라에 대항하여 싸웠던 많은 반란 지도자들은 처형되거나 일찌감치 항복하여 당나라의 작위를 받았다. 백성들은 뛰어난 실력을 가진 이세민에게 차츰 열광하게 되었다.

하지만 동생의 이름이 높아지자 그만 한 실력을 갖추지 못했던 황태자 이건성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에게 이세민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을 전하여 아버지와 동생 사이를 갈라놓았고, 마침내 막냇 동생 원길을 끌어들여 이세민 제거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음모를 먼저 간파한 이세민은 이를 역이용해 626년 7월 2일 부황 이연에게 형제들이 자기를 죽이려 모함한다고 고했다. 이연은 그들을 궁성으로 불렀고, 그들이 현무문으로 들어온 순간 매복한 군사들이 화살을 쏘아 그 자리에서 살해했다. 이를 '현무문의 변'이라고 하며, 이 일이 벌어지고 사흘 후 고조는 이세민을 황태자로 앉혔다. 그리고 3개월 후 황위를 양위했다.

대명궁 유적

태종의 궁이었다.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세민은 당의 2대 황제인 당태종에 등극, 연호를 정관(貞觀)으로 하였다. 황위에 오른 태종은 방현령(房玄齡), 두여회(杜如晦), 위징(魏徵), 왕규(王珪)와 같은 인재들을 등용하여 국정을 잘 보살폈으며 문화를 꽃피워나가 '정관의 치(治)'로 칭송되는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태종은 수대에 개시한 과거를 정비하여 천하의 인재를 등용하였고 3성 6부(3省 6部)를 중심으로 관제를 완성하였다. 전국을 10도(道)로 나누어 관리하였고 정관율령격식(貞觀律令格式)을 공표하여 율령격식을 완성하였으며 균전제(均田制), 부병제(府兵制), 조용조세제(租庸調稅制) 등을 시행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법률로 국가는 풍족해지고 민생도 안정되었다.

태종은 인재를 등용할 때 출신을 가리지 않았다. 설령 적의 아래에 있던 사람이라도 그 능력이 뛰어나면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었고, 신하들이 자신을 비난해도 역정을 내지 않고 충언을 받아들여 국가와 백성들을 위한 최선의 방책을 행했다. 이런 현명한 태도 덕분에 그는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십팔사학도〉

태종은 학문소를 두고 학자들을 예우로 대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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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의 일생에서 가장 뼈아픈 실책이라면 고구려 원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645년 태종은 신라의 요청으로 군사 50만을 이끌고 고구려 원정을 단행했다. 기세등등하게 요동 땅을 밟은 당나라군은 처음에는 요동성 등 몇 개의 성을 공략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안시성에서 그만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안시성 성주인 양만춘(楊萬春)과 군민들은 적은 병력이었지만 똘똘 뭉쳐 무려 3개월 동안이나 파죽지세로 밀려드는 당의 막강한 군력을 막아냈다. 결국 수많은 군사를 잃은 당군은 뒤쫓아온 연개소문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당태종은 이 싸움에서 얻은 병이 원인이 되어 사망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태종은 보위에 오른 지 23년 만인 649년 5월, 병을 얻어 51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 후 오긍吳兢이란 신하가 태종이 군신들과 나눈 문답을 묶어 기록한 《정관정요(貞觀政要)》는 나라를 태평천국으로 이끌었던 현명한 군왕 태종의 면모를 전하고 있으며, 이 책은 지금까지도 제왕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의 치세는 이후 중국의 역사와 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학문을 애호했던 태종은 직접 《남북조사(南北朝史)》를 편찬했고, 서예에도 뛰어나 비석에 새겨진 그의 글씨는 천 년 이상이나 본받을 만한 서체 중의 하나로 여겨져왔다.

8세기의 중당(中唐) 시대는 중국 역사상 가장 찬연한 문화를 꽃피운 시기 중 하나였는데, 이는 태종이 나라를 안정시키고 제도를 개혁하여 사회적, 경제적 발전을 이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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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엽 집필자 소개

단국대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서 사학과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는 <이야기 그리스로마사>, <로마제국과 곡물문제>, 논문으로는 「초기 프린키파투스 체제하에서 기사신분..

김지원 집필자 소개

서울대학교 및 동 대학원에서 화학생물공학을 전공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언어교육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번역서로는 『렘브란트의 유산』 『나폴레옹의 영광』 『손 안에 ..

출처

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 저자김상엽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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