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화오션(구 대우조선해양)의 KDDX 모형
차기 한국형 이지스 구축함 6척을 건조하는 KDDX 사업의 상세설계와 선도함 건조를 맡을 조선소를 어떤 방식으로 선정하느냐를 놓고 논란이 뜨겁습니다. 방위사업청은 HD현대중공업의 수의계약 또는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의 경쟁입찰 중 한 가지 방식을 골라야 합니다. HD현중은 "KDDX 기본설계를 했으니 이어서 상세설계 등도 수의계약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화오션은 "법적 제약이 없는 만큼 공정하게 경쟁입찰로 가자"는 주장을 각각 펴고 있습니다.
HD현중 수의계약으로 기울었다는 시그널들이 많습니다. 방사청의 공식 입장은 "사업 추진 방안을 구체적으로 확정한 바 없다"입니다. 방사청 공식 입장에 따르면 방사청 한국형구축함사업팀의 결정도 안 났고, 다음 절차인 사업분과위원회 일정도 미정인 상태입니다.
시간이 좀 남았습니다. 이참에 수의계약·경쟁입찰 논란이 왜 초래됐는지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다툼의 뿌리는 HD현중이 저지른 KDDX 개념설계 기밀유출 사건과 비판의 소지 많은 방사청의 사업관리입니다. 수사 중이라는 이유로, 또 판결문 열람 금지 조치의 꼼수 등으로 가려졌던 KDDX 기밀유출 사건과 사업관리의 진상이 명백히 드러나야 방사청과 사업분과위도 옳은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밀 절도 후 사업 참여'의 공식
확정 판결문과 방첩사 등에 대한 SBS 취재를 종합하면 HD현대중공업은 2012년 10월 3급 기밀인 해군 특수부대용 특수전 지원함과 특수침투정 개념설계 기술지원 용역 최종 보고서를 불법 취득했습니다. 특수전 지원함과 특수침투정 기본설계 사업 제안서 평가가 한창이던 때입니다. HD현중은 기밀 탈취에 성공했지만 특수전 지원함 등 기본설계 사업에서 한화오션의 전신인 대우조선해양에 밀려 실패했습니다.
문제의 KDDX 개념설계 중 일부는 2013년 4월 훔쳤습니다. HD현중 직원들은 장보고-Ⅲ Batch-Ⅱ 잠수함의 개념설계 조언을 청취하기 위해 해군본부에 갔다가 해군 장교가 회의실 자리를 비운 사이 3급 기밀인 KDDX 개념설계 검토 자료를 동영상을 찍어 빼내는 수법을 썼습니다.
장보고-Ⅲ Batch-Ⅱ 관련 기밀들은 한 달 뒤 빼돌렸습니다. 장보고-Ⅲ Batch-Ⅱ와 Batch-Ⅲ의 성능 목표와 연구개발 방안 및 로드맵, 잠수함용 대용량 추진전동기 개발 계획 등이 포함된 '2013~2027 국방과학기술진흥 실행 계획'을 통으로 훔친 것입니다. 3급 기밀입니다. 그리고 2013년 7월 HD현대중공업은 장보고-Ⅲ Batch-Ⅱ의 개념설계 사업을 수주했습니다. KDDX 개념설계 기밀을 훔친 뒤 KDDX 기본설계를 따낸 것과 똑같은 양상이 일찍이 벌어진 셈입니다.
HD현중의 기밀 탈취는 2014년 집중됩니다. 1월 장보고-Ⅲ Batch-Ⅱ 개념설계 중간 추진 현황, 2월 KDDX 개념설계 보고서, 3월 장보고-Ⅲ Batch-Ⅱ 사업추진 기본전략 수정안, 장보고-I 성능개량 사업추진 기본전략안, 장보고-Ⅲ Batch-Ⅱ, Batch-Ⅲ 신규 중기전력 소요제기 및 작전운용성능안, 훈련함 사업추진 기본전략안 등을 훔쳤습니다. 모두 3급 기밀입니다.
또 2014년 3월 HD현중은 장보고-Ⅰ 잠수함의 성능개량 사업 선행연구 최종보고서에도 손을 댔습니다. 장보고-Ⅰ의 성능개량 전력화 계획, 소요량, 작전운용성능, 전투체계 성능, 교전 시뮬레이션, 운용 개념 등이 담긴 보고서로 장보고-Ⅰ 성능개량 사업의 열쇠와 같은 자료입니다. HD현중은 기밀 절도까지 감행했지만 대우조선해양이 장보고-Ⅰ 성능개량 사업을 수주했습니다.
해가 바뀌고 2015년 11월 HD현중은 장보고-Ⅲ Batch-Ⅱ 사업추진 기본전략안을 불법 입수했습니다. 기본설계 입찰의 답안지를 챙긴 셈입니다. 장보고-Ⅲ Batch-Ⅱ 기본설계 사업 입찰은 이듬해 열렸습니다. 역시 대우조선해양에 밀려 떨어졌습니다.
방첩사령부는 HD현중의 기밀유출 의심 정보를 2015년 입수했습니다. 수사 착수는 2016년입니다. 수사 착수에 맞춰 HD현중의 기밀유출 범죄도 2016년부터 멈췄습니다. 2015년 장보고-Ⅲ Batch-Ⅱ 사업추진 기본전략안 절도가 마지막입니다.
정리하면 HD현중은 KDDX 개념설계 외에도 여러 가지 기밀들을 훔쳤습니다. 대부분 3급 기밀 절도로 하나같이 KDDX 기밀유출 못지않은 대형 사건입니다. KDDX에 가려 조명을 덜 받았을 뿐입니다. 기밀을 빼낼 때마다 관련 사업에 참여한 정황도 뚜렷합니다. HD현중 측은 "훔친 기밀들의 가치가 별로 없어 활용하지 않았다"고 해명했습니다. 방사청은 HD현중의 기밀 탈취 행각이 생생히 적시된 확정 판결문을 KDDX 상세설계 등 사업 추진 방안 결정 과정에 꼭 참고하길 바랍니다.
방사청과 방첩사의 동시 방관
방첩사는 2019년 혐의가 입증된 군인들은 군 검찰에, HD현대중공업 직원 등 민간인들은 민간 검찰에 송치했습니다. 방첩사의 수사가 사실상 끝난 것입니다. 관계기관과 공유의 필요성이 적지 않았는데 방첩사는 HD현중의 무더기 기밀유출 보안사고를 국방부, 방사청 등에 통보하지 않았습니다. 방첩사는 군 기밀 내부 공유를 위한 HD현중의 비인가 서버 운영도 함구했습니다.
방사청은 2020년 상반기 KDDX 기본설계 제안서 평가에 돌입했습니다. 업체들은 제안서를 제출할 때 비위 사실을 자진신고해야 하지만 HD현중은 하지 않았습니다. 평가는 HD현중의 KDDX 개념설계 절도 사실을 덮어둔 채 진행됐습니다.
제안서 평가가 종결되기 전인 9월 HD현중의 KDDX 개념설계 기밀유출 보도들이 쏟아졌습니다. 기밀유출 범죄를 인정하는 HD현중 임원의 인터뷰도 나왔습니다. 평가가 끝나기 전에 방사청은 언론 보도로 HD현중의 범죄 혐의를 인지했습니다. 방사청이 그때 뭔가 조치를 취했어야 했던 것 아니냐는 문제제기에 지난 2일 방사청 대변인 "제안서 평가 당시 방첩사에서 처분 통지가 없었기 때문에, 이에 따라 평가를 했다"고 말했습니다.
대우조선해양의 반발에도 방사청은 "기밀을 훔쳤을 뿐, 활용하지 않았다"는 HD현중의 주장을 인용해 HD현중에 KDDX 기본설계 사업을 넘겼습니다. KDDX 개념설계를 수행했던 대우조선해양은 0.056점 차이로 분루를 삼켰습니다.
KDDX 기밀유출 사건과 사업관리의 전말은 이와 같습니다. 취재가 미치는 범위 밖의 이야기도 많을 것입니다. 사건이 공개됐던 4년 전, 방사청과 방첩사가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했더라면 지금의 혼란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KDDX 개념설계 등 각종 기밀들을 절도한 HD현중의 수의계약이냐, KDDX 개념설계를 도둑맞은 대우조선해양의 후신 한화오션까지 참여시킨 경쟁입찰이냐… 방사청의 최종 선택이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