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족의 역사가 담긴 물건을 전시하고 싶어요…그렇게 집에 기억과 추억이 쌓이고 가족의 역사가 만들어지는 거죠”
집은 대지의 모양을 살리되 반듯하고 간결하게 디자인했다. [윤준환 건축사진작가 제공]
천창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종일 생기를 불어넣는다.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모양을 관찰하는 것도 일상의 즐거움이다. [윤준환 건축사진작가 제공]
일과 육아로 인생에서 가장 바쁜 시기를 보내는 백종준(41) 박반야(39) 부부가 전남 나주혁신도시에 자리한 '빛 담은 집(대지면적 276.00㎡, 연면적 196.81㎡)'에 살기 시작한 건 한 달 전이다. 집을 짓는 데 1년, 그에 앞서 터를 고르고 밑그림을 그리는 데 2년이 걸렸다. 일사천리로 진행된 일은 아니었다. 올해 결혼 12년 차인 부부는 신혼 시절부터 주택살이를 꿈꿨다. 그러니까 시작은 10여 년 전인 셈이다. "연고지가 서울인데 직장 때문에 이곳에 정착했어요. 가족과 떨어져서 서울에서 통근하기도 하고 근처 아파트에서도 살아봤지만 늘 아쉬움이 남더라고요. 언젠가 주택에 살 거라면 너무 나이 들었을 때보단 부부가 왕성하게 활동하고 아이들도 아직 어린 지금 우리만의 집을 지어 누리는 게 맞겠다고 판단했어요."(백종준)
마당 있는 주택에 살고 싶다는 건 반야씨의 오랜 소망이었다. 서빈(10) 주열(5) 남매를 키우면서 그 생각이 더 깊어졌다.
“최근까지도 가족과 일을 위해 아파트 생활을 했지만 살수록 저랑 맞지 않다는 걸 느꼈어요. 층간 소음에 대한 불편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고요. 그러던 차에 소도시로 터전을 완전히 옮기면서 계기가 생긴 거예요. 집은 가족의 역사를 만들어주는 곳이잖아요. 제가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에게 기억, 추억, 문화를 물려주고 싶었어요."
설계자를 수소문하던 부부는 동네에서 눈길을 끄는 카페를 발견했다. 군더더기 없는 외관은 물론이고 시처럼 여백이 있는 내부 공간은 까다로운 심미안을 지닌 종준씨 마음에 쏙 들었다. 대한민국건축상 등을 수상하며 실력을 인정받은 임태형(건축사사무소 플랜 대표) 건축가의 설계였다.
“첫 면담에서 ‘이분이다' 확신했죠. 과거 작업들을 보면서 이런저런 질문을 쏟아냈는데 막힘없이 설명을 해주셨어요. 선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믿고 따라가기만 하면 되겠다 싶었죠."
■집에 감각을 불어넣는 법
집을 짓자는 데까지는 마음이 통했지만 원하는 집의 모습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남편은 집에서 편안함보다 영감을 느낄 수 있길 원했고, 아내는 관리가 쉽고 편한 집을 바랐다. 차이를 확인하고부터 긴 대화가 이어졌다. 결과는 종준씨의 완승.
“영감을 얻으려고 미술관이나 호텔 같은 공간을 찾아다니잖아요. 집이 그런 공간이 되면 삶이 얼마나 풍족해지겠어요. 그러려면 전문가의 판단을 믿고 처음 설계안을 그대로 구현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실용적 논리만 따르자면 평범한 복층 아파트 같은 공간이 나오겠다 싶었거든요."
종준씨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임 건축가는 과감하면서도 세심하게 공간을 매만져 나갔다. 1층과 2층을 통합한 공간에 거실, 부엌, 다이닝 공간을 배치하고, 벽면에 가정집에서 보기 힘든 대형 책장을 설치했다. 고개를 들면 하늘을 볼 수 있는 천창도 설치했다. 전체적으로 화이트 톤을 기본으로 하되 인테리어의 마감에 사용하는 소재는 한두 개로 가짓수를 제한하고 단순하게 정리했다. 가령 거실과 마당엔 같은 바닥 타일을 써서 공간감을 연결하면서도 활용도를 높였다.
임 건축가는 “공간 안에 보이는 선과 면을 단순하게 정리해 개방감을 키우는 데 집중했다"며 “화이트 톤이 자칫 차가워 보일 수 있는데 창과 마당, 층고를 적재적소에 넣어서 자연광만으로 다채로운 변화를 느낄 수 있게 했다"고 설명했다.
덕분에 형태와 비례는 단순하면서도 다양한 바깥 풍경과 자연을 끌어들이는 바탕을 갖추었다. 폐쇄적인 외관을 떠올리면 내부에서 누리는 개방감과 역동성이 더 극적으로 다가온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2층에서 테라스를 통해 1층 마당으로 내려오는 계단 등 순환하는 동선을 만든 것도 생기를 불어넣는다. 외부 벽에는 시선을 차단하면서도 빛과 공기가 통할 수 있는 여러 틈새를 만들어 위트를 더했고, 천장에는 네모 조명의 각도를 살짝 틀어 각 잡힌 공간의 긴장감을 풀어주었다.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외부 시선을 차단했지만 내부에서는 넓은 천장과 천창, 내부와 연결되는 마당을 설치해 공간을 확장했죠. 폐쇄적이면서 개방적이고, 평범한 듯 보이지만 대단히 역동적이고 재밌는 공간이에요. 반전이 있는 집이죠."
■집이라는 영감의 요새
일반적인 가정집의 작법을 따르지 않는 건축가와 모든 과정을 전폭적으로 지지한 건축주가 합심해 만든 집은 완성도와 만족감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듯 보였다. 모던한 갤러리를 연상케 하는 집은 단순함의 미학을 구현하면서도 기능적으로도 손색이 없다. 이를테면 마당을 두 개 층으로 구성해 쓰임을 달리했는데, 거실과 연결된 1층 마당엔 타일을 깔고 단풍나무 한 그루만 심어 오브제처럼 즐기고, 2층 마당은 벽으로 막아 텃밭으로 활용할 수 있게 했다.
반야씨는 거실에 앉아 1층 마당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고, 종준씨는 1층 마당에서 ‘멍때리는' 시간을 즐긴다. 2층 마당은 아이들의 놀이터다. 각각의 방에 작더라도 외부 공간을 갖추고, 집에서 감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차경으로 담은 것도 두고두고 만족스러운 부분. 딸 서빈의 방에서는 직선으로 25㎞ 떨어진 전남 영암 월출산의 웅장한 능선이 보인다. 그리하여 집은 예술적인 공간을 꿈꿨던 종준씨에겐 더할 나위 없는 취미생활이 됐다.
“마당에 나가 가만히 서서 몇 시간을 감상할 정도"라는 반야씨의 말마따나 종준씨에게 집은 오래 관조하면서 신중한 손길로 완성해야 할 작품이다. 천장에 닿는 책장에는 가족에게 특별한 사연이 있는 책, 장난감, 소품이 빼곡한데, 인스타그램 사진에 등장하는 흔한 장식품은 하나도 없다.
종준씨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을 구매해서 채워넣기보다 가족의 역사가 담긴 물건을 전시하고 싶다"며 “그렇게 집에 기억과 추억이 쌓이고 가족의 역사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했다. 세심히 매만진 영감의 요새를 채우는 가족의 이야기가 오래 이어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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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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