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다반사에 '역사'라는 거창한 단어까지 꺼내든 이유, 이런 당연한 것들을 평생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흘러가는 기억 속 편린에 불과하지만 무적자에겐 단 한 번 도 가지지 못한 특별한 것들이었다.
무적자는 성과 본, 주민등록증이 없다는 것 만으로 존재하면서도 존재를 인정받지 못했다. 인간에게 가장 잔인한 형벌은 '잊혀지는 것'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그의 저서 <기억>에서 '담나티오 메모리아이'를 설명했다. '기억말살형, 기록말살형'으로 표현 가능한데, 로마에서 대역죄인에게만 내리는 형벌이었다. 대역죄인에 대한 기록과 그를 기억하는 사람을 없애는 망각의 형벌이었다.
무적자는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삶 자체가 '기록 말살, 기억 말살'이었다. 그들은 태어난 연도, 이름도 불확실한 채 삶을 시작했다. 보살핌을 받아야 할 시기에 생존 투쟁을 했고, 교육을 받을 시기에 거리의 삶을 배웠다. 공식 기록이 없다는 건, 스스로에 대한 기억마저 희미하게 만들었고 종국적으로 스스로를 기억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결국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신분증 보자"는 노숙인 말에 고개를 숙였다.
무적자 출신 1965년생 김 모 씨는 '외로움이 습관이 되다보니 외롭지 않다'고 했다. 그는 56세가 돼서야 성과 본을 만드는 창성창본을 통해 한양 김 씨가 됐다. 주민등록증 발급을 위해 가족관계등록도 창설했다. 단, 주민등록증에 삽입된 생년월일은 어디까지나 추정이었다.
"태어난 곳도 모르고, 보육원에서 어린 시절을 지냈다는 것만 기억해요."(김 씨)
9살 때 가혹행위가 싫어 보육원을 뛰쳐나온 뒤 신원 확인이 필요 없는 일만 골라서 지냈다. 보육원의 이름도, 위치도 기억 못한다. '어떻게 그것도 기억 못해?'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지만, 잠시 고민하면 무의미한 질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우리가 어린 시절 다닌 유치원, 학교를 기억할 수 있는 건 '기억을 공유'하는 이들이 함께했기 때문이다. 가족과 대화를 통해 유년 시절을 되뇌었고, 친구와의 만남, 사진첩을 통해 자연스럽게 기억으로 각인됐다. 무적자에겐 이런 흔한 것들이 불가능했다.
김 씨는 신문 보급소, 식당 배달을 전전했다. 80년대 자전거로 배달을 하다 90년대 오토바이로 바꿨지만, 면허증 검사가 강화되면서 그마저도 못하게 됐다. 최저임금은 모르고 살았고 급여는 현금으로만 받았다. 급여를 주지 않아도, 급여를 도둑질 당했을 때도 신고를 못했다. 그저 소리 한번 지르고 다른 가게로 옮기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받은 돈은 호주머니에서 보관했고, 당연히 '저축'이라는 개념도 모르고 지냈다.
"어디다 넣어 놓으면 잃어버릴 일도 없을 텐데 현금으로 월급타고 길을 가다가 잃어버린 적도 있죠."(김 씨)
도시의 가장 낮은 곳의 삶이 익숙해지면서 거리에서 숙식은 일상이 됐다. '밑바닥 인생'이라는 노숙인 사이에도 차이가 존재한다고 김 씨는 말했다. "가끔 술 마시면 그런 이야기하잖아요. '너 몇 살이냐, 몇 살?', 그러다 '신분증 보자'고 하잖아요. 그러면 그냥 저는 '안 가져왔다'고 얼버무리고 일어났죠." 김 씨는 고개를 숙인 채 이런 경험을 털어놨다. 괴로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신분이 없으면 그 어디에도 섞일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경찰이 정해준 생년월일…제도로 처벌하고 다시 제도권 밖으로
김 씨가 신분증을 갖게 된 건 '코로나19' 덕분(?)이다. 50년을 넘게 제도권 밖에서 살면서 무적자의 삶은 익숙했다. 제도의 보호나 혜택을 받아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제도권 필요성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다 코로나19가 창궐했고, 검사를 받으러 갔다가 신분증이 없어 거절 당했다. 무적자의 삶을 벗어난 계기였다.
'김 씨'가 부(父)의 성인지 모(母)의 성인지, 왜 하필 김 씨로 불렸는지도 모르는 김 씨. 그저 16살 때 남이 입던 바지를 훔친 절도죄를 계기로 그냥 김 씨가 됐다. 국가가 김 씨를 기록한 유일한 문서, 즉 범죄 경력서에 쓰인 이름이 '김 씨'였다.
김 씨는 16세부터 23세까지 총 4차례 절도죄를 저질렀다. 초범을 제외하곤 대부분 실형을 선고받았다. 2명 이상이 저지르는 소매치기는 '특수절도죄'가 됐고 수감생활로 이어졌다. 김 씨의 생년월일도 이 때 정해졌다. 경찰은 김 씨의 피의자 신문조서를 작성하면서 주민번호는 공란으로 뒀지만 생년월일이 필요했다.
"생년월일을 잘 모른다고 그러니까 형사들이 그냥 '야, 몇 월 달로 해' 그게 그대로 된 거죠. 여태까지."(김 씨)
그가 50년 넘는 생활 동안 제도권에 들어온 건 모두 4차례. 범죄를 저질렀을 때만 제도권 진입이 가능했다. 1989년 3만 3천원을 훔쳐 징역 1년6개월 수감생활을 한 것을 마지막으로 제도권 밖에만 머물렀다. 마지막 절도 이후 33년간 그는 동종 범죄는 물론, 사법기관 근처도 간 적이 없다. 스스로 범죄의 인(印)을 끊어낸 건데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감옥에서 폭력 같은 게 심했어요. 그게 힘들었어요. 그런데서 시간낭비하지 말고 그냥 일하면서 살자 그런 마음으로 바뀐거죠."
경찰, 검찰, 법원, 교정당국 모두 김 씨가 무적자인 걸 알고 있었지만, '제도'로 처벌만 했을 뿐 '제도권'에 안착시키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56세가 돼서 겪은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그는 '한양 김 씨'가 아닌 그냥 '김 씨'로 아직도 지냈고 있을 것이다.
'남포동 김 씨'는 주민등록증 발급을 원치 않았다.
한양 김 씨보다 세 살 어린 68년생(추정 나이) '부산 남포동 김 씨'는 아직 무적자다. 한양 김 씨와 마찬가지로 수감 생활을 한 뒤, 긴 시간 무적자로 살았다는 점에선 동일하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 남포동 김 씨는 아직 시민이 되지 않았다.
경남 함안군 다리 밑에서 태어난 남포동 김 씨는 다른 무적자와 달리 보육시설 기록, 일명 '아동 카드'가 남아있다. 스스로를 기억할 수 있는 문서 '두 장'이 존재하고 있지만, 내용은 무미건조하다. 아버지의 주벽과 폭력으로 가출, 구걸을 하다 단속 당했고 '원내에서 정신교화'를 시켰다는 게 전부다. 부모의 생존 여부나 연락 시도 여부는 기록돼 있지 않다. 남포동 김 씨를 '상습 부랑아'로만 표현하며 '교화'에 힘쓰고 있다는 게 기록의 핵심이었다. 결론적으로 남포동 김 씨의 유년시절도 여느 무적자와 마찬가지로 불확실하고 희미했다.
남포동 김 씨의 인생 중 유일하게 구체적으로, 또 명확하게 기록된 것 역시 '범죄 경력서'뿐이다. 23세 때 절도죄로 처벌 받은 것을 시작으로 지난해까지 3차례 이상 수감 생활을 했다. 절도, 폭행, 공연음란죄, 재물손괴 등 혐의는 다양했다. 거칠고 원초적인 형법에서 꺼낸 '죄명'만 놓고 보면 남포동 김 씨는 무섭고 그늘 진 범죄자의 전형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창성창본을 무료로 대리해준 변호사는 이렇게 표현했다.
"남포동 김 씨는 순박했어요"(이승애 변호사)
남포동 김 씨는 지난해 수감생활을 하며 창성창본을 진행했다. 노숙인 생활을 하던 부산 '남포동'을 본으로 성과 본을 만들었지만, 정식 시민이 되기 위한 마지막 절차인 가족관계등록 창설 심사(주민등록번호 발급 심사)에 불참했다. 출소하는 날에 맞춰 기일을 잡았다가 법원의 변경으로 심사가 미뤄졌다. 그 사이 남포동 김 씨는 사라졌다. '김 씨'에서 '남포동 김 씨'로 바뀐 것일 뿐, 무적자 신분인 그대로인 셈이다. 남포동 김 씨의 행적 불명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김 씨의 창성창본을 도와 준 부산지방변호사회 소속 이승애 변호사는 김 씨의 의지가 작용한 것이라고 말한다.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으면 기초생활 수급부터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여러 차례 말씀도 드렸어요. 그런데 이 분은 한 번도 제도권 안에서 생활한 적이 없어요. 이 분한테 제도권은 교도소밖에 없었거든요. 다시 제도권으로 들어오기 싫었던 것 같아요. 너무 오랜 기간 제도권 밖에 살았기 때문에 제도권 안이 안전하다, 제도권 안에서 보호를 받는다는 생각을 못하셨던 거죠.(이승애 변호사)"
도시괴담이 된 '남포동 김 씨', 왜곡된 모습으로 기억됐다
남포동 김 씨를 직접 만나서 묻고 싶었다. 그를 찾기 위해 그의 본(本)인 남포동 일대를 뒤졌고, 며칠 전까지 그가 머물렀던 장소를 찾아냈다. 여전히 노숙 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남포동 김 씨의 이름은 모르지만 그의 얼굴과 단면을 목격한 사람들이다.
남포동 김 씨가 출몰한 지역의 인근 상인들은 한 입으로 말했다. "사람이 붐비는 시간에 동냥을 하고 그 돈으로 술을 마셨어요." "행인들에게 가끔 소리 지르고 주먹도 휘둘렀어요. 얼마 전엔 그 사람 때문에 경찰도 출동했어요." 남포동 김 씨가 창성창본 이전과 다를 바 없이 노숙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바뀐 게 있다면 남포동 김 씨는 도시괴담의 주인공이 돼 있었다. 남포동 번화가에서 동냥을 하는 기피인물로 낙인 찍히면서 그를 둘러싼 오해는 커졌고 혐오로 굳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람은 처자식도 있고 차를 타고 다닌데요. 와이프가 내려주는 걸 본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구걸해서 돈 벌고, 어디에 소속돼 있다고 하더라고요(인근 상인)"
제도권 밖에서 평생 '떠돌이 삶'을 사는 남포동 김 씨. 살아도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그를 그나마 기억하는 사람조차 왜곡된 모습으로 그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 한 명도 김 씨와 대화를 시도해본 적이 없다면서 그런 내막을 어떻게 알 수 있었던 것일까. 무적자 '남포동 김 씨'는 자신도 모르게 도시괴담 속 인물로 그려지면서 제도권에서 더 멀어지고 있었다.
사회와 대화 방법을 모르는 무적자
과거 처벌 전력과 주위 증언만 놓고 보면 남포동 김 씨는 제도권의 안정을 해치는 인물이다. 그런데도 그를 제일 잘 아는 변호사는 "순박하다"고 표현했다. 남포동 김 씨를 좀 더 깊이 취재하게 된 계기였고, 그가 저지른 최근 범죄부터 살펴봤다.
자신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며 행인에게 침과 함께 입에 물고 있던 초장을 묻힌 행위는 '폭행'과 '재물손괴'가 됐고, 음악을 크게 튼 가게 앞에서 옷을 벗어버린 건 '공연음란죄'가 됐다. 누범기간에 이뤄진 행위라 실형 1년을 선고 받아 수감생활을 했다. 최근 경찰이 출동했다는 사건도 행인에게 물건을 먼저 던진 건 김 씨였고, 일방적으로 맞은 것도 김 씨였다고 한다.
남포동 김 씨는 사회와 대화를 하는 방법을 몰랐던 것 아닐까. 그는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했고, 관계를 맺는 방법을 배운 적 없었다. 그가 '알고 있고 할 수 있는' 의사 표현 방식은 제도권에서 용납 받지 못했던 행위들이다. 제도권에서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무적자를 제도권 방식으로만 판단하려 한 것, 그 접근법이 유일했고 유효한 것인지 고민이 들었다.
'외면'으로 시작돼 '무관심'으로 완성시킨 무적자…분노의 대상을 찾지 못했다
취재진이 확인한 356명의 무적자들은 각자의 인생이 있었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심지어 스스로도 기억 못하는 사연이 있을 것이고, 활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경험도 넘쳐 날 것이다. 다만 무적자 삶의 궤적은 비슷하다. 특히 한양 김 씨와 남포동 김 씨, 두 사람은 그랬다. 한 명은 뒤늦게 정식 시민이 됐고, 다른 한 명은 아직도 무적자 신분이지만, 인생이 달라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차단당했다.
한양 김 씨가 처음 '법의 단죄'를 받았던 16세 때 '법의 보호'를 함께 받았다면 인생도 달라졌을까. 남포동 김 씨가 23세 때 수감생활과 동시에 제도권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면, 그는 지금 정식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역사의 가정은 없지만, 분명한 건 달라질 수 있는 기회는 있었고, 그 기회를 제공하지 않은 건 제도권이었다.
그동안 기자생활을 하며 다양한 사회적 약자를 만나봤다. 그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국가의 책임을 묻고 제도의 사각지대에 분노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최약자'라는 무적자는 그러지 않았다. 한양 김 씨는 여러 차례 인터뷰를 하면서도 지난 세월을 안타까워했지만 국가를 탓하지도 제도권을 욕하지 않았다. 그가 남다른 포용력, 너그러운 태도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국가의 의무에 대한 인지가 없었다. 정부의 역할에 대한 기대감도 없었다. 분노할 대상도 찾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이 무적자였다. 무적자의 삶은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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