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논픽션 부문 '약속(約束)'-안홍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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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매일 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문 당선자 안홍식


18년 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막내아들이 대신 쓴 어머니의 일생

1. 혼인(婚姻)

거기 좀 앉아라. 1940년 늦은 봄날. 아버지가 자그만 사진 한 장을 내미신다. 얼마 전 중매쟁이가 다녀갔다고 어머니가 귀띔을 해주신 터라 나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 참한 얼굴 날카로운 눈매 짙은 눈썹, 당시 일본 군국주의의 강요도 있었지만 일본 군대식으로 빡빡 깎은 머리, 칼라에 후크를 채운 군복 형태의 갈색 양복을 입고 찍은 전신사진이었다. 신랑감의 나이는 스물둘이라고 했다

사실 마음에 들고 말고도 없었다. 아버지도 내 생각을 굳이 묻지 않으셨다. 내 나이 열아홉, 당시로는 꽉 찬 나이였다. 마을의 또래 여럿이 벌써 시집을 갔다. 경성(京城)에서 직장을 갖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오빠와 언니는 아직 결혼 전이었으나 지방에서는 사정이 달라 결혼을 서둘 필요가 있었다. 시절은 또 얼마나 수상한가! 일본 군국주의는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일본이 전쟁에 돌입하면 한반도 역시 전쟁에 휘말릴 것은 뻔했다. 손(孫)이 귀한 시절. 나라가 혼란스러울수록 결혼을 서두르지 않는가!

1940년 여름. 스물두 살 총각과 열아홉 살 처녀의 결혼식은 춘천(春川) 시댁에서 마을 잔치로 치러졌다. 우리는 춘천 시내 사진관에서 턱시도에 면사포를 쓰고 팔짱을 낀 채 서양식 결혼사진도 찍고 춘천 시내 호텔에서 첫날밤을 보냈다. 나는 당시 여자로서는 큰 키인 168cm이었다. 친정 부모님도 오빠도 언니도 모두 키가 훤칠해 서양 사람에 비해서도 전혀 뒤지지 않는 체격이었다. 신랑은 나보다 큰 키였지만 나는 드레스 속에 높은 구두 대신 흰 코고무신을 신고 결혼사진을 찍었다.

2. 친정(親庭)

친정은 강원도 통천(通川)에서 한약사인 아버지와 감리교 권사인 어머니, 오빠 언니 그리고 나 다섯 식구로 당시로서는 단출했다. 오빠와 언니는 춘천에 있는 상급학교로 진학했다. 오빠는 춘천 고를 거쳐 연희전문 상과를 마치고 경성에서 홍콩을 통한 무역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언니는 춘천여고를 나와 경성에서 소녀단(걸스카우트)쪽 일을 하고 있었다. 사실 완고한 아버지는 언니의 상급학교 진학을 반대했지만 언니는 야반도주하다시피 집을 나가 춘천여고에 입학한 것이다. 나는 아버지 뜻대로 소학교를 마치고 진학을 포기한 채 집에 남아 살림을 배우고 있었다. 내가 결혼하기 전 친정은 통천을 떠나 춘천으로 이사했다.

내가 결혼하자 이어서 오빠와 언니도 결혼했다. 아버지는 자식들이 결혼하자 성격 차이, 종교 갈등을 이유로 친정엄마를 버리고 새 여자를 얻어 집을 나갔다. 어머니는 함경도 분이셨는데 강원도 통천으로 시집을 왔었다. 어머니는 일찍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독립심 강한 여성이었다. 집을 나간 아버지는 곧 경성으로 옮겨 창덕궁 앞 와룡동{臥龍洞)에 한약방을 내고 1955년 세상을 뜰 때까지 그곳에서 새 여자와 살았다. 이혼을 하지 않은 채 헤어진 두 분은 생전 다시 대면하지 않았다.

친정어머니는 경성 오빠 집에 거처를 두고 감리교 교단 전도사로 전국을 다니며 선교 활동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나 역시 시집간 뒤로는 친정아버지를 다시 뵙지 못했다. 못했다기보다 뵈러 가고 싶지도 않았고 시집살이에 그럴 틈도 없었다는 게 맞는 말이리라. 오빠도 언니도 와룡동 여자를 새어머니로 여기지 않았으나 같은 경성 하늘 아래 아버지와는 가끔 연락을 했다.

3. 시댁(媤宅)

세 살 위 남편은 육형제 중 셋째였다. 시댁에는 딸이 없었다. 시집가서 처음에는 식구가 많아 적응하기 힘들었다. 시부모님 그리고 분가하지 않고 사는 형님네, 시동생 셋, 아이들도 있고, 일하는 사람 여럿이 함께 사는 친정과는 다른 대가족이었다. 아침 점심 저녁을 차리고 치우면 밤이 되었다. 기다란 행랑채와 헛간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서면 디귿자 형태의 큰 한옥이 있었다. 뒷마당으로 나가면 담장너머로 소양강이 흘렀다.

지역유지였던 시아버님은 손님이 많았다. 아버님은 춘천뿐 아니라 강원도 내 유력 인사들과도 교류가 많았는데 나는 그 분들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지만 관심도 없었다. 대가족이었으나 논밭이 넉넉해 살림은 풍족했다. 집안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제사도 많았고 집안 행사도 많았다. 일이 아무리 많아도 나는 겁을 내지 않았다. 교회일로 살림을 손에서 놓다시피 한 어머니 대신 친정 살림이며 집안 대소사, 아버지 손님접대도 모두 해냈던 나였다.

시댁 부엌에는 가마솥이 여럿 걸려 있었고 마당 한쪽 우물곁에도 간이(簡易) 부엌이 있었다. 부엌에는 막국수 뽑는 기계도 있었다. 김장때나 된장 담글 때, 집안 잔치나 손님이 오면 즉석에서 막국수를 뽑아 동치미에 말아 빈대떡이나 돼지고기 수육과 함께 내놓았다. 큰 잔치가 벌어지면 돼지도 잡고 술도 빚었다. 장작을 패서 쌓아놓고 쇠죽을 끓이고 물을 길어 나르고. 빨래는 또 얼마나 많은지, 모시 한복 손질이며 이불 호청 시치기 등 일이 산더미처럼 쏟아졌다. 일하는 사람이 있어도 기본적으로 형님과 내가 모두 책임지고 관리해야 했다.

다섯째와 여섯째 시동생은 해방 전후 서울로 유학했는데 방학 때 고향에 내려오면 형님들과 때로는 아버님까지 언성을 높이며 밤늦도록 논쟁을 했다. 야식을 준비하며 간간히 듣기는 했지만 무슨 소린지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심각한 내용인 것이 분명하구나 생각했지만 왜들 저렇게 언성을 높이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잠자리에서 남편에게 넌지시 물으면 세상 돌아가는 얘기일 뿐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4. 행복했던 10년

농업학교를 졸업한 남편은 집안일과 농사일만 아는 사람이었다. 부지런한 탓이겠지만 아버지 일을 거의 다 물려받아 잘 키워나가고 있었다. 쌀농사와 밭농사를 크게 짓고 소, 돼지도 키웠다. 난 아들 다섯을 연달아 낳았는데 그 때마다 시부모님은 기뻐하셨고 큰살림을 점점 내게 맡기셨다. 사실 둘째로 딸을 낳았지만 병이나 곧 잃고 말았다. 내가 후에 늙으니 내게도 딸이 하나 있었으면 좋았겠다 싶었다. 딸이라면 내 안타까운 심정을 이해해 줄 거라 생각했기에 더욱 그랬다.

내가 시집 온 후 둘째 형님은 춘천을 떠나 포항(浦項)으로 이주했다. 큰 서방님이 결혼하고 손아랫동서가 들어왔는데 말동무도 생기고 집안일도 나누니 한결 가벼웠다. 아랫동서 역시 6·25전쟁이 나기 전 포항으로 이주했다. 결혼하지 않은 두 시동생은 서울로 나가 공부했으니 춘천 본가에는 시부모님, 큰 형님네와 우리만 남은 셈이다. 아버님은 우리도 본가에서 조금 떨어진 근화동(槿花洞) 시내로 나가 살도록 해주셨다.

분가한 집은 대청마루에 미닫이창을 달아놓은 일자형 기와집이었는데 아마 일본인이 놓고 간 적산가옥이었던 것 같다. 앞마당이 넓어 아이들이 뛰어놀기 좋았다. 분가해서 살았던 2년여의 짧은 기간은 내 인생 최고의 시간이었다. 그야말로 진정한 해방! 꿈같은 생활이었다. 넷째 아들을 낳았다. 남편은 내가 먹고 싶다는 것은 두말 않고 사 들고 들어왔다. 시집살이 할 때는 어른들 눈치가 보여 어렵던 일이었다.

여름날 소양강에서 물놀이 하고 천렵하던 일. 둘이서 시내 나가서 먹었던 불고기와 냉면, 그 맛을 평생 잊지 못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냉면이 된 것도 임신을 하고 입덧이 심할 때면 남편이 조용히 나가자고 해서는 함께 먹었던 냉면 맛을 잊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섯째를 임신하고 영원할 줄 알았던 행복은 6·25전쟁이 터지면서 결혼 10년 만에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정말 이렇게 빨리 허망하게 무너져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너무나 행복했기에 하늘마저 샘을 낸 것인가!

5. 절망(絶望)

그날은 아침부터 날이 흐렸다. 저녁이 되자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전쟁 통. 우리는 분가생활을 접고 본가로 들어와 지내고 있었다. 국군이 북으로 진격했으나 마을은 폭풍전야였다. 시부모님 잠자리를 살펴드리고 우리 가족도 자리에 들 준비를 마쳤다.

아이들은 잠에 빠졌으나 우리 부부는 잠이 오지 않았다. 낮에 마을 사람들이 하는 소리를 들었던 터였다. 두 시동생이 월북을 했으니 국군이 들어온 이상 우리 집에 화(禍)가 미칠 수도 있을 거라는 좋지 않은 소문 말이다.

인민군이 퇴각할 때 두 시동생은 부모님과 형님들에게 함께 월북했다가 훗날 다시 돌아오자고 했다. 아버님은 화를 내시며 내가 뭘 잘못했기에 고향을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이냐. 여기에 조상의 산소도 집도 땅도 다 있는데 왜 도망을 간단 말이냐. 부역자의 집안이라고 화가 미칠 것이라고, 피해야 한다고 시동생들이 강하게 주장했다. 부역을 했다면 너희가 한 것인데 왜 우리가 달아나야 한단 말이냐. 남편은 부모님을 두고 떠날 수는 없다고 했다. 고초를 당할지는 몰라도 설마 큰일이야 있겠냐. 다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고 몇 대에 걸쳐 함께 살던 이웃들인데 별일이 있겠냐고 했다. 난 두려움에 빠져들었다.

시동생들은 해방 전후 서울에서 유학하며 좌우익이 대립하던 시기에 좌익 이념에 빠져 그쪽 편에서 활동했던 것 같다. 전쟁이 나자 인민군을 따라 고향에 내려와 활동을 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하고 인민군이 퇴각할 때 두 시동생은 월북했고 다른 식구들은 남았다. 나는 막내를 낳고 산후조리 중에 있었다.

갑자기 창밖이 시끄럽고 환해지면서 횃불을 들고 완장을 찬 남자들이 대문을 박차고 마당으로 들이닥쳤다. 일부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누구 나와라. 아버님 함자가 불렸을 때 나는 거의 실신할 뻔 했다. 군중은 큰 아주버님 이름과 남편 이름도 불러댔다. 남편이 뛰어나갔고 날이 밝으면 차분히 얘기하자고 했으나 횃불을 든 군중은 이미 흥분상태로 말이 통할 리 없었다. 진흙 발로 마루를 넘어 방으로 들어와 솜이불을 밟고 아버님을 끌어내는 게 아닌가. "이 사람들아 내가 뭘 잘못했다고 야심한 밤에 이 행패인가." "××× 집안 끌어내라." 이후 사태는 필설로 다 할 수 없다.

6. 면회

비 내리는 깜깜한 밤. 시부모님과 큰형님 내외 그리고 우리 부부는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갔다. 이튿날 나는 갓난아기가 있다고 풀어주면서 집에 꼼짝 말고 있으라고 했다. 끌려갔던 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면회도 안 되는 참혹한 날이 흘러갔다. 남편 친구의 말을 들으니 두 시동생이 어디로 갔는지 숨김없이 말하라는 것과 인민군이 내려왔을 때 마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조사하는 것일 거라고 했다. 이웃들은 뭐 특별한 잘못이 없으니 풀려나지 않겠냐고 말했지만 난 너무도 두렵고 떨리기만 했다. 혈기 왕성한 20대 중후반 청년들을 누가 어찌할 수 있단 말인가! 부모와 형의 말을 들을 나이가 아니잖은가!

계절이 겨울로 바뀌었어도 풀려나지 않자 두려운 마음에 내가 먼저 죽을 지경이 되었다. 무학(無學)으로 아무 것도 모르는 어머님과 형님은 왜 풀어주지 않는지. 함께 갇힌 사람이 스무 명이 넘는다는 소문도 들렸다. 면회가 받아들여졌다. 시부모님과 형님부부를 보니 난 그저 울기만 할 뿐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남편은 아이들이 잘 있는 지 묻고 곧 나갈 테니 걱정 말고 산후조리에 힘쓰라고 했다. 핼쑥한 남편 얼굴을 보는데 눈물만 쏟고 면회 시간이 끝났다. 겨우 남편에게 마음을 단단히 먹고 몸을 잘 보전하라고 당부했다. 내가 백방으로 알아보고 꼭 나오도록 힘써보겠다고 했다. 친하게 지냈던 이웃들도 나를 보면 말을 아꼈고 자기들도 앞일은 모른다고 할 뿐 답답하고 두려운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7. 남편과의 약속

전쟁은 다시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중공군이 개입했고 국군이 다시 후퇴할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면회가 다시 받아들여졌다. 남편이 백일을 지난 막내를 안아보는데 핼쑥하다 못해 병색이 완연한 모습에 울음이 복받쳤다. 남편은 뜻밖에 약한 말을 했다. 아무래도 부모님이나 자기들은 쉽게 나갈 수 없을 것 같다고. 상부의 지시가 있어 여기 사람들도 맘대로 할 수 없는 것 같다고. 당신과 아이들에게도 화(禍)가 미칠지 모르니 포항(浦項) 아우 집으로 하루빨리 피란을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후일 풀려나면 찾아 가겠노라고 했지만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아이들을 부탁한다고 할 때 난 함께 죽겠다고 울부짖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서 아이들만은 꼭 잘 키워달라고 남편은 신신당부를 했다. 나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눈물의 약속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절망! 모두들 피란을 떠나고 곁에서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된다는 것만 알았을 뿐 포항이 어딘지도 얼마나 먼 길인지도 몰랐다. 짐을 많이 챙길 수는 없었다. 어른이라곤 나 하나이고 모두 아기랑 아이들뿐이었다. 졸지에 엄마 아빠를 잃게 된 형님의 딸인 열두 살 조카딸도 함께 데려가야 했다. 갓난아기는 조카딸이 업고 난 넷째를 업고 머리에 짐을 이고 양손에도 짐을 들었다. 아홉 살 큰아들은 짐을 지고 여섯 살 둘째도 봇짐을 졌다. 네 살 셋째는 그냥 걸렸다.

새벽 동이 트기 전 도망치듯 춘천을 빠져 나와 남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내려갔다. 강원도 겨울의 새벽 날씨는 춥기가 살을 베는 듯 매서웠다. 홍천(洪川)으로 가는 중에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이 눈밭에서 이 아이들을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 절망 속에서 아이들을 부탁한다는 남편의 당부가 머리를 맴돌 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아이들을 살려 훗날 남편을 떳떳하게 만나리라 다짐하며 걷는데 다리가 후들거려 발을 떼기조차 힘들었다.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추운 눈밭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사실 그날 이후 나는 남편을 만나지 못했다. 하고픈 말 하나도 못했는데 그 것으로 끝이었다. 어찌 됐는지 생사조차 모른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고 초기에는 무서워 알아 볼 엄두를 못 냈다. 얼핏 들려온 소문은 산으로 끌려가 죽었다는 소리 뿐, 정확하게 본 사람도 확인된 것도 없다. 시동생들이 다시 내려와 북으로 데려갔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살아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별 생각을 다 해 보았으나 알 길은 없었다. 연좌제가 서슬 퍼렇게 살아 있던 시절 아닌가. 나는 남편이나 웃어른들 생사보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나 하나만 바라보고 있는 천진난만한 눈망울들이 더 소중했다. 어떻게든 아이들을 살려야 한다는 단 하나 그 생각뿐 다른 것은 들어올 틈이 없었다.

8. 선택(選擇)

걷다 힘겨우면 피난민의 수레에 사정해 아이를 앉히고 내려갔다. 젖이 말라 갓난아기가 굶고 기저귀를 갈아주지 못해 엉덩이가 짓물렀다. 오늘 밤은 어느 집에서 잠을 자야 하나. 홍천 산골 호롱불이 켜진 초가집을 찾아 문을 두드렸다. "하루 밤 신세를 질 수 있을까요." 고맙게도 젊은 여자는 우리를 받아주었다. 그녀는 바로 얼마 전 열병으로 아기를 잃었다고 했다. 젖이 많았던 여자는 막내에게 젖을 주었다. 오랜만에 막내는 젖을 실컷 먹었다. 나무꾼인 남편은 군대에 가고 집엔 나보다 댓살 어린 주인 여자뿐이었다.

하룻밤 머물려 했는데 이틀을 머물렀다. 계속 머무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길을 떠나기 전날 밤 젊은 여자는 내게 너무도 놀라운 제안을 했다. 추운 겨울 눈길에서 아기들을 모두 죽일 셈이냐. 갓난아기는 자기에게 맡겨두고 갔다가 전쟁이 끝나면 찾으러 오라고. 어쩌면 아기에게는 그 길이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난 아이가 많아 힘에 겨운데 그렇게 말해주는 젊은 여자가 고맙기까지 했다. 여자는 삶은 옥수수와 감자를 싸주었다.

얼마나 갔을까. 엄마! 아기가 하나 없어요. 애써 못들은 척 하면서 "그래 나중에 찾으러 올 거야." "안 돼요. 내가 업고 갈 거예요." 죄책감에 방망이질 치던 가슴. 큰 아들 말에 정신이 번쩍 나고 아이들을 부탁한 남편의 당부가 내 머리를 때렸다. 훗날 남편을 어떻게 볼까. 죽어도 같이 죽어야지. 그래 같이 죽자. 그 길로 발길을 돌렸다. 그 새 정이 든 여자는 울며 아기를 놓지 않으려 했다. 아기를 빼앗듯 둘러업고 다시 눈밭을 내려갔다. 중공군이 우리를 앞질러 갔다.

9. 하나님과의 약속

추위와 허기, 두려움 속에서 갑자기 친정어머니가 떠오르고 눈물과 함께 기도가 터져 나왔다. 나는 하나님을 찾고 있었다. 엄격한 유교 집안으로 시집와 기독교인임을 드러내지 못하고 10년을 까맣게 잊었던 분. 교회 출석은 생각지도 못한 채 처녀 때 지녔던 신앙은 말라 버렸고 성경 말씀이나 예수님도 잊어버렸다. 시집살이는 정신없이 바빴고 아이는 2년 터울로 태어났다. 내 자신 너무나 행복했기에 신앙에 대한 갈증조차 끼어들 틈이 없었으리라. 절망의 눈밭에서 감히 하나님과 거래를 하고자 했다. "주님! 눈밭에서 이 아이들을 살려주신다면 당신의 말씀 따라 당신의 아들로 키우겠습니다. 가련한 이 여인에게도 당신의 기적(奇蹟)을 보여주소서."

10년 만에 터진 기도, 일방적으로 드린 하나님과의 약속은 죽을 때까지 나와 함께 했다. 좋으신 하나님은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붙들어 주시겠다고 하셨다. 정말 주님은 내 손을 잡아 주셨고 아이들을 모두 멋진 청년으로 한 가정의 아버지로 키워 주셨다. 나는 대학생이 된 막내를 끌어안고 그 때 홍천 산골에 두고 왔으면 나무꾼이 되었을 거라며 정말 큰일 날 뻔 했다며 미안해했다.

10. 사기(詐欺)

아이들을 데리고 포항까지 가는 것은 무리였기에 원주(原州)에서 머물며 날이 풀리는 봄을 기다리기로 했다. 원주에는 시댁의 선산이 있고 남편의 사촌형제들도 살고 있었다. 피란을 떠난 집이 많아 빈 집을 쉽게 얻었다. 포항으로 떠나는 친척이 있었다. 그 사람은 원주에 머무는 나에게 봄에 포항에 도착하면 살 집을 미리 마련해 놓겠다고 했다. 나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집 살 돈을 맡겼다.

봄이 되자 온 식구는 다시 길을 나섰다. 완행열차도 타고 트럭도 얻어 타고 우마차도 타고 걷기도 하며 내려갔다. 전쟁은 서울과 강원도에 걸친 중부 지역에서 교착 상태에 빠져있었다. 오랜 피란의 끝, 우리는 마침내 포항 상도동(上島洞)에 있는 동서네 집에 당도했다. 살 집을 구해주겠다며 돈을 받아간 친척은 집을 구해놓지 않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한 걸음에 달려가 돈을 내놓으라고 울부짖었으나 이미 돈을 다 써버린 뒤였다. 연신 죽을죄를 지었다고 꼭 갚겠노라고 하는데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내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어찌 그렇게 사기를 친단 말인가. 사람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하루도 눈물로 분노로 지샐 수만은 없는 절박한 시기가 아닌가! 어떻게든 아이들을 먹이고 살아야 했다. 남은 돈으로 죽도(竹島)시장에 초가집을 얻었다.

11. 포항 죽도시장

포항은 수산물 집산지로 큰 배가 정박하고 있는 항구 도시였다. 특히 울릉도 오징어의 집산지로 상당히 활기를 띠고 있었다. 미군과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어 군인이 많았다. 날마다 군용 차량과 건어물을 실어 나르는 트럭이 집 앞을 지나갔다. 죽도시장이 있는 죽도동은 원래 형산강에 속한 섬이었다. 섬 한편을 복개하여 육지가 되었고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죽도시장 뒤편은 샛강이 흘렀다. 길 양편에 가게가 늘어서 있고 시장 통은 부두로 이어졌다. 부둣가에는 건어물 창고가 늘어서 있었다. 신작로는 비만 오면 물을 튀겼고 갠 날은 흙먼지를 날렸다.

우리가 얻은 집은 방 한 칸에 부엌이 딸린 초가였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샛강에서 물놀이를 했다. 춘천 본가 뒤를 흐르던 소양강에서 물놀이 했던 아이들은 물개처럼 수영을 잘 했다. 집 건너편에는 염색집이 있었는데 주로 군복과 무명천을 염색해서 널어 말렸다. 아이들은 대나무에 널어놓은 염색 천을 들치며 숨바꼭질하며 놀았다. 나는 막내를 업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큰 낙이었다. 그 시간에 따로 할 일도 없었지만 예배를 드리며 늘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리라.

집 앞에 좌판을 내놓고 양키 물건을 팔았다. 옆집 가게는 기와집 서까래에 천막을 대고 제법 큰 진열대를 벌여놓기도 했으나 우리는 길에 나앉은 초가라 좌판을 놓을 공간

이 고작이었다. 생전 처음 해보는 장사, 그렇게 낯설 수가 없었다. 군용 지프나 건어물 트럭이 오갈 때마다 좌판을 덮었다 열어야만 했다. 아낙네들은 항의도 못하고 좌판을 닦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과자, 통조림 등을 떼다 팔았는데 이 정도 장사로는 일곱 식구 목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감자와 옥수수 그리고 배급 받은 밀가루로 빚은 수제비, 우유 가루가 주식이었으나 그마저도 배불리 먹을 수 없었다.

12 자신과의 약속

아무 것도 해주지 못했지만 아이들은 공부를 잘해 늘 상을 타왔다. 살림은 어려워도 아이들을 보면 희망이 보이고 힘이 솟았다. 우리에게 교회생활은 일상이 되었다. 난 학교생활과 마찬가지로 교회생활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아이들은 교회활동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있었다. 읽기 듣기 말하기 글짓기는 물론이고 음악 미술 체육, 사회성도 배우고 있었다. 아이들에겐 교회가 훌륭한 가정교사나 다름없었다.

조금 큰 집을 얻기 위해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어느 날 숨겨두었던 돈이 감쪽같이 없어졌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설마 내 아들이?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염색집 처녀가 조카딸을 보러 우리 집에 자주 놀러왔는데 그 처녀가 돈을 펑펑 쓴다는 소문이 돌았다. 달려가 그 아이 엄마와 아이를 붙잡고 어디서 돈이 나서 그렇게 펑펑 쓰느냐고 다그치니 자기가 훔쳤다고 실토를 했다. 염색집에서 여러 번에 나누어 돈을 받아냈지만 집을 옮기지는 못했다.

포항살기에 적응할 때쯤 재혼을 하면 어떻겠냐고 꼬드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30대 초반 나이에 아이들만 여섯. 집도 돈도 없이 살아야하는 험난한 길. 소식조차 없는 남편을 기다리는 일도 점점 힘에 겨웠다. 그러나 내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 아이들을 잘 키우겠다는 남편과의 약속이 있었고, 전쟁이 끝나면 언젠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린 적이 없었다. 아이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꼭 키워내겠다는 하나님과의 약속이 굳건히 마음 깊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은가! 나는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아이들이 장성해 사회로 나갈 때까지 어떤 일이 있어도 아이들을 지켜내겠다고 나 자신과 약속했다.

13. 전보(電報)

3년에 걸친 전쟁이 끝났다. 혹 화가 미칠지 몰라 난 춘천에 올라가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춘천서 왔다는 사람을 만나도 춘천 소식을 자세히 묻지 못했다. 남편이 갑자기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 기다리며 살았다. 휴전 되고 2년쯤 지난 어느 날 서울 언니로부터 전보가 왔다. "금일 아버지 망(亡) 급 상경 요." 그날 저녁 다섯 살 막내를 데리고 서울 행 완행열차를 탔다. 기차는 통로까지 승객이 꽉 차서 꼼짝달싹도 못할 지경이었다. 밤새 달린 기차는 다음 날 아침 서울역에 닿았고 언니가 마중 나와 있었다. 남산 아래 회현동(會賢洞) 언니 집으로 먼저 갔다가 빈소가 차려진 창덕궁 앞 와룡동 아버지 집에 가기로 했다.

언니 집은 타일을 붙인 일본식 2층 양옥이었는데 내 눈에는 대궐 같았다. 난생 처음 보는 전화도 있고 소파며 식탁이며 침대며 수세식 화장실까지 서양식 생활을 하고 있었다. 전화가 왔다. 놀란 막내는 수화기 속에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언니는 "저 안에 작은 사람이 들어 있어서 말을 한단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막내는 수화기를 이리저리 들여다보고는 "사람이 안 보여요." 했다.

와룡동 아버지 집은 한약방과 살림집을 겸한 한옥으로 번듯했다. 집안은 한약 냄새와 향내가 진동하고 만장이 펄럭였다. 나와 언니는 와룡동 여자와 장례절차에 대해 의논하려 했지만 그 녀는 아버지의 뜻이라며 자기 주도로 불교식 장례를 치르겠다고 했다. 조금 후에 오빠도 왔지만 오빠는 한참 앉았다 돈을 조금 놓고 떠났다. 10여 년이나 엄마와 자식들을 버리고 딴 여자와 살다간 사람 아닌가! 그래도 아버지였던 사람. 다음날 화장터까지 따라가 보내드렸지만 우리 삼 남매는 불교식 장례가 마지막까지 정을 끊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포항으로 돌아가기 전날 언니는 아이들이 공부는 잘 하는지 물었다. 잘 한다고 했더니 그러면 무조건 서울로 올라와 가르치라고 했다. 자기가 서울에서 살 곳과 아이들 전학 문제를 알아보겠다고 했다. 나는 결심을 했다. 서울로 올라와 아이들을 가르쳐야겠다. 포항에서도 일거리가 없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산 입에 거미줄을 치겠나. 서울에는 엄마도 오빠도 언니도 있는데.

14. 서울 인현동(仁賢洞)

얼마 후 언니에게서 편지가 왔다. 인현동에 집을 얻어 놓았고 아이들 전학 문제도 다 해결했으니 서울로 올라오라고. 언니는 걸스카우트에서 꽤 중요한 자리를 맡아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립학교에 아는 분들이 많았다. 난 한여름에 짐을 싸고 있었다. 짐이라고 해야 지고 들고 가는 것이 전부였지만 마음은 이미 서울에 가 있었다. 춘천을 떠나 피란 갈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포항을 떠났다. 다른 게 있다면 아이들이 훌쩍 컸다는 것뿐, 내 처지는 하나도 나아진 것이 없었다. "서울에서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살 수 있대요." 서울로 간다는 내게 이웃들이 걱정하며 해준 말이다. 나 역시 두려움이 몰려왔지만 기대도 컸다.

언니가 얻어놓은 집은 인현시장 내 상가였다. 아래층은 가게 자리고 2층에 다다미방이 하나 있었다. 수도나 변소(便所)은 공용이었다. 난방이라고는 방 한가운데 연탄난로를 놓고 밤에는 뜨거운 물주머니를 하나씩 끌어안고 자는 식이었다. 살기 위해선 장사를 해야 했는데 당장은 아래층에 좌판을 놓고 이것저것 떼다 팔 수 밖에 없었다. 휴전 된지 2년 반쯤 지난 1956년 1월까지도 인현시장은 피란민이 몰려들어 그야말로 도떼기시장 그대로였다. 나는 닭 집에서 손질한 닭고기랑 두부 한 판과 콩나물 한 통을 놓고 팔았다. 돈을 조금이라도 더 벌 요량으로 방구석에 들통을 놓고 콩나물을 길렀다. 콩나물에 물을 주는 일은 셋째 넷째가 주로 맡았다. 틈나는 대로 옆 스웨터 가게에서 낡은 스웨터를 가져와 대바늘로 스웨터 집에서 주문을 받은 대로 스웨터를 떠서 돈을 벌었다. 낡은 스웨터를 풀어 털실을 감는 일은 네째와 막내가 도왔다. 밤에는 제한 송전으로 자주 불이 나갔는데 촛불을 켜가며 스웨터를 떴다.

시장 한쪽에 평양에서 피란 온 목사님이 개척한 천막 교회가 있었다. 인현교회는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남자는 왼쪽 여자는 오른쪽으로 나누어 앉아 예배를 드렸다. 시장 상인들의 피란 교회였으나 열기는 뜨거웠다. 기댈 곳조차 없는 사람들이었다. 목사님은 환갑을 넘긴 분이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인들이 힘을 합쳐 판자로 지붕과 벽을 치고 마루를 깔고 입당예배를 드렸다. 판자 예배당이었으나 그날의 감격을 잊을 수 없다. 교회의 주축은 십여 가정이었는데 모두가 진심으로 섬겼다. 아이들은 고등부 중등부 초등부에서 제 몫을 다하고 있었고 교인들이 칭찬을 해줄 때마다 난 기분이 좋아 우쭐대기까지 했다. 주보는 기름종이에 철필로 쓴 뒤 등사를 해서 발간했는데 처음에는 고등부였던 큰아들이 맡았다가 그 뒤 둘째가 그 뒤를 셋째, 넷째, 그리고 막내가 고등학생이 되어서까지 10년 이상 그 일을 감당했다. 난 권찰이라는 직분을 받았는데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초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돕는 그런 일이었다. 인현교회는 후에 세운상가가 개발되면서 대한극장 뒤 필동(筆洞) 주택가에 100석 규모의 동원교회를 짓고 옮겼다. 동원교회는 자그마했으나 온 성도들의 삶을 지켜준 고마운 신앙 공동체였다.

15. 낙제 그리고 합격

나는 아이들이 서울에 올라와서도 공부를 잘 할 거라 믿었다. 언니가 주선한대로 큰아들은 휘문중 3학년으로 편입했고 둘째 셋째 넷째는 회현동 남산국민학교 5학년 3학년 1학년으로 전학을 했다. 막내는 아직 입학 전이었다. 전학하자마자 첫 번째 모의고사에서 둘째는 거의 낙제점을 들고 왔다. 포항에서는 5년간 전교 1등이던 아들이었다. 나는 상경한 것을 크게 후회했다. 멀쩡한 아이들을 끌고 올라와 바보를 만들었다는 생각으로 절망에 빠졌다. 과연 서울 학생들은 시골과는 비교가 안 되는 천재들이란 생각에 이제 돌아갈 수도 없는데 이를 어쩌나. 둘째는 나를 위로하며 생전 처음 치른 모의고사라 처음 보는 문제에다가 어떻게 하는 줄 몰라 그랬는데 공부를 하면 좋아질 거라고 했다. 둘째 말대로 성적은 꾸준히 올라 6학년 2학기에는 거의 다 따라잡았다. 담임선생님께서 경기중학교에 원서를 내라고 하셨다. 큰아들은 휘문고 2학년으로 올라간다고 했다.

둘째는 선생님 인솔 하에 경기중학 시험을 치르고 왔는데 발표 날에도 합격 여부를 알 수 없었다. 당시는 신문이나 라디오에서 주요 학교 합격생을 발표했는데 우리는 신문도 라디오도 없었다. 중학교에 가면 방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학교가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 오후 늦게 오빠가 지프를 타고 인현시장 집으로 왔다. 신문을 보여주며 합격했다고 말해주었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소식도 없는 남편이 한없이 그립고 야속했다. 옆에 있으면 얼마나 기뻐했을까. 내가 이렇게 키웠다고 자랑도 할 텐데, 또 눈물이 흘러내렸다.

16. 동대문 시장

인현시장 좌판 장사로는 아이들을 먹이고 공부시키기 어려웠다. 교회 집사님이 동대문 시장에서 옷 장사를 해보는 게 어떠냐고 조언했다. 마음을 다잡고 동대문시장으로 따라 나섰다. 원 세상에! 2층 건물에 옷가게 포목가게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게 아닌가! 광장시장 2층 비단 가게들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런 곳에서 장사를 하면 돈도 벌고 아이들을 먹이고 가르칠 수 있겠다 생각하니 의욕이 솟았다. 가게는 임대료가 비싸 엄두가 안 나 우선 보따리 장사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새벽에 도매상에서 한복과 아동복을 떼다가 청량리 역에서 중앙선 열차를 타고 오일장이 열리는 강원도 소도시를 돌며 팔았다. 보따리 장사는 꼭두새벽에 나가면 밤늦게 파김치가 되어서야 끝났다. 시장 사람들을 사귀고 시장을 알만 하니까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본금 없이 재고 없는 장사를 하기에는 한복 안감 장사가 안성맞춤이었다. 당시는 전쟁 직후라 대부분의 여성들은 머리를 틀어 비녀를 꽂고 검정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고무신을 신었다. 안감 시장에 한 평 반 크기의 가게를 얻었다. 큰 가게 사이에 낀 작은 가게여서 월세가 쌌다. 맞은편과 옆으로는 큰 안감 가게가 있었는데 서울은 물론 지방에서 올라오는 한복집과 도매 거래를 했다. 주인 부부 외에 점원도 두 명이나 둔 큰 가게였다.

나는 주로 동네 한복집이나 개인을 상대로 소매(小賣)를 했다. 한복 안감은 코와 목을 찌르는 화학약품 냄새가 강하게 난다. 오래 앉았으면 눈과 목이 따갑고 어지럼증이 났다. 안감이 잘 팔릴 땐 신이나 냄새를 모르다가도 손님 없이 앉아 있으려면 고통이 심했다. 큰 가게는 점원이 통로에 나가서 호객을 했는데 내 가게에서 물건을 보다가 옆의 큰 가게로 가는 손님을 볼 때면 가슴이 쓰리고 부아가 일었다. 좀 판 날은 기분이 좋아 생선이라도 들고 귀가했지만 거의 팔지 못한 날은 속이 상해 집에 돌아오면 쓰러지곤 했다. 나도 남편이 있어 같이 장사를 했으면... 옆 가게 주인 부부를 볼 때마다 부러움과 설움에 속으로 울었지만 아들들에겐 내색을 안 했다.

밤늦게 집에 돌아오면 아들들은 "오셨어요." 할 뿐 내 마음을 몰랐다. 임대료 월사금 연탄 쌀 반찬거리 교복 학용품 소풍 돈 달라는 소리는 끝이 없는데 나를 위로하고 이해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들에게 내 처지를 말해봐야 지나가는 소리로 쉬어가면서 하라고 할 게 뻔했다. 그 것도 장사라고 세무서에서는 세금을 매겼다. 옆 가게와 매출대비 세금은 우리 가게가 많았다. 세무서에 항의할 수는 없었다. 나는 로비도 할 줄 몰랐다. 남편이 있었으면 해결해 줄 텐데 하고 또 소식 없는 사람을 원망했다.

17. 서울 필동(筆洞)

아이들이 커가면서 단칸방 생활은 무리였다. 인현시장에서 2년여를 살고 대한극장 뒤편 남산 기슭 피난민들이 사는 필동 판자촌으로 이사했다. 방 두 칸에 부엌이 있는 무허가 판잣집이었지만 그래도 내 집이라는 생각에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공동 수도에 공동 변소였지만 구공탄을 때는 온돌방이었다. 수돗물은 제한급수였는데 공동 수도는 마을 어귀 저지대에 있었다. 막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양동이 두 개를 놓고 차례를 기다렸다. 물이 나오면 형들이 내려와서 들고 언덕을 올라갔다. 겨울엔 흘린 물로 계단이 얼어 미끄러워 물을 쏟기도 했다.

조카딸과 막내는 나와 같이 잤고 네 아들은 부엌 옆방에서 잤다. 나는 새벽 6시까지 시장에 나가 가게 문을 열어야 했다. 다른 가게들이 문을 열었기에 나도 안 열 수 없었다. 새벽시장으로 나가기 전 이불에 엎드린 채 기도를 드렸다. 아이들 이름을 하나씩 부르며 드리는 기도는 눈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자다 깬 막내가 "엄마 왜 울어" 하며 따라 울면 "막내가 예뻐서" 라고 했다.

아들들이 공부를 잘 하는 것이 유일한 기쁨이고 위안이었다. 대학에 들어가면 과외를 해서 돈을 벌었고 재학 중에 입대해서 내 힘을 덜어줬다. 조카딸은 일찍 시집을 갔고 친정어머니는 강원도 시골에서 열두 살 된 여자 아이를 데려와 집안일을 하도록 했다. 친정어머니는 가끔 오셨는데 오실 때마다 손자들에게 애미 고생시킨다고 아이들을 못마땅해 하셨다. 특히 밥을 많이 먹는 가이(개)는 치우라고 하셨다. 친정어머니는 당시엔 난치병이던 암에 걸려 몇 해 고생하시다 환갑을 겨우 넘기신 나이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당신의 유일한 걱정거리였던 막내딸이 반듯하게 사는 모습을 못 보여드린 것이 가슴 아팠다.

시장 사람들은 나를 많이 이해해 주었다. 1960년대 중반 나는 임대했던 가게를 샀고 더 이상 월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남편의 소식을 모르는 채 10여년이 지났다. 본적지가 춘천에 있는 것도 너무 불편했다. 난 마음을 잡고 남편의 사망신고를 하기로 했다. 사유는 오랫동안의 행방불명이라고 적었다. 이 참에 본적지도 살고 있는 필동으로 옮기기로 했다. 내 소유의 안감가게를 사고 형편이 나아지자 우리는 필동 2가에 블록으로 지은 집으로 이사했다. 시멘트 기와를 얹은 방 3개에 자가(自家) 수도도 있었고 마당 한쪽에 변소도 있었다. 이제 겨우 사람 사는 집 같았다.

18. 낙찰계(落札契)

당시 대부분의 서민들은 은행 문턱을 넘기 어려웠다. 목돈마련을 위해서는 계(契)를 많이 활용했다. 동대문시장 포목상인들은 낙찰계를 해서 목돈을 마련하곤 했다. 10여명의 계원들이 매달 모여 높은 이자를 쓴 사람이 그 달의 계를 타는 입찰방식이었다. 이자는 매달 낮아지게 마련이지만 여럿이 급전이 필요한 경우 지난달 보다 높은 이자를 쓰는 경우도 있었다. 계주를 맡은 사람은 첫 달 계를 탈 권리를 갖는데 이자를 쓰지 않아도 된다. 1-2년의 운영 수고와 위험 부담을 책임지는 대신 받는 보상인 셈이다. 마지막달 계를 타는 사람도 이자를 쓰지 않는다. 그동안의 이자를 보상받는 셈이다. 시장 생활에 익숙해지고 믿을만한 친구들을 사귀게 되자 나는 계주가 되어 운영하는 낙찰계 하나와 계원으로 참여하는 낙찰계 하나 총 두 개의 계를 했다.

나는 매년 2월과 10월말에 목돈이 절실히 필요했다. 2월에는 아이들 입학이나 월사금 교복 학용품 등 돈 들어갈 곳이 많았다. 10월말에도 김장이나 연탄, 겨울 옷, 된장과 고추장 등 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가 필요했다. 시장 친구들의 낙찰계에 끼어들어 목돈 문제를 해결했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동안 계가 깨진 적은 없었는데 모두 신용 좋고 든든한 계원들이 친목형식의 상부상조를 했기 때문이다. 매달 계 타는 날과 모임 장소가 정해져 있는데 대체로 가게 문을 닫은 밤 시간에 불고기냉면집에서 모였다. 을지로 우래옥에서 자주 모였는데 그날은 나 혼자만 잘 먹는 것 같아 아이들에게 미안해 집에 오는 길에 돼지고기나 과일을 사들고 들어갔다.

무조건 한 번에 많이 사는 것이 쌌기에 계를 타면 연탄 1,000장을 들여놓고 김장은 배추 200포기에 무 2가마를 차로 실어왔다. 시장에 나가느라 이웃과 왕래가 거의 없다보니 김장때는 아들들과 일찍 시집간 조카딸까지 총동원 되어 밤늦게까지 담가야했다. 장독을 묻고 무와 배추를 씻고 다듬고 무 채치기도 아들들이 도왔다. 포기김치에 토막 낸 무를 깊이 찔러 넣었다가 잘 익은 무를 젓가락으로 쿡 찍어 밥과 같이 먹으면 다른 찬거리가 없어도 한 끼 식사로 그만이었다.

김장과 동치미를 담그고 된장과 고추장까지 담그고 나면 반찬 걱정이 다 사라졌다. 소고기는 명절 때나 먹어보고 주로 꽁치나 양미리 같은 생선을 짝으로 사놓고 먹었다. 한창 자랄 때인지라 어떻게 먹어대는지 쌀 한 가마니가 금세 바닥이 났다. 메주를 쑤면 아이들이 삶은 콩 부대를 신나게 밟아댔다. 메주덩이는 볏단으로 묶어 방안 가장자리에 빙 둘러 걸어놓았다. 한 번은 메주가 잠자고 있는 아들 머리에 떨어진 적이 있었다. 다 굳지 않아서 크게 다치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19. 남편의 선물

춘천에 사는 남편의 옛 친구로부터 어찌어찌해서 연락이 왔다. 의암댐 건설로 수몰되는 지역에 대한 보상 문제가 있으니 한 번 다녀가야겠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수몰 지역에 남편 명의의 땅이 있는 지도 몰랐다. 같은 지역에 땅이 있었던 친구가 알게 되어 연락한 것이다. 춘천을 떠난 지 10여년도 더 지나 처음 가는 길. 떠날 때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곳. 대학생인 둘째와 함께 춘천 행 기차를 탔다. 기차가 춘천에 가까이 갈수록 옛 생각이 되살아나 슬픔과 그리움 그리고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몇 년 후 보상금이 나왔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막내를 데리고 다시 춘천 행 기차를 탔다. 막내에게 행복했던 신혼생활과 남편과의 마지막 이별과 약속에 대해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이제 다 컸으니까 말해줘도 될 때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너만 알고 남에겐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꼭 10년을 살며 행복했던 시절이며,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모두 법 없이 살 수 있는 분들인데 너무나 억울하고 불쌍하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내가 글을 잘 쓸 수만 있다면 죽기 전에 한 맺힌 이야기를 글로 남길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게 한(恨)이라고도 했다.

보상금은 그 동안의 고생에 대한 남편의 마지막 선물이었다. 가족회의를 했다. 모두 내 뜻대로 집을 사자는데 동의했다. 친한 교회 권사님이 경희대학교 근처 회기동(回基洞)에 제법 큰 2층 집이 나왔다고 가보자고 했다. 가방공장이 2층에 전세로 들어 있었다. 전세를 끼고 사면 꼭 맞았다. 우리는 방 3개가 있는 아래층에 살고 2층 가방공장은 계속 전세를 주었다. 집은 기름난방은 물론 수세식 화장실도 있었다. 텔레비전을 사고 전화도 놓았다. 둘째가 결혼했다. 2년 후 가방공장 사장에게 집을 팔고 근처 대지에 2층 양옥집을 지어, 분가해 살던 큰 아들네와 합쳤다. 나머지 세 아들 모두 새집에 살며 결혼시켰다.

20. 성경학교

막내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은행에 취직했다. 내 나이 52세. 이제 내가 아이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은 끝났다. 홀로 아이들을 키우며 내 삶을 바친 20여 년의 시간이 마침표를 찍었다. 아이들을 다 키우고 나면 하나님의 일을 하며 살겠다고 다짐했던 하나님과의 약속이 남아 있었다. 자식들이 독립하게 된 이상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 날이 온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야 할 시간이 왔다. 당시 광화문 근처 새문안교회에서 2년제 성경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동대문 시장의 안감 가게를 전세로 내놓고 학생으로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담임 목사님의 추천을 받아 성경학교에 지원해 입학허가를 받았다. 얼마만의 공부인가! 소학교를 마치고 40년이나 지나서 공부를 다시 하려니 걱정도 앞섰지만, 그 보다 기쁨과 기대가 더 컸다. 성경은 많이 읽었지만, 체계적으로 공부하기는 처음 아닌가. 회기동에서 광화문을 지나는 시내버스를 타고 등교하는데 하루하루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결석도 하지 않고 앞자리에 앉아 공부하고 집에 돌아와서 복습을 하는 일과가 반복 되었다. 2년이 지나 학사모를 쓰고 감격의 졸업식을 했다. 교회에서는 무급 전도사로 교회 봉사와 심방, 예배 도우미 역할을 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장사 일은 힘들고 괴로웠지만 무급 전도사 일은 신나고 보람 있는 일이었다. 나는 다시 꿈 많던 10대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21. 미국 뉴욕

1970년대 중반 한국은 수출대국을 꿈꾸며 종합무역 상사들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해외지사로 발령을 받아 나갔다. 큰아들이 미국 뉴욕지사장으로 발령을 받고 뉴욕으로 떠났다. 곧 이어 둘째도 뉴욕지사로 발령을 받았고 셋째와 막내도 직장을 그만두고 유학을 떠나겠다고 했다. 무역업을 하던 넷째 아들도 뉴욕으로 이주하겠다고 하자 나는 고민에 빠졌다. 뉴욕으로 이주할 것인가. 아니면 서울에 남아 있을 것인가. 내 나이 55세. 몇 년이 될지 모르지만 아들들은 다시 귀국할 테니 낯선 미국보다 친구들이 있는 서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아들들이 하나 둘 떠나고 막내아들네 마저 비행기 표를 구입했다는 소리를 들으니 아무래도 나도 한 번은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서 못 살 것 같으면 돌아오리라 마음먹고 생전 처음 미국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970년대 말이 되자 세 아들이 모두 뉴욕에서 일하고 있었고 셋째와 막내도 동부지역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난 당분간 아들들이 모두 있는 미국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영어를 못하고 운전을 못하니 교회 활동이 내 뉴욕생활의 대부분이 되었다. 큰아들 내외가 모두 일을 나가니 어린 손주들을 돌보는 일도 해주어야 했다. 큰아들과 넷째는 영주권을 신청했고 나도 그렇게 했다. 1980년대가 시작되었고, 이 시기 환갑을 맞아 온 식구가 뉴욕에서 나를 위한 환갑잔치를 차려주었다. 내 생(生)의 한고비가 넘어 가고 있었다.

다른 세 아들은 1980년대 초 귀국했다. 나는 한동안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살았으나 생활의 본거지는 내가 섬기는 교회가 있고 내 방이 있는 뉴욕의 큰아들 집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 해에 한 번 한국을 방문해 한두 달 머물기로 했

지만 해가 갈수록 뉴욕에 빨리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커졌다. 해를 걸러 귀국했다가 체력이 떨어지면서 자주 올 수가 없었다. 나는 고혈압과 당뇨를 심하게 앓게 되었고 귀국 중 무리했는지 60대에 한 번 70대에 다시 한 번 두 번이나 뇌출혈로 쓰러졌다. 그 후 한국행은 더 이상 하지 못했다. 칠순과 팔순도 온 가족이 미국에서 모여 치렀다.

내 삶을 나누어 보면 6·25전쟁 전까지의 행복했던 시절, 혼자 다섯 아들을 키우던 외롭고 고달픈 장사꾼권찰 시절, 교회 일을 하며 한국과 미국을 넘나들던 자유로운 시절, 그리고 병들고 늙어 활동을 멈춘 마지막 10년으로 나눌 수 있다. 마지막 10년은 가끔 서울에서 아들들이 찾아오고 큰아들과 넷째아들네가 옆에 있었지만 난 늘 외로웠다. 내게도 마음을 나눌 딸이 있었으면 했다. 아들들은 왕성하게 활동할 시기였고 자기들의 가정을 돌보고 아이들을 키우느라 늘 바빴다. 며느리들이 잘 한다 해도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억척같이 일할 땐 남편의 부재를 느낄 틈도 없었는데 나이 들어 늙고 보니 남편이 정말 필요하고 그렇게 보고 싶을 수가 없었다.

22. 천국(天國)으로

막내아들이 언젠가 물었다. 남편을 잃고 분하고 원망스럽지 않았느냐고. 처음엔 억울하고 분하고 두렵고 죽고 싶었지만 피란길에서 주님의 뜻에 따라 살 것을 약속하고 용서했다고. 남편과 꼭 10년을 살았지만 그 때의 사랑과 행복으로 남은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고. 살면서 억울하고 세상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나 자신과의 약속, 남편과의 약속, 하나님과의 약속까지 모두 지킨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내 나이 85세. 하나님 품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돌아가신 어른들과 남편을 만나리라는 생각에 죽음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 당시 셋째는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해 살고 있었다. 위독하다는 급보에 서울에 있는 둘째와 막내 가족이 뉴욕으로 날아왔다. 나는 끝까지 기다리다 두 아들까지 만나보고 나서야 고통 없이 눈을 감았다.

큰아들이 미리 뉴욕 오클랜드 묘지에 나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두었다. 뉴저지 초대교회에서 천국 환송예배가 열렸다. 서울의 오빠는 못 오셨지만, LA에 살고 있는 언니는 한걸음에 날아와 환송예배에 참석했다. 넷째 아들이 섬기는 뉴저지 엘리자베스교회 교우들도 많이 오셨다. 막내아들이 영결 조사(弔辭)를 했다.

죽으면 남편과 함께 묻어달라고 했다. 남편의 유품이라곤 빛바랜 사진 한 장이 전부였다. 사진이 너무 낡아 초상화 가게에서 다시 그렸다. 초상화를 함께 묻고 묘비에 남편과 내 이름을 나란히 새겼다. 묘비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고 늘 간직했던 성경 구절 이사야서 41장 10절 말씀을 새겨달라고 부탁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육신은 비록 오클랜드 묘지에 남겨두지만 영혼은 천사들에 이끌려 천국으로 갈 것이다. "주님! 가련한 여인의 영혼을 받아주소서." 라고 주께 의탁할 것이다. 남편과 시부모님 친정 부모님도 만날 것이다. 남편은 30대 청년인데 난 80대 할머니가 됐으니 그것이 유일한 걱정이라면 걱정이다. 남편을 만나면 그 품에 안겨 가슴을 치며 참았던 눈물을 마음껏 쏟고 싶다. 약속대로 아이들 모두 잘 키웠노라고 자랑도 하고 싶다. 막내아들의 영결예배 조사 마지막 말이 귀에 남았다.

"어머니 당신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천사, 위대한 어머니셨습니다.

어머니의 고생과 외로움을 덜어드리지 못한 불효를 용서해 주세요.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이 오형제를 살렸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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