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정원일기> 1744년(영조 20) 음력(이하 음력) 4월 2일자 내용이다. 조선후기,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전후 극복이 마무리되고 경제가 안정화 국면으로 접어들자 사회 전반에 사치 풍조가 만연했다. 재상이나 양반들은 물론 일반 백성들, 심지어 천민들까지 경제적 여유만 좀 있으면 과시성 소비에 여념이 없었다. 옷, 장신구, 음식 소비에 돈을 물쓰듯 했지만 <승정원일기>에서도 보듯 사치의 정점은 주택에 있었다.
1476년(성종 7) 완성된 <경국대전>은 신분별 집터(家垈·가대) 크기를 규정했다. 즉, 대군·공주는 30부(負), 왕자·옹주 25부, 1·2품 15부, 3·4품 10부, 5·6품 8부, 7품 이하 4부, 서인 2부로 제한했다. 1부는 40평(132㎡)이다. 이와 함께 건물도 상한선을 뒀다.
1431년(세종 13) 정해진 건물(家舍·가사) 면적 규제를 보면, 대군 60칸(間·길이나 넓이를 재는 단위), 군·공주 50칸, 옹주·종친·2품 이상 40칸, 3품 이하 30칸, 서인 10칸 이하였다. 길이 1칸은 8척(尺)이다. 1척이 30.3㎝이니 길이 1칸은 2.4m이며, 면적 1칸은 5.8㎡(2.4×2.4) 된다.
심익현(1641~1683)은 1652년(효종 3)에 효종의 2녀 숙명공주(1640~1699)에게 장가들어 청평위(靑平尉)에 봉해졌다. 효종의 명으로 청나라에 세 차례 다녀왔으며 그 때 받은 금과 비단 등을 모두 수행원들에게 나누어줘 청렴하다고 칭송받았다.
그런데 인경궁(仁慶宮·광해군이 인왕산 아래 서촌에 건설한 궁궐) 터에 지은 그의 집은 대궐처럼 으리으리했다. ‘청평위궁 도면’을 보면, 심익현 가옥의 집터는 52부다. 52부는 2080평(6876㎡)으로 실로 엄청난 면적이다. 심익현 집터는 부인인 숙명공주에 허용된 30부 이하를 크게 상회한다. 건물도 165.5칸으로, 법을 3배 이상 초과한다. 165.5칸은 290평(959.9㎡)이다.
<효종실록> 1654년(효종 5) 6월 3일 기사에 의하면, 좌의정 김육(1580~1658)은 “청평위의 신궁이 … 전하 잠저(종로 효제초)에 비하여 칸 수가 배나 많습니다. 어찌하여 궁가를 이다지 과도하게 만듭니까”라고 따져 물었다. 효종은 “소문이 잘못된 것”이라고 변명했다.
벼슬아치들도 법을 우습게 알았다. 이유명(1767~1817)은 1801년(순조 1) 문과에 급제해 대사성, 병조 ·형조·예조 참판, 의금부 동지사(종2품) 등의 벼슬을 지냈다. 선조의 4남 신성군의 후손이지만 그의 선조들이 높은 벼슬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주동(중구 주자동)에 있던 그의 가옥은 법 규정을 훨씬 상회했다. ‘주동 이유명 참판 가옥 도면’은 집터 21부, 건물 160칸이다. 집터도 법제한(15부)을 위반했지만 건물은 40칸의 4배가 넘는다.
일반 백성들도 앞다퉈 고래등 집을 지으려고 했다. ‘소공동 홍고양 가옥 도면’은 집터 51부, 건물 172칸이다. 청평위궁과 맞먹는다. 홍고양(洪高陽)은 실록 등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다. 소공동이면 중인계층 밀집 지역이어서 홍고양도 역관이거나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 부를 쌓은 상인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 조선 후기 한양에는 김한태(1762~1823)라는 갑부가 살았다. 역관 출신의 김한태는 소금 거래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김한태는 예술에도 조예가 깊어 단원 김홍도 등 화가들을 후원했다.
1795년작 ‘을묘년화첩(개인소장)’은 김홍도가 김한태에게 그려준 작품이다. 김한태는 사치가 심했고 그의 집은 궁궐처럼 컸다.
조선후기 이조원(1758~1832)의 <옥호집>은 “서울의 큰 장사치, 그의 이름은 김한태 … 우람한 저택 수백 칸 저자거리에 우뚝 솟았네. 그래도 부족하다 여기는지 세 배로 증축하는데 … 최고 좋은 날만 골라 공사를 하니 완성은 오년이나 걸렸네 … 전후 수백 년 사이 이와 견줄 것이 있으랴”라고 했다.
신청자가 도성 내 거주를 희망하는 장소를 선정해 청원서를 제출하면 한성부에서 심사 후 입안(立案·인증서)을 발급했다. 토지사용권을 무상으로 부여하되, 집을 지은 후 가옥세를 징수했다.
도성의 면적은 한정돼 있는 현실에서 이주자가 늘면서 인구밀도가 높아졌다. 조선전기 한성부의 인구통계는 <세종실록> 1428년(세종 10) 윤 4월 8일 기사에 기록된 “도성 안의 10만3328명, 성저십리에 6044명, 합계 10만9372명”이라는 숫자가 유일하다.
다만, 실록에는 1405년(태종 5) 환도 이후 세종 때까지 한양의 호수 변동이 일부 언급돼 있다. 이에 따르면, 1409년(태종 9)은 1만1056호, 1435년(세종 17)은 2만1891호다. 호수가 불과 26년 동안 두 배나 늘어난 것이다.
<세종실록> 1435년(세종 17) 9월 2일 기사에서 “도성에 인가가 빽빽하여 어린 아이가 겨우 두서너 집 문만 지나도 길을 잃어버린다”고 할 정도다. 조정에서는 도성 밖에 방(坊)을 신설해 인구를 분산시키는 정책을 시행했고, 그 결과 도성 밖에도 동대문, 남대문, 서소문 주변에 인구가 밀집하는 지역이 생겨났다.
서울의 인구 과밀화는 조선 후기 심각한 국가적 문제로 대두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관료가 아닌 일반 백성들도 생계를 위해 서울에 올라와 살기 시작해 경강과 도성 주위에 사람들이 집중됐다.
<승정원일기> 1724년(영조 즉위년) 10월 18일 기사는 “지금 지방에서 겨우겨우 살아가는 자들은 양반이고 평민은 줄줄이 떠나서 집에 남은 자들이 매우 적다. 이 때문에 집값, 인가(人價), 논값이 전보다 크게 떨어졌는데도 사지 않는다”라고 공동화하는 지방의 현실을 개탄했다.
<현종실록> 1672년(현종 13) 9월 19일 기사는 “처음에는 수백명도 채 못 되었으나 현재는 도성에 포수(砲手) 5500여명, 별대(別隊) 1000명, 어영병(御營兵)이 1000명, 정초병(精抄兵)이 500명, 금군(禁軍) 7000명이며, 각 청의 군관들도 1만 명에 가까운데 …”라고 했다.
2만 명에 가까운 규모로 당시 인구를 20만 명으로 추정할 때 한성부 남자인구 중 20%, 한성부 전체 인구의 10%가 군병과 군관이었던 것이다.
학계에서는 당시 통계 작성기법 낙후 등을 감안할 때 17세기 후반 20만명, 18세기 전반 26만명, 18세기 후반 31만명, 19세기 33만~34만명 등으로 추계한다.
이는 땅값 상승과 주택 대란을 초래했다. 한양의 가옥가격 변동 분석 연구(조선후기 서울 주택가격 변동과 의미-유현재·김현우)에 의하면, 서울 가옥(기와집 초가) 1칸의 평균(중위값) 가격은 1800년대초 22.14냥에서 1800년대 말 91.33냥으로 4.1배나 상승했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17세기 초반~19세기말 가옥 문기’ 중 가격 정보가 표기된 268건의 문서를 분석한 결과다.
이 중 초가가 같은 기간 13.03냥에서 97.19냥으로 무려 7.5배나 급등했다. 서울에 상대적으로 신분이 낮은 계층의 서울 이주가 많아지며 주택 수요가 초가에 집중됐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한성부 내에서도 5부(部)마다 격차가 있어 중부의 집값이 동부, 서부, 남부보다 2배 이상의 차이를 보이며 가장 높았다.
한성부 5부 중 조선시대 강남이라 할 수 있는 중부에서는 오늘날처럼 투기행위가 극성이었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의 ‘부동산매매 관련 문서’에는 17~19세기 한성부 건물·집터 매매는 76건이 기록돼 있다. 이 가운데 중부 장통방 흑립전계(종로2가 일대) 어느 가옥(기와집 17칸, 마당 3칸)의 가격 변화는 서울 중심가인 종루 시전(市廛) 주변의 집값 상승 추세를 잘 보여준다.
이 주택은 1730년(영조 6) 첫 거래가 일어난 뒤 1802년(순조 2)까지 72년간 총 12차례 손바뀜됐다. 이 집은 처음 정은자(丁銀子·은화) 60냥에 매도됐고, 2년 뒤인 1732년 5냥 오른 정은자 65냥에 다시 팔렸다. 이때 집을 구입한 사람은 김진택이라는 인물이다. 김진택은 다시 1년 뒤 집을 조금 개조해 두 배 이상 비싼 정은자 140냥에 매도했다. 1년새 집값이 두 배 넘게 폭등한 것은 현재도 흔치 않은 일이다.
1798년(정조 22) 전문(錢文·상평통보 동전) 200냥에 이 집을 매수한 오국선 역시 4년 후인 1802년(순조 2) 집을 약간 손봐 2배 값인 전문 400냥에 매도했다. 이 가옥은 최종적으로는 동전 450냥에 거래됐다. 1786년(정조 10)에 구윤명이 편찬한 사찬 법전인 <전율통보> ‘호전’은 “정은 1냥은 동전 2냥으로 환산한다”고 했다.
이 집은 1774년(영조 50) 동전 350냥에 거래됐고 1797년(정조 21) 매매가가 500냥으로 상승했다. 35년 뒤인 1832년(순조 32) 800냥, 1844년(헌종 10) 900냥에 매매됐다. 그러다가 1852년(철종 3) 1000냥을 넘어섰고 1859년(철종 10)에는 1500냥까지 올랐다.
주택난이 가중되면서 임차 제도가 탄생한다.
나라에서 주택부족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임차료를 지불하고 주택을 빌리는 세입(貰入)을 권장하자 17세기 이후 세입이 일반화된다. 전세와 월세의 역사가 400년 이상 되는 셈이다.
세입자는 지방 출신의 고위관료에서 군병까지 다양했으며 1년 단위로 세를 지급했다. 거래를 중개하는 공인중개사도 존재했다. 가쾌(家儈), 집주름, 집 거간(居間) 등으로 불렸으며 매매의 경우 쌍방에게 매매가의 1%, 임대차는 집세의 0.5%씩 받도록 했으나 부당하게 수수료를 챙기는 일도 잦았다.
주로 훈련도감 포수들이 중개사를 겸직했지만 수입이 짭짤하다보니 다양한 사람들이 중개업에 뛰어들었다.
<영조실록> 1753년(영조 29) 7월 5일 기사에 의하면, 윤성동이라는 자가 남부의 집에서 도둑질한 혐의로 체포됐다. 그는 놀랍게도 도위(都尉·왕의 사위)의 후손으로 사족이었지만 집주름을 생업으로 삼았다.
2024년 현재, 서울 편중과 강남 집중 현상은 갈수록 극심해지고 있다. 김포, 과천, 광명, 구리, 하남 등 주변 도시들은 앞다퉈 서울로 편입되고 싶어한다. 이러다간 대한민국은 사라지고 서울민국이 될는지도….
<참고문헌>
1.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 옥호집(이조원)
2. 유현재‧김현우. 조선후기 서울 주택가격 변동과 의미. 조선시대사학보 제95권. 조선시대사학회. 2020
3. 조선 후기 한성부 상류주택의 규모와 영역별 실구성에 관한 연구. 홍승재·강인선. 한국주거학회 논문집 제22권. 2011
4. 조선시대 서울의 사회변화.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2014
5. 조선후기 한성부 토지·가옥 매매문서 1(중부·동부 편). 서울역사박물관.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