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취한 원숭이, 생존에 유리했다는데…인류가 술을 마신 이유 [김기정의 와인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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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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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취한 원숭이 책 표지. 아마존 사진 캡쳐
김기정의 와인클럽40- 술 취한 원숭이 가설


사람은 왜 술을 마실까요? 사실 인류만 술을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많은 동물이 알코올 섭취를 즐깁니다. 하지만 사람처럼 만취가 되도록 마시거나 알코올 중독으로 문제가 되는 동물은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진화론적 관점에서 ‘음주’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음주가 인류의 ‘생존’에 유리했던 것일까요?

최근 ‘와인의 역사’란 책이 나와 주문해서 읽어봤습니다. 저의 책장을 찾아보니 이미 같은 이름의 책이 두 권 더 있는데요, 저자는 모두 다릅니다. 이번에 나온 책은 인류학자와 분자생물학자가 공동으로 저술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습니다. 이 책은 ‘술 취한 원숭이 가설’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번 주 김기정의 와인클럽은 ‘술 취한 원숭이와 와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적당한 음주는 간헐적 단식, 운동처럼 몸에 좋다?
생물학자 로버트 더들리 UC버클리대 교수는 ‘술 취한 원숭이 가설’을 주장합니다.

더들리 교수에 따르면 진화론적으로 인류는 발효된 과일, 즉 알코올이 함유된 과일 섭취를 선호합니다. 이유는 알코올의 높은 칼로리 때문입니다. 술을 많이 마시면 술배가 불룩하게 나오는 것도 높은 칼로리 때문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항상 배가 고팠기 때문에 열량이 높은 발효 과일이 매력적이었습니다.

알코올이 함유된 잘 익은 과일을 찾는 능력이 생존에 결정적이었으며, 결국 술에 취한 유인원이 인간으로 진화됐다는 게 ‘술 취한 원숭이 가설’입니다. 먹을게 풍부한 현대사회에서도 인간이 ‘술’에 끌리는 이유는 수천년간 우리의 몸 안에 심어진 ‘술 취한 원숭이’의 유전적 메모리 때문일 수 있습니다.

알코올의 독성을 인정하는 학자 중에도 많은 양의 독소는 위험하지만 소량의 알코올 섭취는 사람의 몸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적은 양의 독소는 오히려 생체의 치유 메커니즘을 활성화한다는 측면을 본 겁니다. ‘호르메시스’(Hormesis)라고 알려진 현상입니다. 그리스어로 ‘자극한다’ 또는 ‘촉진한다’는 뜻인데 적당한 자극(독소, 스트레스)이 몸에 부정적인 영향보다는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개념입니다. 호르몬이란 단어도 여기서 나왔습니다.

호르메시스 현상 중 요즘 주목을 받는 것은 ‘간헐적 단식’입니다. 적당한 결핍으로 수명 연장 기전의 방아쇠를 당길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운동 역시 호르메시스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근육 운동으로 근육을 찢어 근육을 키우거나 유산소 운동으로 산화 스트레스를 만드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신에 맞는 ‘적당함’입니다. 운동을 아예 안 하거나 과도하게 하는 것보다 적당하게 하는 것이 좋다는 겁니다.

다시 ‘생존’의 관점에서 보면 술에 취한 상태로 있으면 적의 공격에 취약하기 마련입니다. 진화론에선 생존이 중요합니다.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의 측면에서 알코올 섭취는 생존에 도움이 되긴커녕 오히려 생존에 불리할 것 같습니다. 인류는 또 진화합니다. 쉽게 취하지 않도록 간에서 알코올을 분해하는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물론 이 주장에 대한 반론도 있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나 봅니다.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는 과일 속 알코올로는 만족못하고 알코올을 대량생산할 수 있는 술 양조, 증류방법까지 개발합니다. 결국 과음으로 인한 사회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진화론, 또는 유전학적으로 인간이 어떤 원인에 의해 알코올 중독에 걸리는지는 아직 명쾌한 설명을 못 내놓고 있습니다.

◇술은 몸에 안 좋지만 와인은 술이 아니다
논의의 범위를 전체 ‘술’에서 ‘와인’으로 좁혀 보겠습니다.

1800년대까지만 해도 증류주와 달리 발효주인 와인은 ‘술’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일종의 음식이었고 물의 대체제 역할이 컸습니다. 취하려고 마시는 게 아니고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음식을 더 맛있게 먹기 위한 수단이었죠.

과학자들이 몸에 안 좋은 알코올이란 성분이 ‘와인’과 같은 발효주에도 들어 있다는 걸 발견한 게 1820년입니다. 그전에는 럼이나 브랜디처럼 증류를 거쳐야 알코올이 생긴다는 사회통념이 있었습니다. 증류는 인공적인 과정이지만 발효는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나쁜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던 겁니다.

현대사회에서 지나친 음주와 알코올 중독에 대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와인이 다른 술과 달리 특별한 대접을 받았던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상당 기간 와인은 한정된 부유층의 음식이었습니다. 서민은 맥주나 기타 곡물로 만든 술을 마셨습니다. 기독교에서 와인에 그리스도의 피와 생명을 상징하는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도 와인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데 도움이 됐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어쩌면 가장 큰 이유일 수도 있는데 와인이 건강에 좋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고대부터 와인은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 주에 좀 더 자세하게 다룰 예정입니다.

미국에서 ‘금주법’이 생겨났을 때도 프랑스에서는 ‘와인을 마셔야 혈색이 좋아진다’는 통념이 강했습니다. 심지어 프랑스에선 증류주와 달리 와인은 술로 간주하지 않아 술 소비량을 조사할 때 와인을 빼놓고 조사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프렌치 패러독스와 발암물질
한 방송에서 기름진 음식을 먹어도 레드와인 덕분에 프랑스 여성의 비만이 적다는 프렌치 패러독스를 보도하고 있다. 유튜브 화면 캡쳐
19세기와 20세기로 접어들면서 다양한 진통제와 항생제가 개발됐고 와인은 ‘약’으로서의 위상을 잃게 됩니다. 또한 수돗물의 품질이 좋아지면서 물 대신 와인을 마시던 문화도 바뀌게 되죠. 1950년대 프랑스인의 3분의 1만이 식탁에서 물을 마셨다고 합니다. 이 수치는 1990년대 4분의 3으로 늘어납니다.

와인의 수요가 줄 수밖에 없습니다.

침체기를 겪던 와인의 구세주로 나타난 것이 프렌치 패러독스(French Paradox) 입니다. 학자들은 프랑스인이 영국인만큼 기름진 음식을 즐기지만 심장질환 발병률이 낮은 이유를 찾았는데요. 그 원인이 프랑스인이 즐겨 마시는 레드 와인 덕분이란 겁니다. 지나친 음주는 해롭지만 적당한 양의 와인은 관상동맥질환과 심장마비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연구결과가 1991년 미국 CBS의 60분(60 Minutes)에 소개되며 와인 판매고가 급신장합니다.

프렌치 패러독스는 흥미로운 관찰임에는 틀림없지만 와인과 건강의 관계를 지나치게 단순화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2009년 프랑스 국립암연구소는 알코올을 마시는 순간부터 암에 걸릴 위험이 높아진다고 발표하면서 또 다른 논쟁을 일으킵니다. 이후에도 적당량의 와인섭취가 알츠하이머 예방효과가 있다는 등 와인섭취의 긍정적인 내용과 함께 부정적인 내용도 혼재돼 보고되고 있습니다.

술 취한 원숭이가 인류로 진화했다는 가설은 신빙성을 떠나 흥미롭습니다. 정리해 보자면 인간이 술을 마시는 이유가 생존을 위해 발효된 과일 속 알코올을 먹어온 영장류의 행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건데요. 물론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봐도 인류가 항상 술에 취해있었다면 지금처럼 생존하지 못했을 겁니다. 인류는 적당한 음주를 통해 긍정적인 효과를 누리며 진화해 온 것이지요.

과거에는 ‘와인’을 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와인도 엄연히 알코올이고 지나치면 당연히 ‘독’이 됩니다. 저는 과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한 방울의 알코올도 몸에 안 좋다는 주장에는 반박할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체질적으로 술이 약한 와인 애호가로서 적당한 양의 와인은 삶을 풍요롭게 하고 인생에 자극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오늘도 ‘술 취한 원숭이 가설’을 검증하기 위한 임상실험에 나서 봅니다.

김기정 매일경제신문 컨슈머전문기자가 와인과 관련해 소비자들이 궁금해하는 내용들을 풀어드립니다. 김 기자는 매일경제신문 유통팀장, 식품팀장을 역임했고 레스토랑 와인 어워즈(RWA), 아시아와인트로피 , 한국와인대상 심사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기자페이지에서 ‘구독’을 누르면 쉽고 빠르게 와인과 관련한 소식을 접할 수 있습니다. 질문은 [email protected]로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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